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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라라 Nov 05. 2021

딸 자랑, 바보 엄마

로사에게

내 딸 안나 얘기 들어볼래? 안나는, 참 심성이 곱고 마음이 여린 아이야. 어려서부터 감성이 풍부하고 어쩜 자유로운 영혼을 보는 듯했어. 어린 시절 시골학교 병설유치원 3년이 안나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나날들이었지. 자연과 벗 삼아, 시골에서 10여 명 아이들과 유치원 선생님이 4계절 변화를 맘껏 누리며 봄이면 진달래 화전, 가을에는 은행나무 아래에서 술래잡기, 달팽이놀이를 하곤 했어. 그때를 생각하면 절로 미소가 지어지네. 삶에서 필요한 것은 유치원에서 거의 다 배운 듯 해. 처음 세상 밖으로 나가서 갔던 곳이 발레학원이었는데, 발레를 해보고 싶다고 까치발을 하고서 창문 너머로 발레수업을 받는 언니들을 열중하여 바라보던 어린 안나의 얼굴이 생각나네. 7세부터  초등 1학년 겨울까지는 발레학원을 다녔거든.


초등 2학년 때, 나는 아이 둘을 데리고 교육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며 연구소 사택에서 지내게 되었지. 연구소는 폐교된 학교를 리모델링하여 운영되던 곳인데, 하루에 시내를 오가는 버스가 4번만 운행되는 산골마을이었다. 안나는 발레학원을 계속 다니고 싶었지만 할 수 없는 여건이었고, 엄마가 힘들어할까 봐 발레를 하고 싶다는 말도 하지 않고 마음속에 꼭꼭 감춰놓고 있었나 봐. 초등 3학년 때 시골 작은 성당에서 첫 영성체를 하면서 수녀가 되는 것을 꿈꾸었고, 초등 5~6학년 때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기도 했어. 꿈 발표의 역사를 돌아보면, 발레리나에서 시작해서 수녀, 작가, 그림책 동화작가, 여성학자, 실용음악가, 심리상담사, 무용가까지 정말 다양하게 많은 것을 꿈꾸었었네.

어려서부터 책을 참 좋아했고, 아빠가 밤마다 그림책을 읽어줘야 잠드는 아이였거든. 한글은 따로 공부하지 않고 그림책을 보다가 어느 순간 저절로 터득했고, 홀로 있는 시간을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달달 외울 만큼 수도 없이 읽고 또 읽었고. 재잘재잘 엄마에게 이야기 들려주는 걸 좋아했지. 어린 시절부터 맑고 고운 미소 가득한 아이였단다. 가족들에게 참으로 많은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었어.

모든 것을 다 해줄 것 같은 아빠가 집을 떠나고, 바쁜 엄마를 배려하느라 홀로 외롭게 보낸 초등시절, 안나는 성당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어. 수녀님께 피아노를 배우고, 여름 겨울 성당 주일학교 캠프로 전국 곳곳을 여행 다니며, 성당이 학교이자 학원이자 놀이터 역할을 다 해주었네.


도시로 이사하고 얼마되지 않아, 안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엄마에게 어린 시절 꿈꾸었던 발레를 다시 해보고 싶다고 하더라. 그 말을 하기까지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겠지. 자기의 꿈은 발레리나였는데, 발레를 할 수 없으니까 수녀님으로 꿈이 바뀌었을 뿐이라고 하더라고.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수녀가 아니라 발레였다고. 발레학원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상황, 엄마 아빠에 대한 원망도 있었고, 시골에서 지내며 우울 무력감도 많았더라. 그때서야 '아이를 시골에서 키우는 것은 저주'라고 항변하면서 시골이 좋다 했던 언니랑 서로 말다툼을 했던 것도 기억이 나고. 마음 한편에선 깊은 슬픔이 밀려오는데, 담대한 척 눈물을 감추느라 그땐 차마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어.

시골에서 안나는 결핍이 많았던 것 같아. 그 당시 나는 일하며 아이 둘을 교육해야 했기에 늘 바쁜 엄마였고. 안나는 엄마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엄마를 생각해주는 착한 딸이었네. 언니는 욕심도 많고 독립적이며 뭐든지 적극적으로 잘 해내는 아이여서 공부든 활동이든 자기 하고자 하는 대로 주장을 굽히지 않는 반면, 안나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까지 생각하면서 타인에 대한 배려가 지나치다고 할까. 발레를 하고 싶지만 집안 사정을 잘 아는지라 하겠다는 말을 하지도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가지고 있었던 거지.

그날 밤 내가 안나에게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했어. 지금이라도 늦었지만 하고 싶은 만큼 해보자고. 주변에 발레학원이 있었으니까 결심하고 하고자 한다면 이제는 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주말 취미 발레로 레슨을 시작했어. 발레 전공을 하고 싶어 3개월간 발레 개인 레슨도 받았는데, 발레학원에서는 발레 전공을 하기에는 늦은 나이라고 하더라.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지금 시작해서 발레 전공반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발레를 포기하면서 안나는 하루 밤을 통곡하며 울었어. 되돌이킬 수 없는 운명에 하느님 원망까지 하면서. 밤새워 울고 나서는 "엄마, 나 발레를 전공하지 못하더라도 무용을 하고 싶어." "발레리나가 될 수는 없겠지만 무용은 하고 싶어"라고 하더라고. 무용을 하면서 몸은 힘들지만 움직임을 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몸짓으로 표현하는 것이 너무 좋다고. 그리고 무용을 시작하게 되었어. 무용학원에서 발레 현대무용 한국무용을 모두 해보고 작품을 받을 때가 되었는데, 한국무용 전통을 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하는 거야. 6개월 동안 작품 레슨을 하고 처음으로 비대면 동영상 콩쿠르에 나갔을 때 은상을 받았거든. 첫 콩쿠르이자 첫 수상인데 영상으로 안나가 움직임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쏟아지더라. 가슴 벅찬 감동.'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축하하고 지지 응원하며 힘찬 박수를 보냈었지.


이후 여러 갈림길에서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었어.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이리로 갈까, 저리로 갈까, 망설이며 주저하기도 하고. 길을 찾아 헤매면서 아직도 가야 할 길(on the road less travelled) 나는 안나와 나란히 걸어가고 있단다. 엄마인 나는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난관과 역경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더 큰데, 안나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하면서 떨리는 마음, 불안 초조함도 있지만 와 함께 설렘과 기대도 많더라고. 불안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엄마인 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작품 레슨 선생님은 안나가 참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모범적인 아이라고 해. 한 번도 레슨을 거르거나 늦은 적이 없고 레슨 참여하는 자세가 예의 바르고 착한 데다 겸손하다고. 선생님은 겸손하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엄마인 나는 안나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저평가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했어. 자신 없음이라기보다는 완벽하게 잘 해내려는 욕심이기도 한데, 바라보는 마음은 안쓰럽기도 하지. 예민하고 민감한 감각을 지닌 아이라 실수하지 않으려, 선을 넘지 않으려 무던 애쓰는 모습이 장점일 수도 있지만, 엄마로서는 참으로 많이 안타까웠단다.

첫 무대 콩쿠르 나갈 때는 심리적 부담이 많은지 "엄마, 나 상 못 타면 어떡하지?" 하며 안절부절못해하더라. 엄마로서는 상을 못 타도 상관없고, 결과 상관없이 지금 이만큼만으로도 눈물겹게 기쁘고 고마운데.

상반기 콩쿠르에서는 같이 무용을 시작한 친구들이 금상 받고 최우수상 받을 때 은상, 동상, 우수상 받으면서 의기소침해진 적도 있어. 무용을 계속하는 게 맞나, 재능도 없는데 괜히 붙들고 있는 건 아닌가 질문하며 고민도 많았고.

얼마전, 안나가 지역콩쿨에서 대상을 받았단다. 엄마로서는 눈물겹게 감동이야. 자식 자랑은 팔푼치라지만 바보 엄마여도 좋아. 딸 자랑 맘껏 할래. 얼마나 대견하고 자랑스러운지. 흔들리고 부서지는 마음 안고서도 꾸준히 연습을 거르지 않고 하더니 이번에는 드디어 대상을 받게 된 거야. 이슬아의 에세이 <부지런한 사랑>에 나오는 재능은 선택할 수 없지만 꾸준함은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나네. '재능과 꾸준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창작을 할 테지만 나는 타고나지 않은 것에 관해, 후천적인 노력에 관해 더 열심히 말하고 싶다'라고 했잖아. 작은딸 안나를 보면서 나도 꾸준함에 대해 더 열심히 말하고 싶어. 나도 딸을 본받아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꾸준함을 선택하려고 해. 나랑 함께 하지 않을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아이가 가려고 하는 길이 쉽지 않은 길임을 너무나 잘 알지만, 기도로 함께 하면서 한걸음 한 걸음씩 가보려 해. 결과야 어찌 되었건 하늘에 맡기고, 지금 이 순간에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라 생각하면서.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반복적으로 나왔던 그 말 기억하니? 의사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이제 나도 그 말을 하려고 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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