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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라라 Oct 04. 2021

"엄마,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나는 엄마다. 봄 햇살이 따뜻한 날에 태어난 큰딸 리나, 첫눈 내리던 겨울날에 태어난 작은딸 안나, 나를 엄마라고 불러주는 두 아이가 있어서 나도 엄마가 되었다. 

얼마 전, 작은딸 안나가 말했다. "어렸을 때 엄마는 바쁜 엄마, 아픈 엄마였어. 지금은 엄마가 아프지 않아서 참 좋아. 엄마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안나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아픈 척했던 건 아닐까. 그래야 잠시라도 엄마 역할을 내려놓고 쉴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엄마는 역할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임을 이제는 알지만, 그땐 몰랐다. 아프지도 않은데 엄마가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좋은 엄마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 나는 아프지 않아도 잠시 엄마 역할을 내려놓고 온전히 나 자신으로만 돌아와 나에게 쉼을 허락할 수 있다. 그래도 엄마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자서전 글쓰기에서 나의 탄생이 있던 날. 열여덟 살 안나는 무용학원에서 실신하였다. “어머니, 빨랑 오셔야겠어요.” 학원 원장님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헐레벌떡 뛰어나가 운전을 하면서 “괜찮을 거야. 괜찮겠지. 괜찮아. 괜찮아.” 엄마인 나는 어린 아기 달래듯이 스스로를 위안했다. 창백한 얼굴의 딸을 태워 응급실로 가는 동안 딸은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얼마나 기다렸다고?” 울먹였다. 깨어나서 소파에 누워 엄마를 기다리는 10분이 딸에게는 1시간보다 더 길었을 것이다. “미안해. 엄마는 최선을 다해 달려왔는데, 이렇게 늦었네. 이렇게 널 기다리게 했구나. 얼마나 애타게 엄마를 기다렸을까. 엄마가 미안해. 늦어서 미안해.” 마음속에 꽉 차오른 이 말들을 나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못했다. 미안해서. 너무 미안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혈관 미주신경성 실신이라는 의사진단이 나왔다. 자율신경계가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거나 미주신경이 예민한 사람들에게서 일어난단다. 2박 3일 동안 병원 입원 치료를 받으며 딸은 “엄마,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라는 말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히 했다. 아프다고, 힘들다고, 씻지 못해서 답답하고 미칠 것 같다고, 어떻게 이 상태로 잠을 잘 수 있냐고, 못 자겠다고, 집에 가고 싶다고, 징징대고 울면서 까탈스럽게 온갖 투정을 다 부렸다. 돌아서서는 미안하다고, 엄마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는 또 고맙다고. 다 받아주고, 이해해주고, 안아주고, 돌봐주어서 고맙다고. 수도 없이 “미안해” “고마워”를 반복했다.

퇴원하면서 안나는 따지듯이 물었다. “내가 엄마에게 미안하다 했는데, 고맙다고 했는데, 엄마는 왜 아무 말 안 해? 엄마는 왜 반응이 없어?” 딸과 마주 앉아 오랜 시간 이야기 나누면서야 알았다. ‘아하, 그랬구나. 내가 그랬구나.’ 미안해하는 딸에게 나는 무반응이었다. 미안해하는 딸에게 괜찮다고 마음속으로는 생각하면서도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말없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딸을 간호하면서 알았다. 어릴 적 나도 아플 때마다 누워서 다리를 치고 뒹굴면서 울었던 적이 많았다. 까탈스럽게, 예민하게, 투정 부리고, 엄마를 힘들게 했던 딸이었다. 엄마로 내가 딸의 투정을 받아주고, 도닥여주고, 달래주면서 기억해냈다. 나의 엄마도 어린 나를 그렇게 안아주고 밤새워 간병해주었다는 것을. 딸의 회복을 위해 매 순간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알았다. 나의 엄마도 새벽마다 부엌 솥단지에 정화수 떠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딸이 아프지 않기를, 딸이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빌고 또 빌었다는 것을. 그런데, 나는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다. 고맙다고도 하지 않았다. 그때는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이 자연스럽지 않은 시대였다. '내가 너무나 철딱서니 없는 딸이어서였을까?' 딸이 나에게 무수히 했던 그 말을 나는 엄마에게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 사과해본 기억도, 고맙다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해본 기억도 없다. 반면에 서운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투덜대며 다 드러내어 엄마 맘을 상하게 했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딸에게 “미안해, 고마워”라는 말을 수없이 들으면서야 알아차렸다. 

하늘에 계신 엄마에게 이제야 뒤늦은 참회. "엄마,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자서전 글쓰기를 하면서 출산에 대하여 생각했다. 엄마는 서른아홉에 나를 낳았고 마흔 넘어 남동생을 낳았다. 나는 서른셋에 첫 딸을 낳았고 서른일곱 눈 내리는 날에 둘째 딸을 낳았다. 엄마는 아이 여섯을 낳았고, 나는 아이 둘을 낳았다. 그리고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한 생명은 아이로 태어나지 못했다.

내가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사람들은 아들이라고 했다. 어른들은 뒤태를 보니 아들이라고 확신했고 초음파를 할 때마다 의사는 드러내지 않으면서 아들임을 암시했다. 남편과 나는 굳이 아들을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았지만 아들이려니 했다. 큰딸 리나가 태어나던 날, 리나를 처음으로 품에 안던 날,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아들인지, 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아기를 낳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황홀했던지. 예쁜 아가!!! 내가 아기를 낳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아기를 낳다니, 나의 아기라니. 이제 내가 엄마구나. 엄마가 되었구나.” 나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소매 깃으로 훔치며 아기를 바라보았다. 한없이 황홀했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 초음파를 보면서 의사가 우연히 내뱉은 말로 딸인 줄 알았다. 큰딸은 (언니가 된다는 것을) 좋아했고 시어머니는 (둘째도 딸인 것을) 아쉬워했다. 10년째 파킨슨을 앓으면서 기력을 잃어가면서도 아직 의식은 온전하셨던 엄마는 소식을 듣고 “(아들) 하나 더 나사큰게(아들 하나 더 낳아야겠네)”라고 하셨다. 나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엄마처럼 하나 더 낳지 않을 것이다. 아니, 하나 더 낳지 않아도 된다. 엄마와는 달리 나는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만 하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딸 둘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주 역학 공부를 하는 친구는 “걱정 마. 내가 가장 좋은 날로 (출산 일) 날 잡아줄게. 예쁜 딸 낳아. 난 딸 둘인 엄마가 제일 부럽더라”라고 했다. 임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망설였다. '이 아이를 낳을 것인가? 낳아서 키울 수 있을까?' 그때 집안 사정과 나의 건강 상태를 잘 알고 있던 한의사 선배는 “딴생각은 하지 않고(있니)?”라고 물었다.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어떡해? 어쩔 수 없잖아?”라고 말할 뿐이었다. '이 노릇을 어찌할 것인가. 그저 하늘의 뜻으로 알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밖에.'

마흔이 다 되어서 아이를 임신한 나는 몸과 마음이 허약해진 상태에서 입덧이 너무 심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며 버티고 견디어야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남편은 고백하기를 그 당시 자기는 낳지 말자고 하고 싶었단다. 자기가 어떤 결정도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나의 선택과 결정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그때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일인지. 작은딸 안나가 자라면서 그 존재함만으로 얼마나 큰 기쁨과 행복인지. 나는 딸이 좋다. 나를 닮은 딸이 있어 참 좋다. 엄마에게 온갖 투정 다 부리고서 미안해하는 것도 좋고, 엄마 힘든 거 알아주고, 엄마에게 고마워하는 것도 참 좋다.


노트북 앞에 앉아 후다닥 글쓰기를 하느라 레슨 나가야 하는 딸의 밥을 차려주는 시간을 놓쳤다. 딸은 엄마 방문을 노크하고 "엄마, 나 밥은?" 먼저 다가와 물어본다. 밥 달라고 하고,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으며 "진짜 맛있어!!" "고마워!" 엄지 척을 해 주는 딸이 좋다. 딸은 엄마랑 같이 밥을 먹는 것이 젤루 맛있고 행복하단다. 딸이 있어 같이 밥을 먹을 수 있어서 참 좋다. 나는 밥해주는 엄마가 되기로 한다. 그리고 딸에게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을 할 줄 아는 엄마가 되기로 다짐한다.

환영받지 못한 나의 탄생, 엄마 품에서 밀려난 미운 세 살의 어린 나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


"미안해."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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