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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라라 Oct 04. 2021

프리랜서 노동자의 비애

"우리도 노동자입니다"

"우리는 노동자가 아닙니까" 알바·프리랜서·청년노동자들의 외침이 있었다. '노동법 바깥'으로 밀려난 청년노동자들이 정의당을 찾아 노동 안정망에서 배제되는 청년노동자를 위한 대선 정책과 입법 노력을 촉구(오마이뉴스, 2021. 09. 16)하면서 던진 질문이다. 청년 정의당 강민진 대표는 "MZ 세대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안정된 일자리와 소득·자아실현·워라벨이 보장되는 존엄한 노동, 불의의 상황이 닥쳤을 때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을 원한다"라고 하였다. MZ 세대만의 문제일까? '노동법'에서 배제되어 아무런 보호망이 없는 밑바닥 노동으로 내몰리는 일은 세대를 넘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금 여기, 무탈한가요?>의 저자 오찬호는 '평범한 노동을 하찮게 대하는 사회, 이대로 괜찮을까?'라고 문제 제기한다. 켄 로치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를 소개하면서 오늘도 목숨을 걸고 달리는 배달노동자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저자는 '영국에 사는 리키 가족만의 문제일까?' 질문한다. 켄 로치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감독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미안해요, 리키> 두 편의 영화는 보는 내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가족과 함께 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에서부터 흐르던 무거운 침묵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조차 달라지지 않았다. 침묵을 깨고 영화 얘기를 꺼내며 다친 몸을 이끌고 차를 몰아 출근하는 리키에 대해 안타까움을 넘어 애잔함이 들끓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버거움, 전화위복의 문제 해결을 간절히 소망하던 마음에 마지막 장면은 냉혹한 바람으로 몰아치면서 견딜 수 없는 현실의 잔인함을 일깨워 주었다. 그는 자기가 리키여도 그렇게 했을 거라며, 부서지는 몸으로도 달리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는 삶의 무게, 노동의 비애를 허허로운 웃음으로 날려 보냈다. 


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직 프리랜서 형태로 이루어진 노동시장을 뜻하는 '긱(gig) 이코노미' '플랫폼 노동' '제로 아워(zero-hour) 계약'이라는 말들은 영어단어에서 느껴지는 멋스러운 느낌과는 달리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착잡하고 비참하다. 세상은 성장 변화하고 있는데, 노동자 삶의 질은 소득 불안정과 종일 노동의 밧줄에 묶인 채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좋다'라고 말하려면 최소한 다음 두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하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고 했다. 첫째는 '누구나' 대단한 꿈을 꿀 수 있고 노력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사회인가? 둘째는 대단한 꿈을 꾸지 않는 '누구라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가? 나는 이 두 가지 질문에 결코 긍정의 답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청년들에게 말하고 싶다. '누구나' 대단한 꿈을 꿀 수 있고, 노력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고, 대단한 꿈을 꾸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으로 함께 나아가자고. 그런 세상에 대한 믿음 소망 사랑을 잃지 말자고.

오찬호는 '이 세상 모든 존재에 대해 예의가 필요하다' '불평등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 끝까지 의심하기' '따져볼 수 있는 용기' '불평등 '벗어나기'가 아닌 불평등 '줄이기' 등을 말하며 "사회 '안'에서 살아감을 잊지 말고,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사회가 달라져야 함을 명심하자(p.226)"고 당부한다. 깊이 공감하며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 서로 존중하는 관계, 누구라도 존중받고 존엄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을 함께 만들어 가고 싶다.


초등학생에게 노동자를 그려보라고 하면, 태반이 공장에서 작업모를 쓰고 일하는 사람을 그린다. 경비원은 노동자여도 아나운서는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트 계산원은 노동자지만 증권사 직원은 노동자로 치지 않는다. 자리에 앉아서 일하는 사무직은 노동자가 아니고 공장에서 일하는 생산직만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 <지금 여기, 무탈한가요?> p.125


이 책에 나오는 초등학생의 시선으로 보면 나는 노동자가 아니다. 건설 현장에서 안전모를 쓰고 땀 흘려 일하는 그는 노동자여도 놀이치료실에서 내담자와 마주 앉아 상담을 하는 나는 노동자로 치지 않는다. 1인 자영업자인 택배 기사는 노동자여도 상담 센터와 업무위탁계약을 하고 용역을 제공하여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심리치료사는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노동자인가?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받은 임금으로 살아가는 직업인. 근로자·피고용자·피고용인'으로 노동자를 정의하고 있다. 인류 역사가 기본적으로 인간 노동을 기반으로 유지 발전되었으므로 만일 노동하는 사람을 가리켜 노동자라고 한다면 노동자의 출현은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나, 오늘날 통상 노동자라고 할 때에는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역사 시대에 노동시장이라는 특수한 사회경제 구조안에서 일하는 임금노동자를 의미한다. 노동자와 비슷한 개념으로 근로자라고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근로자란 누구인가? 국어사전에서는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의 대가로 받는 소득으로 생활하는 사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근로기준법'에서는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말하고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 조정법'에서는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임금, 급료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하는 자를 말한다.


나는 어떠한가? 나는 근로자인가?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아니라고 할 수 있다. 몇 해 전에 소득금액 증명원을 제출해야 해서 서류를 하기 위해 세무서에 갔을 때, 근로소득증명원이 아니라 사업소득증명원을 해야 한다는 담담 직원을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아하, 나는 근로자가 아니라 사업자였구나. 내가 하는 노동은 근로가 아니라 개인사업이었던 것이구나.'

나는 20여 년째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프리랜서는 일정한 소속 없이 자유계약으로 일하는 사람으로 법률상으로는 개인사업자의 형태로 계약을 맺는다. 20대 후반에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고 처음으로 프리랜서를 선언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출퇴근 없는 자유로운 직업이라며 부러워하기도 했었는데, 25년이 지난 지금은 프리랜서가 '과연 free한가?' 질문해보게 된다.

 "근로자란 시키는 대로 일하는 종속적인 의미를 부르는 것이고, 노동자란 인격을 존중하는 수평적 의미로 볼 수 있다"라고 노동자와 근로자의 차이를 설명하는 사람다. 그렇다면 나는 고용주가 시키는 대로 종속적으로 일하는 것은 아니므로 근로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보수를 받는 노동자임에는 분명하다.


나도 노동자이다. 프리랜서 노동자이다. 그가 건설 현장에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일당 보수를 받듯이 나는 심리치료 현장에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보수(대개의 경우 상담비의 50%)를 받는다. 그는 공무원 직장생활 몇 년과 사업주로서 1인 사업자 노동과 경영을 겸비했었던 7년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을 프리랜서 건설노동자로 살았다. 나는 비정규직으로 장애인복지관과 연구소에서 직장생활을 했던 것 이외에 20여 년을 프리랜서로 살고 있다. 제공하는 노동력은 육체적인 건설노동과 정신노동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프리랜서 노동이라는 점에서는 닮았다.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자율적으로 나의 노동을 제공하며 고용주의 지시명령 통제는 없지만, 사회 속에서 구조 속에서 따라야 하는 규율과 원칙은 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으므로 온전히 내 뜻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않다. 세상 만물 어느 하나 서로 맞물려 돌아가지 않는 게 없으므로. 내가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것도 있고, 내가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만 하는 것도 있다. 용역 제공의 업무를 거절할 수는 있지만 거절할 수 없는 주변 상황과 심리적 요인들이 있다. 가장 우선적으로는 일하지 않으면 수익이 전혀 없으므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보이지 않는 종속의 굴레가 있으며, 내가 하지 않으면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이 겪게 될 것들을 신경 쓰느라 미안해서 해야만 할 것 같은 심리적 부채감도 있다. 내가 수익의 감소를 감수하겠다 하더라도, 그것은 또한 사업주의 수익 감소로 연결되는 것이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사업주의 강요와 기대도 있으며, 그것을 거절했을 때 감당해야 할 불이익으로 불안을 겪기도 한다. 합당하지 않지만 미안함(또는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상황을 의연히 견뎌야 하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의 몫이다. 프리랜서로 아무 데도 소속되지 않음은 자유가 될 수도 있겠지만, 현실에서 감당해야 하는 불안정과 외로움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외로움을 달린다. 프리랜서의 삶은 홀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풍경과도 닮았다. 자유가 있는 반면, 고독을 감수해야 한다. 오롯이 홀로 다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옆에 함께 달리는 벗이 있지만 나와는 다른 바퀴로 굴러가고 있다. 나의 바퀴를 굴리는 것은 오로지 나의 두 다리와 양팔뿐이다. 나의 힘으로 가야 한다. 프리랜서 노동의 비애를 안고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프란치스코는 누구보다 멋진 삶을 살고 있다. 인생 동반자 글라라를 만나 바다처럼 넓고, 하늘처럼 높은 사랑스러운 리나ㆍ안나의 아빠가 되었다. 님과 함께 두 딸과 단란한 가족을 이루었지만 가장으로서 부양의 의무를 해야 하는 가족제도는 떠난다. 365일 거르지 않고 삼종 기도로 자식의 건강과 행복을 바라는 어머니, 팔순 노모가 있지만 성묘하고 제사 지내야 하는 조상은 버린다. 나고 자란 아름다운 고향을 그리워하고 언젠가 돌아가기를 꿈꾸지만 그곳만이 고향이 아니다. 세상 어느 곳이든 마음 닿고 걸음 머무는 곳이 그의 고향이다. 국적도 종교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지금 이 순간의 노동과 사랑과 기쁨이 있을 뿐이다. 그는 오늘도 부드러운 손을 묵묵히 움직이며 기쁘게 노동의 탑을 쌓아 올리고 있다. 그는 이반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은 육체 노동자이고, 나는 톨스토이처럼 이반의 나라를 꿈꾸며 글쓰기 노동을 하는 정신노동자이다. 그가 자신의 바퀴를 굴려 노동의 탑을 쌓아 올리는 동안 나는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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