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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라라 Sep 20. 2021

슬픔이여, 이제 안녕

그녀를 차단하고, 다시 찾아온 통증을 떠나보낸다.



이른 아침 새소리에 잠이 깼다. 오늘은 일요일. 지난 일주일은 분주한 일정을 살아내면서 상실에 대한 애도의 시간이었다. 대학 친구를 카톡 차단하고 미련 없이 그녀를 잊었다 생각했는데, 아직 남아있는 슬픔이 있다. 몸도 맘도 고단하다.

어젯밤에는 완경 이후 사라진 줄 알았던 허벅지 통증이 다시 찾아왔다. 통증을 잊기 위해 습관적으로 몸을 일으킨다. 수십 년 통증과 함께 살아오면서 터득한 방법이다. 걸어야 한다.

아침 산책길, 통증과 함께 걸으며, 그녀를 보낸다. 30년 지기 친구를 잃은 깊은 슬픔도 함께 떠나보낸다.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오전 10시 그녀들은 로그인 중> 책에 글을 썼고, 8월 마지막 날에 브런치 작가 승인을 받았다. 글쓰기 공동체 열일쓰('열정적으로 일단 쓰고 보자'의 줄임말)에 가입했고, 들뜬 마음으로 공개하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여성 자서전 쓰기 릴레이를 완주했고, 감짱과 함께 책으로 만드는 세상을 꿈꾸며 동네 작가로 글쓰기 운동을 하자고 했다. 새로운 시작, 9월을 맞이하며 설레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했던가. 9월의 문턱에서 예기치 않은 충격적인 을 겪었다.


임경선은 에세이 <태도에 관하여>에서 프리랜서 작가로 부당함에 저항했던 일화를 들려주며 ''좋게 좋게' 넘어가자는 담합의 유혹에 설득당할 때, 잘못된 관행은 점점 더 고착될 수밖에 없다(p.229)'고 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더 많이, 더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부당함에 항의하고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과정의 2주 동안 몸도 마음도 많이 아팠다. 잊고 있었던 통증이 다시 찾아올 만큼.    

임경선의 일화처럼 나도 비슷했다. 한 회사와 이메일상으로 업무를 진행하며 겪은 일이다. 대처방식은 좀 달랐지만, 부당함에 저항하는 작가의 태도에 동의한다. 작가는 '사소하고 별것 아닌 걸로 축소시키려 하고, 사소한 문제에 연연하는 것 같은 내 모습을 보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나에게 중요한 문제는 크고 작은 게 따로 없다. 사소해도 내게 중요하면 바로 잡아야 한다(p.224)'라고 말했다. "그렇지. 사소해도 중요하면 바로 잡아야지."


7월에 정식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채, 30년 만에 연락이 닿은 대학 동기에게서 원고 청탁을 받았다. 카톡과 메일을 주고받으며  <놀이치료사가 소개하는 창조 놀이>라는 원고를 완성했고, 원고는 사진자료와 함께 메일로 발송했다. 원고를 수락하면서 수정 요청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2주일 넘도록 아무 소식이 없어 확인차 먼저 연락을 했을 때, 상대는 직원이 실수를 해서 이번 원고는 게재할 수 없게 되었으며, 원고료는 예정대로 송금될 거라 했다. 원고가 실리지 못한다는 것이 서운하기는 했지만 괜찮았다. 덕분에 좋아하는 창조 놀이를 글로 정리해 볼 수 있었으며, 적은 금액이지만 원고료를 받으면 됐다고 생각했다.

8월에 다시 원고 의뢰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거절했다. 일정이 바쁘기도 했거니와 요청하는 원고의 기획 의도와 방향이 생각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이 일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9월 초에 지인으로부터 내 글이 인터넷에 게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글을 확인해보는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이제 어찌 된 일이지?" 원고가 산산조각 나서 짜깁기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첫 번째 글에서는 원고의 한 문장만을 가져다 썼고, 두 번째 글에서는 두 단락의 내용과 내가 보냈던 사진이 편집되어 엉뚱하게 들어가 있었다. 필자로는 낯선 이름 뒤에 내 이름이 나란히 쓰여 있었다. 황망한 마음에 온갖 상상을 하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했다. 원고료를 받았으니 그만인가 싶다가도, 필자로 내 이름이 들어가 있는 글을 무신경하게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원고가 조각나서 짜깁기되는 것에는 동의한 적이 없으니 이것은 엄연히 저작권 침해이지 않은가 생각했다.

주변 지인들과 전문가의 조언을 참조하고 회사에 확인 카톡과 메일을 보냈다.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 원고를 짜깁기해서 갖다 쓴 것은 다름 아닌 원고를 청탁했던 나의 대학 동기였던 것이다. 낯설었던 필자의 한 이름은 그녀의 필명이었고, 내 원고를 살리기 위해서 그런 거라고 했다. 사전에 얘기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미안하다 하였으나 오히려 나의 반응이 의외였는지, "불쾌하게 받아들일 줄 몰랐다"라고 했다. 그 말이 나를 더 당황시켰다. 생각의 차이인가? 태도의 차이인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모든 크고 작은 저항에는 힘겨움이 따른다. 감정 노동의 힘겨움, 스트레스나 번거로움, 시간 낭비, (내가 이런 부당한 일을 당할 만큼 약자임을 공개하는 것에 대한) 수치심, 그리고 (가해자의 앙심을 사게 되는) 보복의 두려움도 가지게 된다.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고 저항하는 일은 아주 작아 보이는 문제라도 불안하고 외롭고 두려운 일이다." - 임경선의 <부당함에 저항하기> p.224~225에서 부분 발췌


감정 노동의 힘겨움이 가장 컸다. 토막 나 버린 원고처럼 내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기분이었다. 원고료를 반환하고 필자에서 나의 이름과 내 원고 내용을 삭제 수정하거나 인용으로 사용해 줄 것을 요청했다. 동의 없이 원고를 사용한 것에 대한 사과와 더 이상 다른 곳으로 원고와 사진을 유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겠다고 장문의 메일을 보냈다. 회사에 불리함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걸까, 아님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하는 마음이었을까. 상대는 카톡 답으로 가능한 한 빨리 원고를 수정하고 내용을 삭제하겠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한 번의 실수로 처리하고 일은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카톡 메일을 주고받으며 오해의 실타래는 거듭 꼬여가기만 했다. 오해의 길은 쉽고 빠른 반면 이해의 길은 멀기만 했다.

상대는 수정 내용을 확인하면서 메일의 말미에 "그리고 혹시 해서, 내가 원고를 쓸 때 내용은 여러 텍스트를 봤지만 특히 아래 사이트를 참조해서 썼는데 혹시 원고의 다른 부분들을 원래 너의 원고를 짜깁기한 거라고 오해하진 말고."라고 덧붙였다. 이 말이 나의 예민함을 자극했다. 나의 원고와 게시된 글의 내용을 하나하나 대조하여 정확히 일치하는(다시 말하면 표절한) 부분을 형광펜으로 분명히 표시해서 회사로 확인 메일을 보냈다. 상대는 당황하였는지, 카톡으로 중간보고를 하고 간밤에 악몽까지 꾸었다며 심리적 불안을 호소하고,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간청했다. 상대는 빠른 일처리로 수습에만 집중했다. 또 다른 메일로 불리한 사태를 맞이하게 될까 불안해했다. 부당함에 저항하면서 나의 정당한 요구는 공격으로 오해받았다. 그래도 나의 예민함이 '이건 아니지', '그래서는 안된다'라는 감각의 경종을 울리는 데는 성공했다 할 수 있을까.   


변호사는 원고료 유무와 상관없이 저작권 침해가 분명하고 글쓰기 노동과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피해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다고 했으나,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이미 동강나버린 대학 4년의 우정과 상처 입은 정신의 가치를 물질적 보상으로 회복할 수는 없을 테니까. 더 이상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바라고 기다린 것은 진정성 있는 사과였다. 그녀와의 우정을 지키고 싶었는지 모른다. 마지막 메일까지 진심 어린 사과의 말은 없었다. 나는 카톡 친구 목록에서 그녀를 차단하고 대학 4년 그녀와의 우정을 버렸다. 그제야 그녀는 장문의 메일로 사과 변명을 하였지만 나는 침묵으로 응답했다. 






우울의 터널을 빠져나와 아침 햇살 아래 통증과 함께 걸으면서 깨달았다. '나와는 참 많이 다르구나.' 하는 일, 성격, 사회적 지위와 역할,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대처 방식 등 그녀와 나는 서로 다른 점이 많았다. 카톡에서 그녀를 차단하면서 2년 전에 내가 차단당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제외하고, 제외당하는 상실의 상처는 누구에게나 아프다. 그녀를 보내고, 슬픔도 통증도 저 하늘의 구름 따라 날려 보낸다.


슬픔의 좋은 점은 뭔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모든 일에 공통적인 딱 한 가지 결과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거라고. 이 슬픔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나는 소망한다. 이번 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타인의 글에 대한 존중의 태도와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윤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를.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해 예민함을 잃지 않기를. 나와 다름을 있는 그대로 존중할 수 있기를.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다시 읽으며 또 하나의 질문을 품는다. 동네 작가로 글쓰기 운동을 선언하고, 브런치 작가로 공개하는 글쓰기를 하면서, '나는 글을 써야만 하는가?' 써야만 한다면, '무엇을 쓸 것인가?' & '어떻게 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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