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엄마와 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글라라 Dec 13. 2021

아무것, 아무것도 아닌 것 3.

3화.  오싹한 일

아무것, 아무것도 아닌 것(Something & Nothing)          

3화. 오싹한 일

  

미숙이 아침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학교에서 긴급 알림 문자가 왔다. 추가 확진자가 1명 더 나왔다, 다시 역학조사를 하여 검사대상 안내를 할 거라는 내용이었다.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보미도 추가 확진되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암담했다. 집에 돌아와 방문을 살짝 열어보니 보미는 아직 잠들어 있다. 보미는 잠든 얼굴이 가장 사랑스럽고 예쁘다. 잠든 보미 옆에 끼어들어가 품에 안으면 그렇게 따뜻하고 포근할 수 없다. 내가 아이를 안아주는 것인지, 아이 품에 내가 안기는 것인지 미숙은 그것을 굳이 분별하지 않는다. 그냥 좋다. 민철이 떠나고 없는 빈자리를 보미가 함께 해주고 있다. 보미가 옆에 있어서 외로움과 쓸쓸함을 견딜 수 있었다. 오늘은 잠든 보미 곁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혹시나 밀접접촉자라면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미숙은 조용히 쇼핑백을 들고 나왔다. 마트에 들러 보미가 주문한 것들을 사다 놓아야지 생각하며 그동안 보미가 얼마나 많이 엄마의 일손을 덜어주었는지를 문득 실감했다. 도서관에 들러 보미가 보고 싶었다던 프랑스아즈 사강의 책과 이금이의 소설을 빌렸다. 미숙은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골라 도서 대출했다. 

미숙에게는 소설 읽기가 가장 쉽고 빠르게 지금 여기를 떠나 다른 곳으로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이다. 베스트 드라이버인 민철이 있을 때는 그가 운전을 해주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미숙은 운전을 하지만 장거리 주행을 하지 못한다.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멀어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장거리 여행을 좋아하지만 민철이 떠난 이후에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제 미숙은 소설이 데려다주는 풍경 속으로 여행하는 새로운 습관에 익숙해졌다.    


도서관에서 나오자 휴대폰이 울렸다. 보미다. 보미에게 검사 결과를 묻고 싶은 조바심이 있지만 미숙은 먼저 묻지 못했다. 

“학교에서 추가 확진자 나왔다네.”

“응. 1명 추가 확진이래.” 

보미에게는 아직 검사 결과 문자가 오지 않은 걸까. 왜 보미는 검사 결과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는 걸까. 미숙은 다른 얘기만을 하고 있는 보미가 점점 불안해져서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물어보고 말았다.

“너는? 검사 결과 문자 왔니?”

“응. 음성이래.”

보미는 당연한 듯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미숙은 휴! 가슴을 쓸어내렸다. 엄마 반응이 의외였는지 보미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걱정했어?”

“그래, 걱정했지. 추가 확진자 나왔대서 너도 혹시나 양성이면 어떡하나, 맘 졸였지.”

“에이, 그럼 안 되지, 그럼 정말 큰일 나지. 그럴 리가. 그럼 엄마는 어떡하라고.”

지금 자가 격리해야 하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자기가 양성이면 엄마까지 자가 격리해야 하고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며 보미는 웃었다. 자기로 인해 엄마가 힘들까 봐 염려하는 마음이 어릴 때나 자라서나 여전하다는 생각을 하며 미숙은 고맙기도 하고 마음이 짠하니 안타깝기도 하다. 

보미가 주문한 아이스크림, 과자, 음료수, 간식 등등을 사고 나니 짐이 한아름이다. 혼자서 쇼핑은 쉽지 않다. 민철이 있었다면, 큰딸 새미가 있었다면 이 무거운 짐들을 거뜬히 들어주었을 텐데. 미숙은 한 손에는 책가방을 또 한 손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낑낑거리며 길을 걸었다. 온몸이 땀에 젖고 이마에 식은땀이 몽글몽글 맺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찬기운에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다. 열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체온 변화가 있는 갱년기 증후가 벌써 10년째이다. 떠나려 하지 않는 갱년기에게 안녕, 하고 작별을 고하고 싶다. 휴, 혼자서는 장보기도 힘들고, 예전에는 그까짓 것이야 하던 무게도 힘에 부치기만 하고, 미숙은 한숨을 내쉬며 길 한편에 멈춰 서서 짐을 내려놓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하늘에 하아얀 구름송이들이 슬픔의 파도로 밀려드는 듯했다. 파도의 포말이 사라지듯 괜시리 서글픈 이 마음도 저 구름 따라 사라졌으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가 어젯밤에 읽었던 소설 <미스터 심플>에서 보았던 문장들이 떠올랐다.     


 ‘누군가 내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입니다. 내 이름은 슬픔입니다. 나는 아내와 아들을 잃은 남자입니다. 한때 오케스트라에서 연주를 하는 음악가였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무심결에 입술에서는 사랑의 송가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이디가 미스터 슬픔에서 미스터 심플로 바뀌었다는 부분을 읽으며 미숙은 '그렇다면 나도 미시즈 심플?' 생각해보았다. 입가에는 어색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오래전부터 미숙이 소망해온 삶, 심플 라이프.      


보미가 방 안에서 재잘재잘 깔깔거리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들과 전화통화를 하며 자가 격리자에게 구호물품이 택배 발송된다 하고, 재난지원금도 나온다 하고, 조잘조잘 재미있는가 보다. 이제 마음이 좀 편안해졌나, 미숙은 안심이 되었다. 다시 소설책을 집어 들었다.   

대상 수상작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의 마지막을 읽고 책을 덮었다. 어설프게 잠이 들려던 찰나, 비몽사몽 꿈결 같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엄마아!” 

아이의 비명 소리. 미숙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귓가에 울리는 희미한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꿈이었나,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옆 집에서 들린 소리였을까, 뭐지, 머리에서 온갖 상상이 굴러가다가 번뜩 혹시 보미 목소리였나, 하는 생각에 후다닥 일어나 건넌방으로 뛰어갔다. 보미는 침대 위에 누운 채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두 눈만 빼꼼 내밀어 덜덜덜 떨고 있는데,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다가가 괜찮다고 등을 쓸어내리고 토닥여주며 물었다. 보미는 손가락 끝을 세워 천정 위 형광등을 가리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지직'하면서 형광등 불빛이 깜빡깜빡거리고 무언가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단다. 형광등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 소리도 없이 고요한 정적으로 방안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정말이라니까! 정말 소리가 났다고!" 

보미는 울먹울먹 하다가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소리가 나지 않으니 괜찮다고 아이를 달래면서 미숙도 마음 한가닥 의심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저 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게 뭘까. 혹시나 하는 불안 염려가 있으면서도 겁 많은 미숙은 그 정체를 확인해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자정을 넘긴 시각,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다. 이까짓 일로 관리실에 전화를 할 수도 없고, 누군가를 부를 수도 없다. 오롯이 미숙 혼자서 해내야 했다. 미숙으로서는 아이를 달래고 재우는 것 이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아이를 진정시키고 나와서 민철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전화를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늦은 시간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민철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알아차렸다. 

민철의 추측이 맞다면 형광등 안으로 날라 들었다가 감전되어 타버린 어떤 생명체의 시체가 형광등 안에 남아있을 것이다. 겁 많은 엄마와 딸은 그 정체를 확인해볼 수 없으니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영원히 그 정체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무것, 아무것도 아닌 것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