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오전 10시, 동네 작가로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by 이글라라

감짱에게


드디어 6개월의 긴 여정, 릴레이 여성 자서전 쓰기가 끝났네요. 당신과 함께 했던 180일 동안의 치유하는 글쓰기는 지난한 과정이었습니다. 끝까지 완주하도록 손을 놓지 않고 붙잡아 준 감짱에게 깊이 감사드려요. 함께 한 동료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고맙고요.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참 기쁘고 행복했어요.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맘껏 쓰고, 맘껏 울 수 있었네요.

내 인생에는 완주보다는 stop, turn, return, delay의 역사가 많았어요. 어릴 적 작가의 꿈은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국어교사의 말에 국어학자로 바뀌었고, 그것조차도 대입 원서를 쓰는 교사의 펜 끝에서 국어가 영어로 달라져 버렸고요. 명문대에 합격했지만 기쁘지 않았어요. 대학 4년 내내 전공과는 담쌓고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찾아다녔어요. 청춘의 열망이었을까요? 아니면 진득하니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하는 역마살이었을까요? 연극에 대한 열망은 대학 연극반 동아리 정기공연에서 배역을 맡지 못한 채 코러스로 단 한 번의 무대 경험으로 끝났고요. 그 후 연극동아리는 탈퇴했지요. 선배들의 전교조 참교육 운동을 보면서 교사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키웠지만 임용고시 낙방으로 그 꿈도 좌절되고, 20여 년을 학교밖 교사로 살았어요. 마흔이 넘어서 우연히 연극치료 워크숍에서 젊은 날의 잃어버린 꿈을 만났네요. 그리고 다시 연극치료사를 꿈꾸었는데, 그 꿈은 남편의 사업실패로 생활전선에 뛰어들면서 예술치료 대학원을 중퇴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참으로 많은 길을 돌고 돌아 지금 여기까지 왔네요. 자서전 쓰기를 하면서 많은 좌절과 우울의 순간들을 만났어요. 글을 쓰기 전에는 파란만장했던 내 인생이 참으로 불쌍하다 자기 연민에 빠진 적도 많았는데, 글을 쓰면서 연민은 사랑으로 승화된 것 같아요. 불쌍한 게 아니라, 우여곡절, 수많은 고비들을 넘고 넘으며 아직도 가야 할 길(on the road less travelled) 위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왜 나는 그 꿈을 잊고 살았을까


어린 시절 많은 불행의 기억 속에 유일하게 행복한 순간은 고등학교 문예반 별밭에서였어요. 인생의 열두 고비, 인생곡선을 그리면서 좌표 아래에 불행했던 기억들이 많은 반면 좌표 위에 행복했던 순간들은 그리 많지 않더라고요. 사춘기 문예반 별밭에서의 추억들, 인생 동반자 그와의 만남, 글라라로 세례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재탄생, 두 아이의 엄마, 놀이치료사로 지금 이 순간이 행복이었어요. 여고시절 동아리 별밭에서의 소소하고 아름다운 기억들을 떠올리며 참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낡은 서랍에서 꿈 조각 하나를 꺼냈습니다. '아아, 맞아. 내가 여고생 때 문학을 좋아하는 소녀였는데. 시를 쓰고 시화전을 하고, 글을 쓰고 백일장에서 상도 꽤 많이 탔었는데. 그런데, 왜 나는 그 꿈을 잊고 살았을까.' 자서전 글쓰기를 하면서 알았어요. 어릴 적 내 꿈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는 것을. 국어학자, 국문학자가 되고 싶었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고,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아주 멀리 와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감짱이 제게 그랬지요. 글 쓰며 살아가는 삶이 나에게 어울린다고. 그 말 한마디가 저에게 새로운 길안내가 되어주네요. 감사해요.



아름다운 마무리, 완주의 순간들.


올해 여름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습니다. 릴레이 자서전 글쓰기를 마쳤고요. 아름다운 마무리, 내 인생에서 세 번째 완주예요. 첫 번째 완주는 장애인복지관 심리치료실에서 380일간 25명 내담자와의 놀이치료 동행이었습니다. 두 번째 완주는 7년 여정으로 마무리한 대학원 석사 논문이고요. 그때부터였어요.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가슴에 품은 것이. 논문을 마치며 긴 여정의 끝에서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글을 쓰면서 생각했어요. 학술적 글이 아니라 삶의 글쓰기를 하고 싶다고. 자서전 글쓰기는 내 인생의 세 번째 완주예요. 그리고 네 번째가 또 있어요. 감짱에게 제일 먼저 자랑하고 싶어요. 자서전 글쓰기를 하면서 목요일 오전 10시에 길 위의 인문학 강좌를 수강했어요. 3개월 동안 도서관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엄마는 에세이스트, 쓰는 엄마는 힘이 세다' 글쓰기 강좌였는데, 강좌를 마치며 참가자 17명 엄마 에세이스트들이 책을 출판했어요. 지난 목요일은 책 출판 기념회였네요. 책 제목은 <오전 10시 그녀들은 로그인 중>이에요. 노트북을 켜고 줌으로 로그인하고 동영상 화면으로 만나는 동네 엄마들과의 시간이 자서전 글쓰기만큼이나 행복했어요.


내가 자랑스러워요. 수고했다고 나를 안아주고 있어요. 매 순간 할까 말까 망설이고 주저하면서도, 할 수 있을까, 다 해 낼 수 있을까, 바쁜 일정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도, 그래도 한번 해보자, 하는 데까지만 해보자 하면서 한걸음 한걸음 내딛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여름의 끝에서 이제 홀가분해요. 가을바람맞으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합니다. "앞으로 완주하시는 일이 점점 더 많아질 겁니다"라는 감짱의 댓글에 얼마나 많은 지지 응원이 되었던지요.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큰 행운이지요. 감짱이 그랬지요. 어쩌면 앞으로의 인생에 대부분 완주만 있을 수도 있다고요. 법정 스님은 그러셨어요.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내가 꿈꾸는 책세상, 동네 작가로 글쓰기 운동


이제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 잃어버렸던 꿈을 되찾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겠어요. 글쓰기 강좌에서 만난 엄마들과 글쓰기 모임을 시작했어요. 모임 이름은 '열정적으로 일단 쓰고 보자' 열일쓰예요. 젊은 엄마들과 함께 하면서 느림보 거북이로 SNS에서의 빠른 속도를 따라가기 버겁고 헉헉거리기도 하지만 열심히 해보고 있어요. 덕분에 브런치 작가 등록도 하였고요. 젊음과 함께 한다는 것은 삶에 생기를 주는 기쁜 일인 것 같아요.

감짱과 했던 마지막 만남에서 저는 또 하나의 꿈을 만났습니다. 감짱이 말한 '내가 꿈꾸는 책세상'은 정말 멋져요. 내가 그토록 그리고 원하던 세상이에요. 영웅담, 베스트셀러가 없는 세상. 성공담에 관심이 없는 세상. 내 이웃들은 나와 어떻게 다르게 살고 있지, 이웃에 관심을 가지는 세상. 사소하고 아름다운 일상에 세세한 관심을 가지고 타인을 이해하며 자신을 분명히 알아나가는 과정으로서의 글쓰기. 평범한 사람들이 자서전을 쓰고 서로의 삶에 대해 깊이 물어보고 얘기 나눌 수 있는 세상. "내 살아온 얘기 한번 들어볼래?"라고 타인에게 말걸고, 내 얘기를 들려주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살아온 이야기를 하루 종일 들으며 그 사람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동네책방에서 동네 작가들이 모여 책 읽고 글 쓰고 책 만들고 북 토크하고 도란도란 인생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세상이요. 제가 꿈꾸던 세상을 감짱에게서 듣고 너무나 반갑고 기뻤어요.



함께 꿈꾸어요, 우리.


여럿이 함께 꿈꾸면 그것이 현실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요. 푸르미가 들려준 동네 작가들 이야기도 감동이었어요. '책은 나의 글이 머무는 집이다'라는 말이 잊히지 않아요. 나의 글이 머무는 집을 짓고, 친구들 집들이에도 가보고, 그렇게 함께 하는 글쓰기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황홀한 소식이었습니다.

나이 오십에 며느리 사표를 내고 독립 준비를 시작했어요. 오십 번째 생일날, 두 딸에게 선언했지요. 이제는 엄마, 아내, 며느리가 아닌 나로 살겠다고. 결혼 20년, 이제 결혼을 졸업하고 가족이라는 제도를 떠나요. 가족제도라는 틀에서 벗어나, 역할로서가 아니라 존재로서 너와 나의 만남을 꿈꾸어요. 제게 결혼 졸업이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가족제도라는 틀에 갇혀 좋은 엄마가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나, 개별적 존재로서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이에요. 나를 치유하는 글쓰기, 혼자서 하는 글쓰기에서 출발하여 이제 함께 나누면 더 좋은 글쓰기, 글쓰기 운동으로 나아갑니다.

마지막 날 말씀하셨지요. 우리 모두 동네 작가로 글쓰기 운동을 하자고요. 네. 저는 이제 동네 작가로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감짱이 꿈꾸는 책세상을 저도 함께 꿈꾸겠습니다. 언제 까지든 저를 응원해주실 거죠. 난 알아요. 감짱이 늘 뒤에서 응원해줄 거라는 걸. 언제 까지든 함께해요, 우리.


- 8월 마지막 밤에 감짱과 함께 책으로 만드는 세상을 꿈꾸며. 이글라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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