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살아온 얘기 좀 들어볼래?
돌아보니 지난 20년 동안 결혼생활에서도 열두 고비가 있었네. 큰딸이 12년 학교생활을 졸업하면서, 나도 결혼을 졸업했어. 결혼 20주년에 그와 나는 결혼을 졸업하기로 했지. 아내 역할, 남편 역할, 사위 역할, 며느리 역할 등등 가족이라는 틀에서 부여되는 역할을 이제 그만 하자고 했어. 역할을 벗어버리고 나니 엄마, 아빠의 존재만 남더라. 부모 동반자로서 삶을 함께 살아가되, 서로에게 요구하고 기대했던 가족 안에서 역할은 이제 그만하자고 합의를 했어. 그러고 보니 엄마, 아빠의 자리는 역할로서가 아니라 실존적인 존재 그 자체더라고. 지금 나에게는 엄마의 길과 개별적 존재로서의 삶만이 남았네.
이제 결혼 이야기를 들려줄 게.
첫 번째 고비는 결혼 2년 후였어. 신혼의 꽃피는 봄은 금방 스러져가고 화려한 봄날은 그리 길지 않더라. 큰애 낳고 얼마 되지 않아서 시아버지 사업 실패. 그때가 첫 번째 이혼 위기였어. 갓난아기를 안고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 그에게 "아버지냐? 나와 아이냐?" 선택을 강요했던 것 같아. 나와 아이를 선택하기를, 부모님 상황을 외면하고 나와 아이를 선택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야. 그가 아버지 부채를 떠안고자 하는 것이 내겐 마치 목숨 걸고 불난 집에 아버지를 구하러 뛰어들어가는 무모함으로 느껴졌거든. 나와 아이는 어떡할 거냐고 울부짖으며, 나와 아이를 생각해서 시아버지를 포기해주기를 기대하고 요구했지. 그는 침묵으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어. 당시 그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을지도. 침묵만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둘 다를 지켜내는 길이었을지도. 부모와 아내가 선택의 문제가 결코 아님을 그때는 몰랐어.
두 번째 고비는 첫 보금자리였던 신혼집을 잃고 낯선 타향으로 이사해야 할 때였어. 시아버지 집에서 거주하고 있던 우리는 살던 집을 비워줘야만 했지. 당장에 이사비용조차 한 푼 없는 빈털터리 신세가 되어서 어디로 가야 하나 난감한 상황.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낯선 지방의 임대아파트를 구해 이사하게 되었지. 아버지 사업을 도와 일을 하다가 졸지에 실직자가 되어버린 그는 생계를 위해 후배가 하는 이삿짐센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후배가 차량을 빌려 주어서 덕분에 큰돈 들이지 않고 이사를 할 수 있었단다. 가난의 설움, 비참함. 나는 이 가난이 한없이 창피하고 부끄러웠어. 가난은 나의 잘못, 무능력의 결과로 생각되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것 또한 미안하고 불편했고.
세 번째 고비로 떠오르는 것은 임대아파트에서 지내면서 있었던 일이야.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면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 00 아파트에서의 미친 짓. 어느 날 밤, 어린 딸을 할머니 집에 보내 놓고서 그와 술을 먹다가 나는 술에 만취해 분노를 폭발했지. 아주 가끔 나는 술에 취해서 술을 핑계로 미친 짓을 할 때가 있었어. 그는 술을 하지 않아. 술 먹고 이성을 잃을 때가 전혀 없지. 분노를 느끼면서도 그 분노를 폭발하기보다는 스스로 잘 다스려 잘 처리하는 사람이야. 반면에 나는 처음엔 기분 좋게 술을 마시다가 술이 과해지면 그동안 억압해 둔 분노, 억울함, 슬픔, 비참함 등을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쏟아내곤 했어. 그날 밤도 그랬었지. 자식에게 빚을 떠넘기는 시아버지에 대한 원망, 바보처럼 모든 것을 떠안기만 하는 그의 침묵을 견딜 수 없었던 나는 10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린다고 소동을 피웠어. 이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술 취한 사람의 미친 짓, 한 여름밤의 소동. 참으로 부끄러운 기억이야.
네 번째 고비는 정말로 넘기 힘들고 고통스러웠어. 갑작스러운 남동생의 암 선고, 뇌출혈로 쓰러진 시아버지, 파킨슨이 깊어지면서 치매와 정신질환 증세까지 보이시는 엄마. 그 와중에 예기치 않은 둘째 임신까지. '아아 나는 어쩌란 말인가?', '신이시여, 왜 저에게 이런 시련과 고통을 주시나이까?' 울부짖으며 통곡했던 시간. 둘째를 임신하고 입덧이 너무 심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한 때는 병원에서 링거를 맞으며 버티어야 했어. 출산이 다가오면서 조산 위험이 있다고 꼼짝 말고 집에만 있으라는 경고를 받았고. '나는 이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아이를 낳고 잘 키울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불안하고 두려웠던 시절. 어느 날 엄마는 내게 전화를 걸어 당신 아프고 힘든 이야기를 하며 하소연을 하셨지. 나는 아픈 엄마에게 "늙으면 다 아프고 그런 거지. 아프면서 늙는 거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딨냐고요?" 고래고래 소릴 질렀어. 엄마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 되돌이킬 수만 있다면 주워 담고 싶었던 엄마에게 했던 모진 말. 어쩜 내가 엄마에게 말하고 싶었던 건 '지금 나도 아프다고요. 나도 힘들다고요. 내가 얼마나 힘든지, 당신은 아시나요? 나도 엄마만큼, 아니 어쩜 엄마보다 더, 나도 아프다고요' 이런 말이 아니었을까. 속마음은 '나도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고, 안기고 싶고, 위로받고 싶어요. 나 좀 안아주세요.' 이렇게 하소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다섯 번째 고비. 남편은 시아버지 부채를 갚아보겠다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어. 사업 자금 대출로 어렵게 시작한 사업, 월말이면 운영자금이 없어서 힘들어하는 그를 돕기 위해 나는 지인들 돈을 빌려다 주었고, 그건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도 같았지. 차라리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그 길을 가지 말 것을. 한 발을 내딛고 나서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되돌이킬 수 없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얼마나 많이 후회하고 또 후회했는지.
여섯 번째 고비. 사업을 하면서 1년 365일 연중무휴로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고된 노동을 하지만 마치 헛삽질하는 듯, 결과는 덧없고 허망하고 안개 자욱한 미로를 헤매고 있던 시기였어. 엄마의 죽음과 연이은 시아버지의 죽음. 그 와중에 자금난을 해결해보겠다고 고민 갈등하며 동분서주하던 시동생은 도박중독에 빠지게 되고. 시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나서 정선카지노 주변을 뒤지며 시동생을 찾아다니던 그때는 정말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심정이었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이렇게 끝도 없이 시련을 주시나.' 하느님 원망도 많이 한 것 같아. 시아버지를 보내고, 벼랑 끝까지 갔던 시동생이 살아 돌아오고, 시동생을 정신 병원에 입원시키고 돌아오는 길, 그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그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일곱 번째 고비. 자금난에 시달리면서도 성실한 노동으로 근근이 사업을 연명해오던 그는 시아버지의 부채로 인해 신용거래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고 결국은 사업 포기를 선택했어. 스스로 실패를 인정하고, 가던 길에서 방향을 되돌렸지. 어느 날 오후, 내가 일하던 센터 사무실 앞으로 찾아온 그는 조용히 나를 불러 내더니 차를 몰아 서해바다로 가더라. 말없이 방파제 위를 걷다가 멈춰 서서는 저 멀리 수평선 낙조를 바라보며 말하더라. "나 이제 더 이상 이 길을 가지 못하겠어. 이제 그만 하려고. 여기서 멈추려고. 이 길은 나의 길이 아닌 거 같아." 그는 사업장을 정리하고서 고향으로 내려갔어. 나는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지. 그를 따라갈 수도, 그것이 아닌 다른 뾰족한 대안도 없는 막막한 상황. 막다른 길에 서면 그곳에선 다시 새로운 길이 열린다더니 연구소 팀장으로 일을 하면서 사택에서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거야. 두 아이를 데리고 연구소 사택으로 가기로 했어. 그리고 그를 보내주었지. 가장으로서 짊어지고 있던 생계에 대한 부담과 책임을 면책해주고 내가 그 책임을 맡게 된 거지. 한부모 여성 가장으로서, 두 아이의 엄마로서 삶을 살아내야 했어. 어렵게 선택하고 시작한 예술치료 대학원 공부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도 다행히 나에겐 일이 있었고, 일을 하면서 지낼 수 있는 사택 제공 직장이 있었으니, 하늘의 도우심이라 생각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했지. 그런데...
여덟 번째 고비. 일 년 만에 연구소 일을 그만두고 사택에서 나와야만 했어. 삶은 늘 예기치 않은 사건의 연속이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다 보면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갈지 고민 갈등하게 되고, 어느 하나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더라고. 사택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에서 또다시 어디로 갈거나, 길은 보이지 않았지. 연구소 프로그램에 오셨던 수녀님께서 사정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성당 근처 집을 알아봐 주셨어. 작은딸이 영성체 교리를 받던 즈음이었는데, 성당 가까이 와서 아이들과 지내면서 성당 봉사도 하라고 하시면서.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사택을 떠나오던 날, 나는 연구소에서 마지막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고, 그는 아이들과 함께 이삿짐을 싸서 용달차로 옮기고 냉장고, 세탁기, 침대와 책장 등 큰 짐들을 먼저 실어 보냈어. 그날 저녁에 그와 나는 다시 사택으로 가서 남아있는 작은 짐들은 차에 싣고 가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후드득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천둥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지더라. 쓰싹쓰싹쓰싹쓰싹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와이퍼 작동 소리, 이리저리 쓸려갔다 쓸려오는 빗물 방울들, 그동안의 설움과 슬픔들이 눈물 되어 흘러내리고 흘러넘치는 듯했어. 비참하고 서러운 이삿날인데도 그 빗소리는 마치 나를 위로하고 달래주는 노래 같았어.
어디로 가야 하나, 멀기만 한 세월,
단 하루를 살아도 마음 편하고 싶어.
그래도 난 분명하지 않는 갈 길에 몸을 기댔어 ~~
날마다 난 태어나는 거였고,
날마다 난 또 다른 꿈을 꾸었지.
내 어깨 위로 짊어진 삶이 너무 무거워,
지쳤다는 말조차 하기 힘들 때
다시 나의 창을 두드리는 그대가 있고,
어둠을 가를 빛과 같았어.
여기서가 끝이 아님을, 우린 기쁨처럼 알게 되고.
산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한 거지.
김종찬의 '산다는 것은' 이 노래 기억하니? 1993년에 나온 노래이니 벌써 30여 년 전이네. 김수현 작가의 주말 드라마 '산다는 것은' 주제가였지. 큰누나 역으로 나온 배우 원희경의 연기가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데,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4남매의 모습을 그린 인생 역경 드라마였잖아. 그즈음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우울 무기력한 청춘을 보내고 있을 때, 대학 동기들끼리 만나 술 마시고 2차, 3차로 go & go 하다가 노래방으로 가면 서로 마이크 쟁탈전이 벌어지고 그때 마이크를 잡으면 분위기 한껏 잡고 부르곤 했던 노래야.
아홉 번째 고비는 일자리를 찾아 삼만리, 수십 통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쓰던 때였어. 사업실패 후 집을 떠난 그는 한옥 목수로 새로운 시작을 했고, 전국 현장을 돌아다니며 일을 했지. 나는 연구소를 나와서 실업수당을 받으며 구직활동을 하던 중에 수십 통의 이력서를 쓰다가 아주 우연히 장애인복지관에서 심리치료사로 1년 동안 계약직 일을 하게 되었어. 나에겐 참으로 큰 행운이었지.
열 번째 고비. 치료사의 길을 선택하고 다시 공부 시작. 중도 포기했던 예술치료 대학원 공부를 상담교육전공으로 바꾸어서 편입학하여 석사를 졸업하게 되었어. 늦깎이 학생으로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해야만 했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거든. 석사논문을 마무리하고 7년 만에 졸업하기까지 기나긴 여정. 그 후 지금까지 심리치료사로 아동놀이치료와 청소년 상담을 하고 있네.
열한 번째 고비는 그와의 이혼 결심. 그가 1년간 제주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떨어져 지내는 동안 나는 독립을 선언했어. 아내 역할을 졸업하고, 며느리를 사직하고 이제 나의 인생을 살고 싶다고. 결혼 생활 20년을 정리하고, 오랫동안 묵혀놓고 있었던 부채도 정리하자고 했지. 그에게는 시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부채가 많았고, 나는 그에게서 떠안은 부채가 많았거든. 개인파산 신청하고 면책 선고를 받은 것은 20년 결혼을 졸업하면서 받은 졸업장과도 같아.
마지막 열두 번째 고비는 리나와 안나의 졸업이야. 중 3, 고 3을 마치고 둘이 나란히 학교 졸업을 하는데 엄마인 나도 같이 졸업을 하는 느낌이었어. 리나와 안나는 시골에 있는 기숙학교에 다녔잖아. 매주마다 기숙사로 태워주는 것이 운전이 힘든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거든. 진로 선택에서 깊은 고민과 방황이 있을 때, 엄마로서 묵묵히 바라보며 함께(be with) 하는 것도 가볍지만은 않더라.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들어주고 기도로 함께 할 뿐, 엄마로서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을 때, 빛을 향해 나아가는 씨앗의 분투는 성장해가는 고통이며, 때가 되면 기쁨의 열매를 맺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인내와 견딤이 필요한 시간이었지. 따뜻한 새봄에 씨앗이 싹을 틔우기를 기다리는 마음과도 같은.
결혼 20년, 열두 고비를 넘어서 새로이 맞이하는 2021년은 축복의 해란다. 새봄, 다시 시작. 큰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 성인으로 독립하여 자기 인생 설계를 하듯이, 나도 이제 스무 살 청춘 인양 새로운 인생설계를 해보려고 해. 지나온 시간 동안 아이들에게도 상처는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정서적으로 큰 흔들림 없이 자신의 생활들을 잘 해내고 있어서 엄마로서는 그저 고맙고 고마운 마음이란다.
아직도 가야 할 길(on the road less travelled), 딸과의 동행에서 작은딸 안나의 꿈을 이루어주고 싶은 마지막 소망이 남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