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다의 꿈, 언니의 장밋빛 꿈은 피어나지 못했다

by 이글라라


<명화 보고 글쓰기>

햇살 고운 봄날, 언니가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들녘에 서 있다. 왕관을 올린 것처럼 하얀 챙모자를 머리 위에 쓰고. 오른손에는 노란 양산을 들고 있지만 어깨에 걸치고 있을 뿐 햇빛을 가리려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수풀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다 걸음을 멈춘다. 내가 서 있는 쪽으로 얼굴을 돌린다. 내가 말했다.
"언니, 어디가? 그렇게 바삐 어디 가는데?"
언니가 입을 벌린다. 소리치는 듯, 무슨 말을 하고 있는 듯한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언니는 한숨 쉬며 울쌍짓는다. 일그러진 얼굴로 울부짖으며 다시 나를 향해 소리친다. 목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는 듯하다. 갑갑한 듯, 짜증 난 얼굴로 씩씩거리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려는 언니에게 내가 소리친다.
"언니, 어디가? 가지 마."
언니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고 말한다.
"000X XXX?" "0000 xxxx %%% !!"
뭔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는 외래어이다. 언니는 말하고 나는 알아듣지 못하고.
한참을 서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가 한 걸음 다가서면 언니는 오지 말라고 손사래 치면서 뒤로 물러선다. 마치 나는 따라갈 수 없는 곳이라는 말하려는 듯하다. 내가 다가가면 언니는 물러서고, 다가가면 물러서고를 하다가 언니와 내가 눈이 마주친 순간, 언니의 눈가에 고인 눈물이 내게로 젖어드는 것을 느끼며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언니가 떠난 지 23년. 꿈에서도 사진으로도 언니를 본 적이 없었다. 23년 만에 처음 꿈에 나타난 언니는 내게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나는 언니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꿈에서 본 언니는 제일 좋아하던 색깔, 빨간색 옷을 입고 있었다. 간절히 하고 싶었던 그 말이 무엇이었을까. 외래어로 내가 알아듣지 못한 그 말이 무엇이었을지를 곰곰 생각한다.

23년 전, 언니는 수의 대신 시집갈 때 가져간 분홍색 고운 한복 입고 저 세상으로 떠났다. 화장해서 한 줌의 재로 남은 언니의 흔적은 언니가 살던 동네 유원지 뒷산에서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나는 언니가 바람 속으로 떠나는 그 자리에 가지 못했다. 오빠에게서 그날 소나무 위에 앉아 있던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는 말만을 전해 들었을 뿐이다.




큰언니와 나는 띠동갑이다. 12살 차이 나는 언니와 내가 어린 시절 함께 한 기억은 별로 없다. 큰언니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 제주를 떠났다. 이모를 따라가서 서울 인근 공장에 취업했다고 했다. 공장에서 일하고 번 돈으로 동생들 뒷바라지하였으며, 설 명절이면 종합 선물세트를 사 가지고 집에 왔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이었을 때, 언니는 결혼했다. 내가 영어단어 외우며 공부하는 동안 언니는 두 아이를 낳고 살림을 하고 아이를 키웠다. 내가 야간 자율학습에다 보충수업으로 늦은 밤까지 교과서 참고서를 붙들고 입시 준비하는 동안 언니는 시집살이와 철부지 남편 뒷바라지에 이골이 나는 결혼생활을 하다가 이혼하였다. 남편은 택시운전을 하며 툭하면 사고 치고 바람피우고 문제를 일으키는 남자였다. 87년 내가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갔을 때 언니는 더 이상 남편을 믿지 못하겠다고 남편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두 아이를 키우며 홀로서기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옆집 이모에게 맡기고 주야간 2교대로 일을 하면서 한부모 여성가장의 삶을 살고 있었다. 다시 공장에 취업하여 여성노동자로 일하면서도 연륜이 쌓이고 직급도 반장이어서 공장생활은 수월하다했다.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던 시다의 언 손으로
장미 꿈 헛된 꿈을 싹둑 잘라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시린 가슴'을 언니는 겪고 있을 터였다. 나는 머리로만 깨우친 자본주의 노동의 현실이었으나 언니는 긴 공장의 밤을 몸으로 체험했을 것이다. 광장에서 민주주의 독재타도를 외치다 저녁이면 뒤풀이에서 찬 소주를 부으며 부르던 노래들,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은 새내기 대학생에게도 충격이고 슬픔이었다. '시다의 꿈' 노래는 마치 큰언니 이야기 같았다. 87년 서울로 와서 가까이에서 언니 생활을 보면서야 알았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삶을 살아내고 있는지를 그때서야 알 수 있었다.


내가 대학 4학년일 때 언니는 큰형부를 만나서 재혼했다. 형부는 자동차 관련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언니는 가정살림에다 공장 일을 거들며 경리 업무까지 많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공장을 키웠다. 97년 가을, 공장 안쪽 허름한 컨테이너 단칸방에서 지내다가 도심 아파트에 당첨되어 조만간에 새 아파트 입주한다며 기뻐하고 들떠 있을 때였다. 언니는 자동차 접촉사고 후유증으로 병원에 갔다가 큰병원으로 가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대학병원으로 갔다. 정밀검사 결과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언니를 위해 뭐라도 해야만 했다. 가족 중의 누군가 언니 병간호를 해야 했고 다른 가족들은 멀리 고향에 있으니 그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언니를 살리고 싶었다. 병간호를 잘해서 내가 해냈다는, 수고했다는, 잘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시다의 꿈, 장미꽃 꿈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파트 입주하여 새로 얻은 아들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한 언니의 꿈은 장밋빛 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언니와 나는 세 번의 수술과 항암, 방사선 치료, 대체의학 요법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암을 이겨내려 했지만 암세포가 온몸으로 전이되는 것을 막을 방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언니는 병실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하늘로 떠났다.

국민학교 교육밖에 받지 못한 언니는 영어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공장을 다니면서 야간학교를 졸업하여 중학교 학력을 얻었으나 영어 간판을 읽지 못할 때, 영어 설명서를 읽어야 할 때 좌절한다 했다. S대 영어과에 입학한 동생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지만, 암투병을 하며 하루하루 죽음으로 다가가는 언니 앞에서 S대 학력은 너무나 초라하고 부끄러웠다. 언니가 다시 깨어나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그토록 하고 싶어 하는 영어공부도 같이 하자고 했다. 영어도 배우고, 꿈꾸던 아파트에 입주하여, 늦둥이 아들과 행복한 가정생활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꿈꾸며 언니가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기도했다.

1997년 겨울, 119에 실려 병원에 입원한 언니는 따뜻한 봄 햇살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병실 창문으로 스며드는 봄 햇살에 엷은 미소 지으며 가만 바라볼 뿐이었다. 언니와 함께 관악산에 오르고 싶었다. 봄볕 맞으며 유원지 산책로를 걷고 싶었다. 영어 공부도 하고, 언니가 맛깔스럽게 담그는 깍두기며 열무 총각김치 담그는 법도 배우고 싶었다. 언니와 하고 싶은 것이 이렇게 많은데, 언니와 못해본 것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허망하게 언니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언니를 보내고 나는 고향에 내려갔다. 엄마는 자식을 먼저 앞세워 보낸 어미의 슬픔보다 언니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고 상처 받았을 막내딸을 염려했다. 나를 고향으로 불러 잠시 쉬어가라고, 엄마 곁에서 마음 돌보고 몸보신하고 가라고 했다. 엄마의 품에서, 고향 집 옥상에서 보이는 한라산 정기를 받으며 나는 서서히 몸과 마음을 회복하였다. 고향에 머무는 동안 운전면허시험에 합격하였고, 자가운전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어른으로 스스로를 책임지는 삶은 여전히 버겁고 무거웠다.

언니가 떠나고 난 후 형부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아내를 잃고 아파트에 입주하였으나 아내 없는 아파트를 지키지 못하고 어린 아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다고 했다. 형부는 착하고 마음이 여린 순박한 아저씨였다. 아마도 언니가 없는 처가에 드나들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엄마 없이 홀로 아들을 키워내는 한부모 아빠의 삶이 어떠했을지, 얼마나 힘들고 고단한 삶이었지 생각만으로도 가슴은 저려온다.

자식들을 두고 떠나는 길 아이들 걱정에 편히 눈도 못 감겠다는 언니에게 나는 이모 삼촌들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 말했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였다. 그러나 나는 언니에게 한 말을 지키지 못했다. 이제 언니의 어린 아들, 늦둥이 막내 조카는 언니가 떠난 그때 그 시절의 나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다. 어느 하늘에서 어떤 청춘의 삶을 살아내고 있을까.



언니가 가고 없는 날, 홀로 관악산 바위에 앉아 봄햇살을 맞이하던 5월, 하늘이 나를 울린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았다. 청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양 볼에는 눈물이 봄비처럼 쏟아졌다. 이제 언니는 없다. 봄 햇살 아래에서 한 번도 언니와 함께 이 길을 걸어본 적이 없었다. 한없이 미안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5월이면 홀로 이 노래를 부르며 산길을 걷는다. 언니와는 함께 걸어보지 못한 길을 나 홀로 걷는다.

저 청한 하늘 저 흰 구름 왜 나를 울리나
밤새워 물어뜯어도 닿지 않는 아득한 살의 그리움
왜 날 울리나 눈부신 햇살, 새하얀 저 구름
죽어 너 되는 날의 아득한 아아 묶인 이 가슴




나는 심리치료사다. 상담 현장에서 심리정서지원 서비스 대상자로 조손 가정, 이혼 가정,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얼마 전 센터장은 지원 상담이 수익은 얼마 되지 않으면서 에너지 소모는 많고 언제까지 이걸 붙들고 있어야 할까 고민이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상담 요청이 많아지고 일반 아동 상담과 지원 아동 상담이 겹치면 어느 한쪽은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한부모 가정 지원 상담을 외면하지 못한다. 없는 시간 쪼개서라도 지원 상담을 해야 하는 것이 숙명 같은, 나의 소명 인지도 모르겠다. 그날 센터장은 어려운 상담을 맡아주는 것에 대해 고마워하면서 내게 물었다. "선생님에게는 그것이 어떤 의미일까? 왜 놓지 못하는 걸까?"

한부모 가정 아이들을 상담하고 정서적으로 돌보는 일이 어쩜 내게는 언니와의 약속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조카를 돌보는 심정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것인지도.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마태복음 말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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