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증의 역사

종종 허벅지가 저리고 아팠다.

by 이글라라

국민학교 4학년. 어느 날부터인가 다리가 저리고 아파왔다. 종아리가 아리고 아프더니 허벅지가 얼얼하면서 저리고, 나는 누워서 다리를 구르며 다리 아프다고 울었다. 엄마는 내 다리를 주무르고 쓰다듬다가 주먹으로 톡톡 안마하듯이 때리면서 맘만 애달파하셨다. 왜 그런지 모른 채 속이 타는 마음으로 답답해하면서.


지난 40여 년, 일상의 많은 시간을 나는 허벅지 통증과 함께 했다. 통증이 시작되면 근육 마비가 오듯이 다리가 딱딱하게 굳어지면서 움직일 수 없었다. 안개 자욱한 숲 속의 눅눅함처럼 불쾌하고 아득한 통증이었다.



아픈 나에게만 엄마는 보름달 빵을 사주셨다.


시도 때도 없이 아팠다. 코피를 쏟고, 머리 아프다고 징징거린 날도 많았다. 생리 때면 배가 아파서 배를 움켜쥐고 울기도 했다. 밖에 나가기 싫어서 아프고, 학교 가기 싫어서 아프고, 화가 나도 아프고, 슬퍼도 아프고, 억울해도 아프고. 속상한 일이 있는데 말은 못 하고 몸속 깊은 곳에 숨겨 두었다가 밤이 되면 통증으로 되살아나는 듯했다. 혼자서 가슴 끙끙 앓다가, 잠결에 허벅지 다리를 탁탁 바닥으로 치면서 몸부림쳤다. 주먹으로 허벅지 다리를 세게 내리치고, 이불을 걷워차고 뒹굴면서 서럽게 울었다. 우는 소리에 잠이 깬 엄마는 옆에서 밤을 새워 다리를 주무르고 도닥여주었다. 내 주먹 대신 당신 주먹으로, 허벅지를 톡톡 내리치며 어린 딸이 곤히 잠들기를 기도했다.

아픈 나에게 엄마는 보름달 빵을 사주셨다. 언니 오빠 몰래 나에게만. 6남매를 키우며 어려운 살림 형편에 자식 모두에게 맛있는 것을 사줄 수는 없었겠지. 둘째언니에게 나만 데리고 나가서 삼겹살을 사주라고 하신 적도 있다. 나만 수육 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제주에서 잔치 때마다 나오는 돼지고기 수육을 나는 먹지 않았다. 고기를 먹지 않아서 아픈가 하고 엄마는 나에게 고기를 먹이려고 애쓰셨다. 당시 제주에 삼겹살 구이 가게들이 처음 생기면서 불판에 고기를 구워 쌈 싸서 먹는 것은 새로운 별미였다. 가족 모두가 식당 가서 삼겹살을 맘껏 구워 먹을 수 있는 형편은 되지 않았고, 엄마는 다른 가족들 몰래 나에게만 고기를 사주었다. 귀하다는 영양탕을 먹이려고 식구들 보이지 않는 찬장에 감춰둔 적도 있었다. 나만 먹으라고 눈에 띄지 않게 숨겨둔 것을 나는 엄마 몰래 오빠에게 줘버렸다. 나는 먹기 싫었다.


돌아보니, 엄마에게 나도 아픈 손가락이었나. 아픈 나를 애달파하시며 나만을 편애하셨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갈구했던 사랑이 아니었다. 사랑 같아 보이는 사랑일 뿐. 엄마의 그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사랑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언니 오빠에게, 엄마찍시 아들 남동생에게 밀려 차별받는다고 느꼈다. 엄마는 내가 필요로 하는 순간에 곁에 없었고, 내가 원하는 위로와 돌봄을 주지 않았다.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 아무도 없었다. 이해받지 못한 어린 나는 슬프고 서러웠다. 낮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세상을 견디어 내다가도 밤이 되면 허벅지 통증으로 온몸이 무너져 내렸다.



엄마가 곁에 없어도 허벅지 통증은 계속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되었을 때 엄마는 '서울 가서, 집 떠나서 엄마 없이 지낼 수 있을까, 서울서 혼자서 아프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겠냐'라고 걱정했다. 둘째언니는 옆에서 "겨티 누구 어시믄 안 아플지도 모릅니다게(곁에 누가 없으면 안아플지도 모릅니다.) 내부써, 알앙하게(냅두세요. 알아서 하도록.)"라고 마치 내가 아픈 것이 꾀병 인양 말했다. 엄마가 옆에 있어서 그렇게 투정 부리고 아픈 거라고, 아픈 거 봐줄 사람이 없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후 서울로 대학을 가고, 엄마가 곁에 없어도 나는 자주 아팠다. 결혼 후에도, 아이 둘을 낳고 엄마가 된 후에도 통증은 계속되었다.


통증의 원인을 알고 싶었다. 어려서 동네에서 용하다는 신방을 찾아갔을 때는 선반내에서 슬리퍼를 잃어버렸을 때 놀라서 그런 거라며 넋들이를 해야 한다고 했다. 까만 밤에 선반내 다리 위에서 보살이라는 할머니의 품에 안겨서 넋들이를 했다. 조상을 잘 모시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여 바닷가에 가서 굿을 하기도 하고. 아빠는 돌아다니지 않고 방안에만 있으니 그렇다며 나를 방 밖으로 내쫓으려 했고, 오일장에 가서는 좋다고 하는 온갖 약초를 다 구해다가 먹였다. 큰 병원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만성 염증이라고 했으며, 침 잘 놓는다는 스님을 찾아갔을 때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무서운 약침을 놓아 어린 내가 겁에 질려 도망치게 했다.

놀이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을 보며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할 때가 있다. 아침에 학교에 갈 시간이 되면 머리가 아프다고, 피곤하다고, 힘들다고 징징거리며 학교에 가기 싫다고 몸으로 호소하는 아이들, 아침마다 아이와 학교 보내기 위한 전쟁 같은 신경전을 치르는 엄마들. 아이가 아프면, 엄마도 아프다. 내 엄마도 그러했겠지.

꿈 분석 상담을 하면서 알았다. 심리적 소아마비. 어려서부터 나는 심리적 소아마비를 앓고 있었던 것이다. 심리 공부를 하고 신체화 장애(somatic disorder)에 대해 알게 되고 신체화 증상으로 허벅지 통증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통증을 없애기 위한 고군분투의 세월은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까지 눈물겨웠다. 결혼 후 20년 동안 남편은 내가 아플 때마다 밤잠을 설치며 나의 허벅지 다리를 두드리고, 가끔 아이들도 엄마 다리를 주무르며 내 옆을 지켰다. 얼마 전 작은딸은 어린 시절 기억을 회상하다가 말했다.

"어릴 적 내 기억에 엄마는 많이 아펐어. 아픈 기억이 제일 많아. 지금은 아프지 않아서 너무 좋아. 난 엄마가 아픈 거 싫거든. 내가 아픈 것보다 엄마가 아픈 건 더 싫어. 엄마 아프지 마. 지금은 안 아파서 넘 좋아."

어린 딸에게 과거의 나는 아픈 엄마였다. 딸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지금은 딸에게 고맙다. 아픈 엄마를 잘 지켜주어서. 가족들이 곁에 있어서 계속 아플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통증과 함께 걷고 또 걸었다.


서울로 대학을 가고 혼자 통증을 견뎌야 했던 시절, 우울의 골방에서 홀로 방바닥을 뒹굴다가 밖으로 뛰쳐나가 동네를 배회하며 골목길을 걸어 다녔다. 졸업 후에는 산악회에서 전국의 산들을 돌아다녔다. 능선길 종주를 좋아했고, 내리막길을 내려올 때는 다람쥐처럼 조르르 뛰어다녔다. 길 따라 걸어가면서 하늘 보고 땅 보고 바람 맞고, 가다가 힘들면 나무 그늘 아래서 쉬어가고. 산행을 하는 동안에는 통증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 아득한 안갯속 미로 같은 느낌의 허벅지 통증과는 달리 산행 후에 찾아오는 종아리 근육통은 차라리 통쾌하고 개운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서는 가족과 함께 하는 산책을 좋아했다. 염치읍 석두리 마을길, 아산 신정호수, 공주 금강변 신관공원, 유구천변을 걷고 또 걸었다.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빙빙 돌고, 나는 그와 함께 아이들 주변을 걷고 또 걷고. 지금은 아침에 눈을 뜨면 아름도담 산책길을 걷는다.


어느 해 겨울, 신뢰 서클 안에서 내면의 교사를 만났다. 명료화 모임에서 한 분이 내게 질문했다. "통증의 내면 교사는 (당신에게) 뭐라 말하나요?" 어, 이게 무슨 말이지?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통증도 말을 하나요? 통증에게도 내면의 교사가 있나요?" 그때 깨달았다. 통증은 계속 내게 말 걸기를 하고 있는데 내가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음을. 그날 이후 통증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가끔씩 우울 무기력의 손님은 나를 골방으로 데려갔고, 그때마다 통증이 같이 찾아왔다. 통증에게 물었다. '지금 왜 울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움직이는지, 무얼 원하는지, 내가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지'를 묻고 귀 기울였다. 통증은 내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신호를 알아차리면서 이제 더 이상 우울의 골방에 움츠려 있지 않는다. 골방에서 밖으로, 햇살 가득 고운 하늘 아래로, 세상 밖으로 나를 내보낸다. 우울의 손님을 경청과 환대로 맞이하여 충분히 대화하고, 상실에 대해 애도하고. 눈물이 마를 때까지 얼르고 달래면서 통증 떠나보내기를 한다.



통증과 작별하고 새로운 일상을 맞이했다.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다. 마지막 통증이 찾아왔던 내 나이 오십, 그 해 겨울. 여름 출근길 교통사고로 2주 동안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퇴원 후에도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물리치료하고 침 맞고 추나요법을 하면서 가을 지나 겨울까지 통증은 오래 계속되었다. 심리적 문제 해결만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치료와 처방이 필요했다. 한의사는 퇴행성 허리디스크, 대퇴부이상지각신경통, 말초신경병증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통증은 단지 심리적 소아마비로 인한 것만이 아니었다. 정서적 돌봄과 함께 신체 돌봄도 필요했다.

아무리 치료해도 사라지지 않는 통증. 3개월의 치료를 지속하다가 한의사는 이대로는 안된다며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생활패턴을 바꾸지 않고서는, 일을 줄이지 않고서는 치료 효과도 없을 거라고 경고했다. 몸을 쉬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예전의 일상을 바꾸어야만 했다. 출퇴근의 물리적 거리를 줄이기 위해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하고 운전을 멈추었다. 운전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것이다. 몸이 운전대에 앉아 있을 수 없을 만큼 지칠 대로 지치고 망가지고 나서야,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이 되어서야 운전을 멈추고 오래 묵은 생활패턴을 바꾸었다. 아침에 일어나 느린 산책, 가능한 앉아있는 시간 줄이기, 두 시간 상담 후에는 반드시 쉬는 시간을 갖는 것으로 시간표 조정, 저녁에는 요가와 따뜻한 물 목욕, 자가용 운전 대신 대중교통, 걷기, 자전거 타기 등으로 새로운 일상을 시작했다.

그동안에 불규칙적으로 생리주기가 오락가락하면서 멈췄다 다시 하기를 여러 번. 갱년기 우울과 감정 변화, 갱년기 신체증상을 다 겪고 나서 드디어 완경에 이르렀다. 허벅지 통증과 함께 했던 40여 년의 일상과 작별하고 새로운 일상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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