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90년대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68년생이다. 87년 3월 대학에 입학했고, 91년 2월 대학을 졸업했으며, 그해 겨울 아빠의 부음을 들었다. 또 다른 이별과 아픔들이 있었고, 99년 겨울에 결혼하여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돌아보면 90년대를, 20대를, 어떻게 통과해 왔는지, 언 땅 속에 묻어둔 김칫독처럼 마음 저 깊숙한 곳에 감춰둔 그때 그 시절은 아직도 시리고 아득하기만 하다. 윤대녕의 소설 <시계입구가게앞검문소>에서 해옥의 죽음이 두고두고 인생의 일부를 장례식으로 만들어놓을 거라는 연우의 예감처럼, "어이없는 이별이나 무참한 죽음도 있고, 그래서 뒤에 남겨진 사람의 삶의 일부가 장례식이 되기도 하는 그런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고 한 그녀의 말처럼, 나의 90년대도 그러했다.
나는 1987년 S 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이 결성되었으며, 교원임용에 대한 종합대책안(이하 종대안)이 발표되었다. 나의 90년대는 선배들의 전교조 운동과 예비교사들의 종대안반대 투쟁과 함께 시작되었다. 선배교사들은 해직되었고, 임용고사 1세대인 87학번 예비교사들은 임용고사를 거부하였다. 종대안 반대를 외치며 강의실 밖 광장에서 대학 4학년 1년의 시간을 다 보내고, 대학을 졸업하였으나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민중가요를 부르며 스크럼을 짜고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서 참교육, 종대안 반대를 외치던 87학번 동기들은 졸업 후에 각자의 골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법(法). 아빠는 물(水) 흐르는 대로 걸어가는(去) 것이 법이라고 했다. 법을 따라야 한다고, 법대로 순리대로 따라서 사는 것이 삶이라고. 임용고사를 합법화하는 교원임용에 관한 종합대책안이 통과되고 아빠는 법을 따르라고 권유했다. 나는 아빠의 권유를 듣지 않았다. 동기들과 함께 시험을 거부했다. 졸업이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졸업은 했으나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으므로. 아무도 없는 황량한 광야에 홀로 거센 비바람을 맞고 서 있는 나무처럼 외롭고 쓸쓸했다.
골방에 고립된 채, 우울을 베개 삼아 무기력을 덮고서 방바닥을 뒹굴며 시험공부를 하던 중에 아빠의 부음을 들었다. 한밤중 비몽사몽 흐린 정신을 깨우는 전화벨 소리, 그 뒤에 이어진 작은 아버지의 한 마디. "아버지 돌아가셨져."
내게 말 한마디 남기지 않으시고 아빠는 저 하늘로 떠났다. 물 흐르는 대로, 법대로 순리대로 사는 것이 삶이라는 말씀만이 기억에 남아있다. 첫눈 내리던 날에 아빠를 보내고 이후 고향에 가지 않았다. 아빠의 부재를 확인해야 하는 고향에 가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로 남기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다음 해에는 아빠의 말처럼 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무력한 청춘에게는 물 흐르는 대로 걸어가는 법을 거스를 아무 힘이 없었다. 임용고사를 볼 수밖에 달리 대안도 대책도 없었다.
1차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면접고사 대기실에서 기다리며 떨리고 가슴 졸이던 기억, 면접장에서 루소의 에밀인지, 에밀의 루소인지 헷갈려하며 더듬거리다가 대답을 놓친 기억, 대기번호가 끝번호여서 종일 대기실에서 기다렸다가 들어간 면접장에서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받고 화가 났다던 친구 K와 주고받은 대화 등 여러 기억들이 남아있지만 회상하고 싶지 않다. 친구 K와 나는 시험에 낙방했다. 교사자격이 있지만 교원으로 임용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친구 K는 일찌감치 교직을 포기하고 학원에 취업, 학원강사의 길로 갔고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어디로 가야 하나, 멀기만 한 세월, 단 하루를 살아도 마음 편하고 싶어' 노래를 읊조리며 신림동 봉천동 골목길을 오가고 늦은 밤 동네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며 배회하던 날들이 많았다. 고뇌에 찬 청춘의 술잔을 기울이며 함께 노래 부르고 그네를 밀어주던 고향 동기들이 있어 그나마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학교 실험실을 출퇴근하며 신림동에 남아있던 J, 공대를 졸업하고서 진로를 바꿔 사법고시 준비를 하고 있던 Y, 자연대를 졸업하고서는 전공과 전혀 다른 길로 인문대 연극반에서 활동하다가 연극을 하겠다고 대학로를 기웃거리던 W. 졸업 후에도 학교 근처를 떠나지 않고 그 언저리에 남아있던 동기들과 술이 고플 땐 함께 술을 마시고, 그네 타고 싶을 때는 근처 초등학교 담을 넘고 들어가 운동장에서 그네를 타며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지금이라면 주민들 민원에다 항의가 빗발칠지도 모르건만, 그때는 그렇게 고성방가에 술주정을 하며 돌아다녀도 별 탈이 없었다. 그때 그 시절은 그랬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집에는 우환질고가 많았다. 엄마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으로 고통을 호소하셨다. 엄마를 모시고 서울 큰 병원에 왔던 오빠는 명문대 나온 동생 덕을 좀 볼 수 있으려나 기대했건만, 아무 능력도 없는 철부지 동생을 보고 실망했다. 힘도, 빽도, 돈도, 하물며 의료보험조차도 없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근근이 생활을 연명해가는 무기력한 청춘일 뿐이었다. "S대꺼정 보내노난 고작 이거냐? 쯔쯔쯔" 혀를 차던 오빠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마음속으로는 "(오빠가) 보내준 거꽝? 나가 알아서 해수다"라고 항변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는 아무 소리 내지 않았다. 고개 숙인 채 묵묵히 그 모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남동생이 서울로 대학 입학하면서 동생과 나는 봉천동 고갯길 허름한 판잣집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이후 서너 번의 이사를 하면서 신림동 신축건물 2층 독채로 옮기기까지 궁핍함은 계속되었다. 개인과외며 학원강사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다가 선배의 권유로 출판사에 취업하여 안정적인 직장 생활이 시작될 무렵, 작은언니의 암 선고. 맹장염인 줄 알고 병원에 갔던 언니는 대장암 진단을 받고 서울 큰병원에 입원했다. 수술하고 회복하여 고향으로 내려가며 언니는 하염없이 울었다. 언니가 돼서 동생에게 해준 것도 없으면서 받기만 한다고 미안해했다. 동생인 나는 받기만 하고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는 듯한데, 언니는 반대로 자기가 받기만 하고 준 게 하나도 없다고 했다.
96년 겨울, 직장에서 이대로 서른을 맞이하기는 싫었다. 무언가 내 청춘의 희망을 찾아야 할 것 같은 절박함으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직장을 나왔다. 출퇴근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누리며 프리랜서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다행히 주말에 밤새워 일을 해서 나 혼자 생계를 책임지고 유지할 수는 있었다. 주중에는 전국을 떠돌며, 백두대간 종주산행을 하면서 서울 탈출을 꿈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과 전국일주를 마치고 돌아온 날이었다. 큰언니의 암 진단 소식을 들었다. 무언가 해야만 했다. 가족들은 모두 고향 제주에 있고, 큰언니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가 언니 병간호를 해야 했다. 그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내가 해야 했다. 작은언니는 수술하고 회복한 반면, 큰언니는 세 번의 수술과 항암 치료에도 불구하고 회복하지 못했다. 큰언니를 살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98년 봄볕 따뜻한 날에 큰언니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 해 99년 2월 그를 만났다. 그해를 넘기지 말아야 한다는 엄마의 간절한 염원으로 그와 나는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11월에 결혼하였다. 90년대를 한 달 남겨놓은 미완의 끝자락에서 그래도 이것만은 잃고 싶지 않은 미련처럼 그와 나는 가족이라는 가부장제도 안으로 들어갔다.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벗어나고 싶었던 가족인데. 내가 스스로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다니.
분명한 것은 이제, 다 지나가버렸다는 사실이다. 종우도, 주희도, 내 친구들도, 나도, 더 이상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어른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에게 90년대는 무엇이었을까. 선뜻 대답하기는 어렵다. 특권 없는 청춘, 신화 없는 신화, 모르겠다. 내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 모순의 연대기를 가슴 한편에 묻고서 다시 이 무감한 생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 그저 그것뿐이다. - 정이현 산문 외로운 너를 위해 쓴다 <작별>에서
그렇다. 이제, 다 지나가버렸다. 더 이상 자기 선택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어른이 되고 말았다. 그 무엇을 탓할 수도,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신기한 것은 그래도 삶은 계속되더라는 것이다.
내게는 도저히 버릴 수 없는 물건이 하나 있다. 열 번 넘게 이사 다니면서 책장의 책들과 옷장의 옷들이 다 바뀌어 가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서랍 한쪽을 차지하고 버티고 있는 검은색 낡은 가방. 그 안에는 오래된 Nikon FM2와 F-601 수동 카메라가 들어있다. 카메라는 96년 여름 종로 세운 상가에서 구입한 것으로 당시 한 달 급여의 절반이 넘는 고가의 물건이었다. 지금은 사용조차 하지 않는 골동품이 되어버렸지만. 그를 처음 만나던 날에도 나는 이 가방을 메고 부산역에 내렸다. 외롭고 쓸쓸했던 서울 살이, 90년대의 터널을 지나며 카메라는 말없이 어디든지 나와 동행해 주는 벗이었다. 열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며 흑백 필름 사진을 찍던 시절, 렌즈로 가까이 들여다본 침묵의 무늬들은 고요하게 아름다웠다. 그때가 그립다. 그와 함께 갔었던 주문진 바닷가, 멸치잡이 뱃사람들의 땀방울과 어기영차 그물을 끌어올리는 힘찬 소리가 담긴 흑백 사진들을 나는 아직 버리지 못했다. 무엇을 남기고 싶었던 걸까.
나의 90년대는 지나갔고, 기억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