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물 복용과 연줄

박찬호와 홈런

by 따뜻한 만년필
단일 시즌 최다 홈런

1927년 베이브 루스(뉴욕 양키스) 60 홈런

1961년 로저 매리스(뉴욕 양키스) 61 홈런

1998년 마크 맥과이어(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70 홈런

2001년 배리 본즈(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73 홈런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한 획씩을 그었던 단일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들이다.

로저 매리스(Roger Maris)베이브 루스(Babe Ruth)의 기록을 깨는데 34년,

마크 맥과이어(Mark McGwire)가 로저 매리스의 기록을 넘는데 27년이 걸렸다.

1998년의 마크 맥과이어(좌)와 새미 소사(우) (이미지 출처 : ESPN)

특히 98년 마크 맥과이어가 로저 매리스의 기록을 넘어설 때는 맥과이어 혼자가 아니었다.

완벽한 페이스 메이커 새미 소사(Sammy Sosa)까지 있었다. 맥과이어와 드라마 같은 홈런 레이스를 시즌 내내 펼친, 소사는 66호까지 날린다.


두 사람의 경이로운 홈런 경쟁은, 94년 선수노조 파업에 의한 단축시즌으로 주춤했던, 메이저리그의 인기를 단숨에 견인하는 역할을 했다.

배리 본즈(Barry Bonds)는, 불과 3년 뒤에, 한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73개로 늘린다.


하지만 이들 3명—맥과이어, 소사, 본즈—의 홈런 기록은, 이제 그다지 가치가 없다.

야구팬들에게 진정한 홈런 기록은 로저 매리스(Roger Maris)까지 만이다.


명예의 전당

전 세계 곳곳에서, 야구로 미래를 꿈꾸는 이들 중에는, 메이저리그 진출이 목표인 선수들이 무수히 많을 것이다.

바늘구멍과도 같은 그 관문을 통과하여 메이저리거가 된 선수들은 또 각자의 다음 목표가 있을 것이다. 더 나은 성적, 더 높은 연봉, 올스타 선정, 소속팀의 우승, 시즌 후 각종 시상(신인왕, 사이영, MVP, 골드 글러브, 실버 슬러거 등) 등이고, 그런 목표들의 종착지는 대개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에 입성하는 것이다. 물론 매우 매우 어려운 일이다.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일단 슈퍼스타급의 기록을 달성해야 하고, 그것을 꾸준히 오랜 기간 유지해야 한다—대개 투수는 300승, 타자는 3,000안타 또는 500 홈런이 기본 옵션 정도 된다—팬들에게서 인기도 높아야 한다. 현역 시절에 이미 자타공인 살아있는 전설의 반열에 올라야만, 그나마 가능성을 점이라도 쳐 볼 수 있다.


위에 언급된 맥과이어, 소사, 본즈는 성적만 놓고 보면 벌써 명예의 전당에 들어갔어야 할 이름들이지만, 근처도 못 가고 있다. 이들의 기록은 모두 약물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선수들은 이들 외에도 많다.


선수 시절 엄청난 기록을 쌓으면서, 현역시절부터 은퇴 후 '명예의 전당' 행을 이미 예약해 둔 듯했던 선수들의 이름에, 갑자기 불명예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명예의 전당 관문은 당분간이 아니라, 영원히 못 넘을듯하다.


대표적으로,

라파엘 팔메이로(Rafael Palmeiro .288 타율, 3,020 안타, 569 홈런),

알렉스 로드리게스(Alex Rodriguez .295 타율, 3,115 안타, 696 홈런) 등

엄청난 기록을 쌓은 이들이 ‘명예의 전당’의 근처에도 못 가고 있다. 그들이 이미 가져가 버린 부를 다시 빼앗아 올 수는 없지만, 그들의 명예는 조금이나마 빼앗은 팬들의 응징인 셈이다.


약물과 박찬호

이 문제와 관련한 최대의 희생자 중 한 명이 박찬호 선수라고 나는 생각한다. '코리안 메이저리거' 하면 지금은 류현진이지만, 그전엔 박찬호였다. 박찬호에게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최고라는 수식어도 붙었다. 이런 그를 고개 숙이게 하는 몇 장면이 있다.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의미 있는 홈런' 자료화면에 유독 그가 자주 등장한다.


박찬호 선수는 2001년 올스타 전에 출전했는데, 은퇴를 앞두고 자신의 마지막 올스타전에 출전했던 ‘2,632경기 연속 출장 대기록의 철인’ 칼 립켄 주니어(Cal Ripken, Jr)에게 홈런을 허용한다. 이것은 박찬호 선수에게도 기념일 수도 있고, 이제는 어쩌면 추억일 수도 있다.


하지만, 20년도 더 흘렀음에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등장하는—오직 한 사건 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된 '한만두'라는—용어 앞에서 박찬호 선수는 요즘도 머쓱해하고 부끄러워한다.


1999년 페르난도 타티스(Fernando Tatis)라는 평범했던 선수에게 메이저리그에서도 유일무이의 기록인 ‘한만두(한 이닝 만루홈런 두 개)’를 당했다. 2001년 배리 본즈가 마크 맥과이어를 넘어섰던 바로 그 경기에서, 박찬호는 그에게 71호, 72호의 홈런을 허용했다.


그런데 이 홈런을 날린 이들이 모두 금지약물을 사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금지약물 사용자들

투수 중에도 있다. 로저 클레멘스(Roger Clemens), 에릭 가니에(Eric Gagne)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름들이다.


사이영상 최다 수상자 로저 클레멘스의 7개 사이영상 중에 적어도 4개는 다른 사람에게 갔어야 했다.


박찬호의 초기 LA 시절, 같은 팀의 그저 그런 신인 투수였던, 에릭 가니에가 어느 순간부터 무시무시한 강속구를 뿌리는 특급 마무리가 되었고, 특히 2003년에는 단 하나의 블론세이브 없이 55세이브를 달성한다. 그해 사이영상까지 그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이 모든 것이 금지약물 덕분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2003년 그해의 사이영상은 제이슨 슈미트(Jason Schimit, 17승 5패, 208 삼진, 2.34 ERA, 207.2이닝, 5 완투, 3 완봉)에게 갔어야 했다.


약물을 복용했지만, 들키지 않은, 이들도 부지기수로 많았을 것이다. 그즈음에는, 갑작스럽게 몸집이 커진 이들도 많았고, 마흔 살을 훌쩍 넘겨서도 전혀 기량이 시들지 않는 이들이 많아서, 선수 수명이 엄청 길어졌었다. 은퇴하는 시기도 대체로 늦춰졌었다.

자신의 7번째 사이영상을 든 로저 클레멘스 (이미지 출처 : ESPN)

로저 클레멘스의 별명은 그의 이름 초성과 강속구에서 유래한 ‘로켓(Rocket)’이기도 하고, 엘튼 존(Elton John)의 노래 제목에서 따온, '로켓맨(Rocketman)'이기도 했다. 빠른 강속구와 다수의 탈삼진으로 유명했는데,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지금까지 딱 5번뿐인, 한 경기 20개의 탈삼진 기록에, 두 번이 로저 클레멘스다. 약물 덕분인지, 22살에 메이저리그에 진입해서는 45살까지 선수생활도 정말 오래 했다. 우리에겐 강속구 하면 박찬호이고, 그가 청춘을 다 바쳐 올린 승수가 124승인데, 클레멘스는 무려 354승이다. 클레멘스의 통산 탈삼진(4,672개) 앞에서 박찬호의 통산 탈삼진(1,715개)은 초라하기만 하다.


재평가

이런 평가들은 좀 달라져야 한다.

그런 약쟁이들에게 맞은 홈런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무시무시한 악당들에 맞서, 피하지 않고 언제나 당당했던, 영웅의 투지는 아름다운 것이다. 박찬호 선수는 단 하나의 사이영도 없지만 그의 기록은 정직하다. 그때는 몰랐었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박찬호 선수는 약물을 삼킨 헐크들이 득실득실했던 시대를 헤치며 지나왔던 것이다. 그의 피홈런 중 상당수는 플라이 아웃이 되었어야 했고, 총알 같은 속도로 내야를 빠져나갔던 피안타 중 상당수는 땅볼 아웃이 되었어야 했다. 평균자책점은 더 낮았어야 했고, 승수는 올라가고 패전수는 줄어들어야 했다.

그 시절을 지나온 많은 정직한 선수들이, 어떤 불이익을 얼마나 당했을지는, 알아낼 길이 없다. 승리를 날렸을 수 있고, 홈런을 맞았을 수 있고, 삼진을 당했을 수 있고, 계약을 못했을 수 있고, 연봉이 삭감됐을 수 있고, 다른 팀으로 이적됐을 수도 있고, 팀에서 방출됐을 수도 있고, 더 일찍 은퇴했을 수도 있다.


비겁한 이들이 자신들의 천재적인 운동실력에, 약물의 힘을 더해 얻은 기록들은, 그들에게 더 큰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얼핏 생각하면 그들 개개인의 부와 명예가 약간 더 높고 낮아짐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것은 파렴치한 짓이다. 이들이 챙겨간 부와 명예가 사실은 더 노력했던 다른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료와 경쟁자, 상대팀을 짓밟고 올라선 것이다. 그 부와 명예가 원래는 다른 사람에게 갔어야 했다는 것이 진실이다.


밀워키 브루어스 소속, 라이언 브론(Ryan Braun)은 2011년 내셔널리그 MVP를 수상한 뒤, 곧바로 약물 복용이 적발된다. 그 MVP는 LA 다저스의 맷 켐프(Matt Kemp)에게 갔어야 했다.


2004년 휴스턴 에스트로스 소속, 로저 클레멘스의 7번째 사이영상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소속, 랜디 존슨(Randy Johnson)에게 갔어야 마땅했다.


그들의 반칙은 오직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었고, 이것은 결국 동료들과의 신뢰에, 해당 종목 종사자들에게, 그리고 팬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아무리 변명해 본들, 결국 그들의 행위는 파렴치한 반칙이었다. 스포츠에서 반칙이란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설명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어떤 354승보다는 어떤 124승이 더 위대하다.”

포효하는 박찬호 선수 (이미지 출처 : ohmynews )


일상의 반칙

이런 반칙이 그래도 특정 스포츠의 울타리 안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라면 그나마 다행일 테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반칙은 우리 사회 전반에 여전히 만연하다. 그것을 하는 소수, 그들의 편익에는 분명하게 도움이 되겠지만, 필연적으로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하게 된다. 조직 내의 다수를 허탈하게 하고 결국엔 조직을 병들게 한다.


진학을 반복하던 유년과 청소년 시절부터 혈연, 지연, 학연 이런 것이 우리 사회에서 문제라는 말을 몇 번쯤 들어는 보았지만, 학창 시절에는 그런 것들이 생활에서 나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실감하지는 못한다. 대학을 제외한, 그 어떤 진학에서도, 학교에 대한 선택권이 우리에게 주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면 우리가 선택한 것도 아닌, 그저 몇 년 전 또는 십몇 년 전, 고작 몇 년간 다녔던 학교명이 꽤나 나의 삶을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됨을, 우리는 뒤늦게 깨닫게 된다. 세상은 동화 같지 않으며, 순수한 사람들이 막연히 그럴 것이라 기대하는 만큼, 공정하지도 않다는 사실도 금방 깨달을 수 있다.


다른 조직에서 근무하는 지인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거의 모든 조직(공무원, 공기업, 학교 등)에 유사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어디에는 어느 고등학교가, 어디에는 어떤 대학교가 주류라는 식의 이야기이다. 과거에 비해 이런저런 이유로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으로 주거지를 옮기는 이들이 많아서인지, 예전에 비해 지연은 많이 희미해진 느낌이지만, 어떤 조직에서나 학연은 여전히 꽤나 뿌리 깊은 모양새다.


이것들이 미치는 효과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약물 복용과 같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동료애와 도덕성이 결여된, 누군가가 저지르는 반칙인 것이다."

사석에서 형님 동생 하는 사람들, 그 이익집단의 누군가가 조직에서 중역이 되고 대표가 되고, 때로 그들끼리 같은 부서 직속 상하관계로 자리하는 순간, 조직 내의 공정이란 연기처럼 사라지고는 없는 것이다.


이런 소수 이익집단은 힘이 커질수록 노골적으로 변해간다. 더 자주 스스로의 힘을 확인하려 하고, 그렇게 확인되는 자신들의 힘에 희열을 느낀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게 되고 타인의 평판도 신경 쓰지 않으며, 대담하게 스스로의 이익을 실현한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약물 복용으로 더 나은 기록과 높은 연봉을 모두 챙기고 은퇴하는 것처럼, 그들도 주요 보직과 높은 연봉을 챙기고 퇴직을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그 친구는 능력이 뛰어나!!"

그러나 이 말은 마치 배리 본즈가,

"약물 안 했어도, 어차피 나는 73개의 홈런을 쳤을 거야!"와 같은 말이다.


다른 시기, 같은 교문

삼성의 비자금을 고발했던,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검사 시절, 광주일고 혹은 고려대 출신이라며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우연히 같은 시기에, 혹은 다른 시기에 같은 교문을 드나들었다는 게 무엇이 그리 중요한 인연이냐”라고 되묻곤 했다.
그러나 이는 나중 일이다. 대학 시절에는 이런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
- 변호사 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 P.285에서 -


* 표지 이미지 : 박찬호 자서전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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