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xt best thing
초등학생 때부터 셀 수 없이 많은 야구경기를 보았다. 좀 더 자라서는 국내 프로야구뿐 아니라 메이저리그까지 섭렵했다. 내겐 이 모든 것이 TV 덕분이다.
인간사회의 모든 것이 전반적으로 그래 왔듯 야구중계도 눈부시게 발전해 왔다. 우리는 쉽게 잊고, 또 지금 가진 것에 너무나 익숙하여, 마치 오래전부터 현재의 수준을 계속 누려온 걸로 착각하곤 하지만, 가끔 접하는 지난 시절의 자료화면은 그것이 사실과 다름을 여실히 보여준다.
낡은 구식의 야구장들이 순차적으로 현대화되고 있다. 더불어 TV가 디지털화되었고, 화면은 점점 더 커지고, HD를 넘어 FHD, UHD니, 4K, 8K 하며 화질의 선명함은 눈부시다. 야구중계의 내용도 다채롭게 변했다. 요즘은 투수의 구속뿐 아니라, 투수가 던진 볼의 궤적, 구종, 회전수, 탄착지점, 타자의 배트 스피드, 타구 속도, 발사 각도, 홈런의 비거리, 비행 궤적 등도 세밀하게 때로는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선수들의 세세한 표정은 물론 땀방울 하나까지도 보인다.
그런데 이런 상세한 정보들은 TV를 보고 있는 우리가 야구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마치 다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TV 야구중계가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맹점이 있는데, 이는 카메라가 거의 공만 따라다니고, 공을 가진 사람만을 보여준다는데 있다. 그래서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도 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TV 야구중계는 열심히 보았지만 정작 야구장을 가볼 기회가 없어서, 처음으로 야구장에서 직접 관람한 것은 결혼을 한 후였다. 두산과 롯데의 야간경기였었고, 가을 즈음이라 약간 쌀쌀했었다. 평생 TV로만 보았던 야구장을 직접 간 그날, 그때 정말 뭉클했었던 기억이 또렷하다. 하나씩 올라서던 계단의 끝에서 그곳으로 들어서는 순간, 눈앞에 펼쳐지던 푸른 운동장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 이후로는 아주 가끔씩 야구장을 갔었는데, 갈 때마다 눈앞에 야구장을 맞이하는 그 느낌은 항상 설렘을 준다.
가끔 야구장 직접 가서 야구장 전체를 내려다보는 것은 좋은 경험이다. TV 중계에서 보지 못했던 조각을 볼 수가 있다. TV 화면에 잡히지 않는 선수들의 부산한 움직임이 그것이다. 수비 중에 공이 이동하는 매 순간 수비수들이 백업 플레이를 하고 있다. 아무리 오랜 기간 TV로 야구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야구를 하러 운동장에 나와서는 이것이 바로 되는 사람이 없다. 경기중에 자신이 백업을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백이면 백 멀뚱멀뚱 그냥 서있는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실행되도록 익히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린다. TV에서는 잘 보여주지 않고, 야구경기를 보면서도 그다지 주의 깊게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반복된 연습으로 완전하게 체화될 때까지 이런 증상은 꽤나 오래 지속된다. 수비를 할 때 공을 잡는 야수는 즉시 그 공을 누군가에서 던지게 되는데, 이때 항상 백업 플레이가 함께 진행되는 것이다. 백업 플레이는 다양한 상황에서 이뤄진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우익수(또는 좌익수)에게 뜬 공이든 땅볼이든 가면, 그 선수(우익수 또는 좌익수)가 공을 놓칠 것을 대비해 중견수가 그 뒤를 받친다.
중견수 방향으로 뜬 공이든 땅볼이든 가면 중견수가 놓칠 것을 대비해 더 가까운 곳의 외야수(상황에 따라 좌익수 또는 우익수)가 중견수의 뒤쪽으로 간다.
외야수가 홈으로 들어가는 주자를 잡기 위해 홈 송구를 하면 포수가 놓칠 것을 대비해 투수가 포수 뒤로 간다.
우익수나 중견수가 3루로 송구를 하면 3루수가 놓칠 것을 대비해 투수가 3루수 뒤로 간다.
2루로 도루하는 주자를 잡기 위해 포수가 2루로 공을 던질 때는 상황에 따라 유격수가 받을 때는 2루수, 2루수가 받을 때는 유격수가 2루 베이스 뒤로 가서 커버를 하고, 중견수도 이에 대비한다.
3루로 도루하는 주자를 잡기 위해 포수가 3루로 공을 던질 때는 3루수가 놓칠 것을 대비해 좌익수가 이에 대비한다.
이건 오랜 야구팬들조차도 정말 낯설어하는 장면인데, 타자가 평범한 내야 땅볼을 치고 1루로 달리고, 그 공이 유격수나 2루수에게로 가고 있다면 포수는 제자리에 있지 않는다. 1루수가 공을 놓칠 것을 대비해 주자와 거의 같은 속도로 1루 뒤편으로 뛰어간다.
재미없는 군대 이야기다. 군대 얘기는 가급적 하고 싶지 않지만, ‘준비’하면 누가 뭐래도 군대다. 산업현장에서 안전 수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거나, 안전불감증의 만연으로 인해 발생한 가슴 아픈 안전사고 소식을 우리는 자주 접한다. 지나고 보니 내가 있었던 부대에서는 이런 사고예방을 위한 안전교육에 꽤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었다. 우리 부대에서 과거에 있었던 사고 사례, 타부대에서 있었던 사건 등을 바탕으로 틈틈이 교육시키고 주의를 주었다.
(지금도 그러한지는 모르겠으나) 수송대에서는 민간사회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고임목을 사용한다. 주차를 할 때마다 항상 2중, 3중으로 안전장치를 했다. 모든 차량이 수동기어였는데, 주차를 할 때는 기어도 브레이크 역할을 하므로 반드시 기어를 넣는다. 그다음 주차 브레이크를 채운다. 그런 다음에도 한 가지를 더 해야 하는데, 차에서 내린 다음 바퀴에 고임목을 받치는 것이었다. 고임목을 했는지의 여부는 멀리서도 식별 가능하기 때문에 깜박 잊었다가는, 상급자들이나 간부들에게 금방 발각되어, 혼이 나고는 했다.
고임목의 활용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바퀴를 교환하기 위해, 자키를 이용해 차를 들어 올려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요즘엔 차에 이상이 있으면 바로 보험사에 긴급출동을 요청하니, 펑크 난 바퀴를 스페어타이어로 직접 교환해본 운전자는 거의 없을 것이지만, 예전엔 많이들 했었다.
부대 안 정비고에서 차량을 수리할 때는 자키로 차를 들어 올린 후, 반드시 ‘안전 자키’라는 이중의 안전장치를 사용하게 했다. 그런데 주행 중에 갑자기 발생한 고장으로 길에서 자키로 차를 들어 올렸을 때는 안전 자키가 없으니 — 안전 자키는 휴대용이 아니다 — 고임목을 포개어 차 밑에 받쳐서 자키를 보조하는 이중의 안전장치로 활용하게 했다. 그러면 혹시라도 정비하던 중에 차량이 자키에서 미끄러지거나, 자키가 고장을 일으켜 주저앉으려 할 때도 고임목이 차량을 떠받쳐주는 안전 자키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차량 밑의 작업자는 꼼짝없이 그대로 차에 깔리게 된다. 이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안전을 확보하는 소중한 삶의 지혜라는 생각이 든다.
야구에서 수비를 할 때는 항상 최선과 차선이 동시에 이뤄진다. 이를 위해 운동장 안의 모든 수비수들은 쉴 새 없이 기민하게 움직인다. 야구장에 가서 관람을 할 때나, TV로 야구 중계를 볼 때, 평소에 주의 깊게 보지 않던 프로선수들의 짜임새 있는 백업 플레이를 유심히 살펴보자. 공을 놓친 선수 뒤에는 항상 다른 선수가 있다. 모든 플레이에서 실패에 대한 대비책을 병행하는 체계적이고 정교한 움직임이 재미를 더해준다. 최선책이 성공적으로 실현되면 사실 불필요한 행위이고 오히려 낭비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최선을 향한 모든 플레이가 항상 기대한 대로 될리는 없고, 한 번만에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선수들은 항상 그다음의 최선을 같이 준비하는 것이다. 얼마나 차선책을 잘 준비하고 때맞춰 실행하느냐에 따라 최선책 실패에 따른 피해(실점)의 최소화가 가능하다.
이런 자세는 우리 삶에서도 아주 유용할 것이다. 일을 착수할 때나 진행 중일 때는, 달콤한 결과만이 우리를 기다리지는 않으니,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를 대비하는 습관이 도움이 된다. 사용하는 PC에 어떤 사고가 날 것을 대비해 외장하드나 클라우드를 활용하듯, 우리가 준비하는 일상생활 전반에서도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주저앉지 않기 위해 고임목을 받쳐두는 것이다.
회사 업무에서 사용기간이 만료되는 어떤 것을 대체할 새로운 것을 준비하면서, 그저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것만을 믿고 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되 다만 차선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백업이란 바로 그런 때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가끔씩 찾아오는 실패를 피할 수는 없겠지만, 폭망은 피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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