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를 병행하기 힘든 현실
괜찮은 직장을 갖는다는 것이, 언젠가부터 누구나 인정하는 매우 어려운 일이 되어있다. 외환위기가 한차례 태풍처럼 우리 사회 전반을 휩쓸고 지나간 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취업시장의 문이 넓어졌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고, 청년실업, 취업난으로 인한 근심은, 거의 모든 청년들에게는 물론, 그들의 가족, 친척, 친구들까지, 범위를 좀 더 넓히면 우리나라 거의 모든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끝없이 대물림되고 있다.
사법시험 등 고위공무원을 뽑는 — 매년 정말 소수만이 합격하는 — 어려운 시험의 대명사로 사용되던 '고시'라는 용어가 일반 공무원 시험, 교원 임용, 공기업 채용 등에 가서 붙은지도 한참 되었고, 이젠 거의 모든 취업 관문에 적용될 정도로 일반화되었다. 모두가 원하는 안정적인 직장의 정규직 채용 때에는 몇백대 일의 경쟁률은 예사다. 취업이 그나마 쉬웠던 때가 있긴 있었다고 하는데, 정말 오래된 옛날 옛적의 전설처럼만 들었고, 체험해보진 못했다.
내가 취업에 매진하던 때에도 그랬다. 외환외기가 몇 년이 지난 후였다. 외환위기 직후에는 같이 학교를 다니던 친구들이 살길을 찾아 대부분 휴학을 하고 흩어졌다. 언제나 나름의 경쟁구도가 형성되던 과대표, 학과 회장 등의 자리는 주인을 찾지 못해 표류했고, 상당수의 학생들이 전문 자격증, 기능 자격증, 공무원 시험, 어학연수 등 각자의 미래를 찾아 숨어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학내 풍경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관행으로 자리를 잡아서, 재학 중에 일반휴학 한두 번쯤 하는 것은 이젠 통과의례처럼 된 모양이다. 농촌으로 봉사활동을 가고, 민중들을 계몽하고, 사회를 진보적인 방향으로 개혁하고자 하던 대학생들은, 교정에서 항상 울려 퍼지던 민중가요와 함께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일이 있을 때 가끔 들르는 근처 대학교는 학교 전체가 도서관 마냥 언제나 조용하기만 하다.
당시의 분위기에 편성하여,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영어를 공부한답시고 나름의 1년을 도피하여 보냈다. 3학년 2학기로 복학한 후, 4학년이 된 이듬해에는 봄부터 줄기차게 취업에 도전했다. 쉽지 않았다. 지방 소도시에 살면 겪는 또 다른 고충이지만, 일자리들의 대부분은 서울에,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대도시에 있다. 고속버스, 시외버스, 현지의 대중교통을 이용해 전국을 돌았고, 대개는 하루 전날 도착해서 숙박을 해야 했다. 날마다 채용공고를 검색했고, 수도 없이 많은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다. 그중 서류전형에 통과되었다는 연락이 오는 곳으로 필기시험도, 면접도 보러 다녔다. 특정 전공이나 기술을 요구하지 않아서, 내가 지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곳에 지원서를 넣었던 것 같다.
얼마나 많은 지원서를 냈었고, 그중 몇 군데에나 서류전형을 통과하고, 면접을 보았었는지 세어본 적은 없다. 이젠 그때의 일들이 너무 오래전 일들로 되어서 기억조차 희미한데, 고속도로를 운전을 하며 가다가 눈에 띄는 커다란 옥외 광고판을 보면서 '아~ 내가 저 회사에도 면접을 봤었지'할 때가 가끔 있다. 또 평소에는 접하기 힘든 약간 낯선 기업의 이름을 접했을 때 '어! 어디서 들어본 것 같다?' 싶어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내가 지원했었던 회사임이 어렴풋이 기억나곤 한다.
셀 수 없이 많은 입사지원서를 보내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기를 반복하다 보면, 떨어진다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도 하지만, 반면 그만큼씩 더 조급해진다. 갈수록 자신감도 자존감도 떨어지고, 그렇게 해서 절망의 끝에 선 느낌이 들면서, 진짜 뭐라도 하나 걸리면 나는 그곳으로 가리라는 결심을 했던 것 같다. 나에게 합격을 제안하는 곳이면 집에서 아무리 멀어도, 그곳에 아무런 연고가 없어도, 급여가 조금 박해도, 복지혜택 따윈 없어도, 근무형태가 빡빡해도 나는 그 제안을 수용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아마도 인생의 최저점을 지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었던 것 같다.
지금 이 땅의 많은 취업준비생들도 대부분 이런 비슷한 상태일 것이리라 짐작해본다. 하지만 그때 정말로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 그 시작은 자신에게 또 다른 출발선이 되고,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탓이다. 삶의 중요한 분기점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힘겨운 시간의 끝무렵에 운 좋게도 나는 직장을 갖게 되었고, 그 얼마 후에 야구를 시작했다. 목초지를 찾아 떠도는 유목민들처럼, 일자리를 찾아 전국을 떠돌던 시간을 끝내고 운 좋게 나는 정착했지만, 그때 내가 겪었던 상황은 우리 팀내 누군가를 통해 항상 진행형이다.
작은 오해로, 때로는 사소한 다툼으로 인해 탈퇴하는 회원들도 가끔 있긴 하지만, 운동장을 함께 뛰면서 생기는 동질감, 그로 인한 특별한 유대감은 생각보다 진하다. 특별한 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한 그들과 계속 같이 하고 싶게 만든다.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서 함께 자란 오랜 친구와 같은 학교로 진학하고 싶어 하고, 되도록 계속 같이 하고픈 것과 같은 이치다.
대학생이나 취업준비생들에게는 불확실한 미래, 양어깨를 내리누르는 부담감, 조급한 일상...
그 속에서는 잠시 짬을 내어 야구를 하는 것조차 너무나 어렵고, 그 시간이 그만큼 더 소중하다. 그 귀한 시간속에서 위로를 받고, 그 시간을 함께 하는 팀멤버들도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가급적 가까운 어딘가에서 안정된 직장을 구해 계속 야구를 함께 하게 되기를 늘 기대한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은 그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소년기와 청소년기를 모두 소비하고, 그렇게 해서 들어간 대학(어떤 대학이든)에서, 취업을 위해 성년의 첫 10년을 모두 소비한다 — 물론 10년만으로는 부족한 이들도 많다.
내가 취업으로 힘들어 하던 시기는 외환위기를 겪은 후라는 특수한 상황이라 그랬지 싶었는데, 그때 생긴 나쁜 상황이 고착화 된 것인지, 우리가 겪었던 일들을 지금의 대학생, 취준생들도 여전히 똑같이, 어쩌면 더 심하게 여전히 겪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안타깝다.
한쪽에서의 문제나 결핍은 단지 그곳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우리의 삶과 생활에서 얼마나 넓게, 얼마나 깊숙한 곳까지 팍팍하고 피폐하게 만드는지는 가늠하기 조차 어렵다. 같이 야구하던 이들이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것도 모두 여기서 파생된 것이다. 서릿발 같은 취준의 시간은 그가 발 딛고 선 공간마저 한없이 좁게만 느끼게 하고, 작은 취미 하나 조차 병행하기 힘들게 만든다. 어렵게 어렵게 취미를 병행해도 결국 우리는 이별을 맞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직장을 찾아 전국을 떠돌던 그때와 같은 이유로, 운동장에서 같이 땀 흘리던 동료들이 우리의 운동장을 떠나 미지의 새출발을 위해 전국으로 흩어졌다. 고양, 울산, 부산, 안동, 대전, 수원, 서울로 떠났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이도 있었다. 그들도 분명 선택지를 놓고 고심했을 것이고, 놓치기엔 너무 좋은 조건이라 떠난 것이었겠지만, 적어도 비슷한 조건의 직장이 근처에 있었다면 그들은 떠나지 않았을 것임도 명백하다. 그런 식의 이탈은 팀으로선 일시적인 인원 부족, 팀 전력 하락을 가져오는 문제도 있지만, 그것보다 정든 사람들과 해야하는 이별이 가장 큰 아픔이다.
어느 모임이든 회원들의 들고 남은 항상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좋은 사람들과 변함없이 계속 팀을 이어가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다. 그 원인은 대부분 취업과 생존 때문이다. 내가 처음 야구를 시작했을 때 함께였던 이들 중에 지금도 같이 하는 이는 단 둘뿐이다. 떠나간 이들 모두가 각자의 어딘가에서는 야구도 하는 여유가 늘 함께하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