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환경의 개선 (하)

인권운동가 이야기

by 따뜻한 만년필

영화 '퍼펙트 게임'

그 경기가 있었던 바로 이듬해 1988년 8월 27일, 해태 타이거즈 소속의 신인급 선수 김대현(향년 26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소속 선수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음에도 구단측은 유가족에게 아무런 지원이 없었다고 한다.


이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고, 잘못되었다 생각하고, 개선하고자 했던 이가 있었다. 그는 사고 차량의 조수석에 동승했던 같은 팀의 슈퍼스타도 아니고, 영화 '퍼펙트 게임' 두 명의 주인공 중의 한 명인 같은 팀(해태 타이거즈)의 전설의 대투수도 아니었다.


"같이 운동을 하던 선수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도울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연습생 선수들의 최저 생계비나 선수들의 경조사비, 연금 같은 최소한의 복지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선수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실제로 선수협 결성을 시도한다. 여기서 익숙한 그가 또 등장한다. 불같은 강속구, 폭포수 커브, 불굴의 투사로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여기서는 낯선 최동원을 만나게 된다.


약자들을 위한 목소리

우리는 가끔 억울하거나 부당한 상황에 놓인 이들이 내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나 적극적으로 그를 돕는 이들은 그 일의 당사자이거나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물론, 그런 목소리조차 내기 힘든 약자들도 있다—그런데 80년대 프로야구에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거나 최저 생계비조차 못 받던, 또는 다른 복지 제도가 절실했던 선수 본인이나 그 가족이 아니라, 당시에 프로야구 전체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던 최동원 선수였다.

역투하는 최동원 (이미지 출처 : 나무 위키)

최동원의 노력을 평가절하하고, 그의 의도를 폄훼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고, 그 흔적들이 여기저기에 여전히 많이 남아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때는 지금과 달랐다.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이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쉽지 않은 때였다. 그 흔적들의 주인들은 자신의 과거를 한번 되돌아보라. 그 시절 학교에서든, 다른 어디에서든, 단 한 번이라도 손을 들어 아니라고 말해본 적 있었는지, 그것도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해...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분명히 필요한 일을 그냥 두고, 모두가 망설이고만 있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용기를 내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는 자신에게 가해지는 육체적 혹독함에는 아무런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고, 모든 걸 묵묵히 이겨낸 사람이다. 오히려 소속팀의 우승을 위해 자신의 몸이 어스러질 때까지 기꺼이 등판을 자원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후배 선수들이 겪는 혹독한 현실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 자신은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전혀 없는 위치였지만, 오직 동료와 후배들을 위해 앞장섰다. 최동원은 자신에게 보장되어 있는 부와 명예를 내걸고 가시밭길을 선택한다


이런 움직임에 재빨리 담합하고, 기민하게 대처한 구단들에게서 최동원은 철저하게 외면당한다. 기득권에 저항하는 이는 그가 누구든, 심지어 무쇠팔의 슈퍼스타조차도, 거대한 바위로 향하는 하나의 계란에 불과함을 우리는 알게 된다.


우리의 슈퍼스타는 재벌구단들과 언론의 협주곡에 의해, 자신이 걱정해 주던 후배들보다, 더 참혹한 현실 위에 놓이게 된다. 알다시피 한번 언론의 집중 타깃이 되면, 악의로 가득 찬 마녀사냥식 기사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그 과정을 거친 후에 재설정되는 이미지는 회복이 불가능하다.

삼성 유니폼을 입은 최동원 (이미지 출처 : 나무 위키)

롯데가 최동원이라는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도 있었다면, 그와 함께 또 다른 우승을, 어쩌면 92년 두 번째 우승 때라도, 그가 함께 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괘씸죄라는 굴레가 씌워진 최동원은 명백한 보복성 트레이드로 팀을 옮긴다. 그것도 하필 84년, 오직 소속팀 롯데를 위해 자신의 온몸을 불사를 당시의 상대팀(삼성)으로 트레이드된다. 84년에 자신을 던져 이룩한 무언가가 그의 마음속에 있었다면, 그때는 그것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삼성의 유니폼을 입은 그는 우리에겐 더 이상 최동원이 아닌 듯했다. 그 자신은 더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끊임없이 계속되던 혹사의 후유증인 듯, 아니면 담합한 구단들의 퇴출작전인 듯, 32살의 너무 이른 나이에 조용하고 갑작스레—롯데의 두 번째 우승을 2년 앞둔 90년을 끝으로—불꽃같았던 그의 선수생활은 막을 내린다.


그의 젊음과 열정을 불태웠던 롯데는 물론 프로야구 전 구단, 심지어 야구계 자체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그가 사랑했던 야구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된다. 그가 누구보다 애정하던 프로야구(한화 이글스 코치)로 다시 돌아오는 데는 10년이 걸린다. 그리고—고작 시구 한 번을 위해(2009년 7월 4일)—롯데의 마운드에 다시 한번 서는 데는 20년이 걸린다. 뒤늦게 부산 사직구장 앞에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 생겼지만, 최동원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고, 그것도 롯데가 세워준 것은 아니다.

사망 2주기(2013년 9월 14일)에 세워진 최동원 동상 (이미지 출처 : 연합뉴스)

우리가 본 적 없는 많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일하는 우리들의 환경이 조금씩 개선되어 온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오래 전도 아니지만, 내가 직장생활을 갓 시작했을 때는, 사무실에서 야근을 해도 휴일근무를 해도 인정받지도, 감히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육아휴직이 갓 도입되었을 때도, 직원들은 눈치만 볼뿐 그 누구도 마음대로 신청하지 못했다. 물론 이 정도의 일들은 그 전의 선배들이 겪었던 것에 비할바는 아닐 것이다.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비정규직은 너무나 많고 우리가 모르는 많은 곳에서 우리의 상식과 상상을 뛰어넘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으니, 갈길은 또한 아직 멀다. 우리 사회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한 이유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선수들의 처우는 급속도로 향상되었다. 연봉도 많이 올랐고, 야구장의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등판 간격, 휴식일, 한계 투구 수(대략 100개) 등의 가이드라인이 생겼고, 투수들은 철저하게 보호받고 있다. 누구의 어깨가 가장 강한지 알 수도 없고, 알필요도 없어졌다. 철완이라는 미명 아래, 팔을 혹사당하는 선수는 이제 없다. 분업화도 심화되어 선발, 중간, 마무리의 역할 분담도 명확하다. 선발투수가 완투를 하는 모습을 이제는 보기가 힘들다. — 요즘 선발투수들은 5~6이닝 정도만 던지면 제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 — 84년의 한국시리즈가 열렸던 10일간, 최동원은 혼자서 4경기를 완투했지만(최동원은 84년 정규시즌에서도 14번의 완투가 있었다), 현재 막바지로 향하고 있는 21년 프로야구 전체에서 완투는 단 7번에 불과하다. 그것도 7명의 다른 투수들이 한 번씩 기록한 것이다.


나는 최동원에게서 전태일을 보았다. 전태일은 자신의 생명을 던졌고, 최동원은 적어도 자신의 선수생명을 걸었고, 또 잃었다. 이들은 가슴이 따뜻한 사람들이다. 크고 작은 미담들이 말해주는 그들은 알면 알수록 정말로 좋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과 구분하지 못하는 바보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생은 왜 그토록 예외 없이 짧은 것인지 못내 가슴 아프다.


당시의 최동원은 최고의 선수였다.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일등은 자기 것을 지키려고만 할 뿐, 굳이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의 앞길은 부와 명예로 수 놓인 레드카펫이 깔려있었지만, 앞만 보며 그 위를 걸어가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행동했다. 한국 프로야구계에 단 한 명의 인권운동가가 있다면 그는 확실히 최동원이다.


높은 연봉을 받고, 좋은 환경에서 야구하고 있는 후배 선수들은 최동원을 기억해야 한다. 강속구와 폭포수 커브를 던지고, 남들보다 더 많은 경기에서 던지고, 더 많은 공을 던지고, 그것으로 롯데를 우승시켰던 철완의 최동원보다는,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누구보다 앞장섰던 따뜻한 선배 최동원으로 말이다.

(이미지 출처 : 연합뉴스)


* 표지 이미지 : 영화 '퍼펙트 게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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