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대통령
* 최초(最初) : 맨 처음
- Daum 한국어 사전
빛나는 최초(最初)
소수자(또는 약자)들은 자신들의 간절한 염원이 하늘에 닿아, 한 번쯤 실현되기를 바란다. 그런 열망이 빚어낸 결실의 하나로, 언젠가는 자신들 가운데서 지도자가 나오기를 소망한다. 그래서 최초(最初)라는 타이틀이 붙는 어떤 지도자 말이다. 이런 바람은 이따금 현실이 된다.
대표적인 예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대통령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미국의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도 될 수 있겠다. 리시 수낵(Rishi Sunak) 신임 영국 총리도.
한때 미국에서는 '여성 대통령이 먼저 나올 것인가, 흑인 대통령이 먼저 나올 것인가'가 흥미로운 주제였다. 당연히 흑인보다는, (물론 백인) 여성 쪽이 훨씬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민주당 경선에서 오바마와 대등하게 경쟁하던,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후에 국무장관까지 역임했던—의 존재감은, 여성 대통령의 가능성을 훨씬 높아 보이게 했다. 그러나 섣부른 예상은 늘 뒤집힌다.
새로 탄생한 최초는, 지지자들에게는 큰 의미로 다가갈 것이다. 대대손손 핍박과 차별과 설움을 겪었던 땅에서, 태평양 너머의 우리가 봐도 멋진 오바마가, 그들에게는 얼마나 자랑스러웠겠는가. 미국에 거주하는—아마도 미국을 넘어 전 세계—모든 흑인들은 자부심에 충만했을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最初)
부러워만 할 일은 아니다. 그깟 최초, 우리나라에도 있다.
2012년의 대선구도는 치열했고(이전 글 '旣視感(기시감)' 참조),
그 결과에 의한 당선자에게도 최초(最初)가 붙었다.
‘아버지가 어마무시하게 위대하니, 당연히 그의 자식도 그럴 것이다'란 굳은 신념을 가진 이들의, 맹목적인 기대에서 파생된 인물, 박근혜다.
그는 아버지에 이어 대통령이 된, 우리나라 최초(最初)의 2세 대통령이자,
미국에서보다 먼저 탄생한, 대한민국 최초(最初)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싫었다.
왜 그토록 그의 낙선을 바랐던가?
(나는 역사를 잘 모르지만) 그 첫 번째 이유를 역사에서 찾는다.
다들 알다시피 박근혜는 군부 독재자 박정희의 딸이다.
박정희는, 사망 후 40년도 더 흘렀지만, 평가는 양극단으로 쏠려있고, 여전히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그의 군사반란이 쿠데타냐, 혁명이냐,
공(功)이 더 크냐, 과(過)가 더 크냐,
경제 대통령이냐, 독재자일 뿐이냐
등의 논란들이 여전히 첨예한 대립 속에 있고, 아직도 우리 국민 모두를 만족시키는 한 방향의 결론을 내기는 힘든 주제다. 지금으로 봐 선 100년 뒤에도 별 다를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일단 이런 것들은 아주 논외로 하겠다.
일본군 장교
진짜 문제는 시간적으로 훨씬 더 앞선 그의 청년기에 있었다.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였다라거나, 친일파라거나, 이런 것도 이미 꽤나 알려진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알고 있거나, 모두가 그 사실을 인정하거나,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은 또 아닐 것이다. 애써 알려고 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실제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가 나온다. (※비슷한 내용이 위키백과에도 나온다. 아마도 보편적인 정보인 모양이다.)
일본제국이 패망하는—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마지막 순간까지도, 박정희는 일본이 만주에 세운 만주국의 중위였다. 장교라는 것은 이미 많은 것을 말해준다. 어쩔 수 없이 끌려간 강제징용도 아니고, 스스로 지원한 것이며,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이다. 우리나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싫어하는 친일파이며, 그중에서도 대통령까지 되었으니, 친일파 중에서도 가히 대표 격이라 할 수 있겠다.
박정희는 애초 소학교 훈도(교원)였다. 일제강점기 대다수 민중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할 때, 요즘도 초등교원이면 선망의 대상인데, 그 시절에는 누구나 선망했을 직업이었을 테고, 분명히 남부럽지 않을 정도도 살만 했을 것인데, 그 정도로는 그에게 만족감을 주기엔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의 친일행적은 논란이 불가능할 만큼 뚜렷하고, 적극적이다.
[친일인명사전]에 기재되어 있는, 그의 군관 지원 편지의 일부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두렵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아무쪼록 국군—여기서 국군은 일본군이다—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 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그때 20대의 그는 일본군 장교가 되어, 종국엔 무엇이 되고자 했던 것일까?
아래는 해당 내용을 실은 2009년 11월 5일 자 한겨레신문 기사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지원 때 “목숨 바쳐 충성” 혈서 사실로'의 일부다.
만주국에서 일본인들이 발행한 <만주신문>은, 1939년 3월 31일 치 7면에서 ‘혈서 군관지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29일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교사) 박정희 군(23)의 열렬한 군관 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목숨 다 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라고 보도했다.
그는 결국 1944년 12월 23일 정식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당시에 만주국의 군인이 된다면, 적은 누구였겠는가? 물론 중국군, 러시아군도 있었겠지만, 우리 독립군과의 동족상잔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말이다.
박정희의 임관 후, 불과 8개월 남짓 만에 일본이 패망하게 된다. 해방을 맞은 식민지의 민중은 만세를 불렀지만, 전쟁에서 패한 제국의 장교는 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부역자에 대한 정리가 생략되었던, 안타까운 우리 역사는, 이런 사람을 해방 바로 이듬해인 1946년 9월에 조선 경비 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에 입학이 가능하게 했다.
별따기쯤이야
현재 기준으로, 임관하는 소위가 낙오하지 않고, 치열한 진급의 바늘구멍을 통과하여, 누구나 달수 없기에 말 그대로 '하늘의 별따기’라 불리는, 별 하나(준장)를 다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군(軍) 인사법(人事法)에 따르면, 준장을 달려면 임관하여 26년을 근무하고 대령으로 4년 이상 근무하여야 한다."
- 출처 : 나무 위키
사관학교든, ROTC든, 3사관학교든, 임관을 위해서도 적어도 수년간의 수련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2~4년의 수련과정을 거쳐 20대 중반에 소위가 된다고 보면, 중간에 계급정년을 용케 피한다 해도, 최소 50세는 넘어야 별 하나를 달 수 있다는 얘기다.
당시의 우리 군은, 불과 1년 전에는 일본군이었던 사람을, 1946년 12월 14일에, 고작 3개월의 속성 과정을 마친—소위로 임관하기에는 많은 나이인—29살 청년에게, 바로 소위 계급장을 달아준다.
암울했던 시기에,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진급으로, 소위임관 후 1년도 되기 전인 1947년 9월에 대위로, 또 바로 한 달 후인 10월에 소령으로 진급한다. 소위에서 소령까지 오는데, 10개월이 걸린 것이다.
박정희는 소위로 임관 후 7년 만에, 고작 36살에 별을 단다. 그러나 이것도 그에게 만족감을 주지는 못했다.
기사회생
일본군이었던 자신을 거두어 안아준 남한의 군대에 그는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남로당 군 프락치로 사형 선고를 받고, 군에서 파면되기까지 한다.
수사과정에서는 급 태세 전환을 하여, 좌익 혐의 사실을 순순히 시인하면서 군대 남로당 조직원들의 명단을 제공하고, '숙군 사업에 적극 협력한 점을 인정받아, 1949년 2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면하고 '파면, 무기징역, 전 급료몰수'선고를 받았다
동서독이 통일되고, 동구권과 구소련이 해체되고, 냉전이 끝나고도, 거의 30년이 지났는데, 북한의 존재로 인해, 21세기에 와서도 아직도 주사파, 빨갱이를 입에 올리는 냉전의 잔재가 여전하다는 것이, 이 나라의 불행이기도 하지만, 주사파, 종북좌빨 타도를 외치는 이들이, 하나같이 이런 박정희의 숭배자인 것은 또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런 박정희를 극적으로 살려낸 것은 6.25다. 한반도의 모든 민중들의 불행이 그에겐 절호의 기회가 된다. 전쟁을 틈타 그는 군에 복귀를 했고, 초고속 승진을 이어간다.
일본 관동군 출신 박정희가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신분을 세탁하고, 소위가 되는 데는 고작 3개월이면 되었던 것처럼, 소위가 된 후 장군이 되는 데는 7년이면 족했다.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11월 25일에 박정희는 준장이 된다.
이렇게 엉성한 시스템에서 손쉽게 초고속 진급을 하다 보면, 정상(頂上)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일까?—이전과는 달리 준장에서 소장까지 가는데 3년 반이나 걸려서, 답답함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 비행기만 타다 보면, 포르셰를 타도 답답한 모양이다. 우연인지 소장(투스타) 재직 4년 2개월 즈음에 뛰쳐나가, 5.16을 일으킨다. 소장은 그가 가장 오랜(?) 기간 달았던 계급이다.
이순신 & 안중근
인구 5천만의 우리나라가 ‘명량’이라는 한 편의 영화에 무려 1,7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원동력,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를 읽으며 감동하고, 2022년 8월에 출간된 [하얼빈]이 꽤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고, 여전히 높은 순위에 올라 있는 이유.
그렇게 이순신, 안중근을 존경하는 이유가 분명하다면, 같은 이유로 박정희는 미워해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직계 가족이나 친인척 중에 일제강점기 때 강제로 행해졌던 징용, 징병, 위안부 등의 피해자가 한 명쯤 없더라도 말이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후, 받은 재판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토를 죽인 까닭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서다. 오늘 기회를 얻었으므로 말하겠다. 나는 한국 독립전쟁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이토를 죽였다. 그러므로 이 법정에 끌려 나온 것은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객으로서 신문을 받을 이유가 없다. 이토가 한국 통감이 된 이래 무력으로 한국 황제를 협박하여 을사년 5개 조약, 정미년 7개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한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서 싸우고 있고 일본 군대가 진압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일본과 한국의 전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김훈 <하얼빈> p.238에서 -
이런 사실을 박정희가 알았다면, 자신의 과거는 부끄러워했어야 마땅하다. 박정희는 이런 안중근과는 정확히 대척점에 있었던 사람이니 더욱 그렇다.
본인이 했던 발언의 맥락조차 제대로 이해 못 하고, 일본과는 한 번도 전쟁한 적이 없다 하며, 기자들을 향해 뜬금없이 역사공부를 강조했던, 어느 당 현 비대위원장은 본인부터 이런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를 반인반신으로 숭배하는 사람들은 그의 생애를 신화로 만들고, 온갖 역경을 딛고, 죽을 고비를 넘겨, 결국 왕좌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박정희를 묘사하지만,
내가 본 그는, 동시대의 민중들이 겪는 아픔을 함께한 적이 없고, 그의 개인적 목표가 향했던 방향은, 민중들의 그것과는 언제나 정반대였다. 일제 강점기에 핍박받던 민중들은 해방을 원했지만, 그는 일본을 위해 싸웠고, 남한의 군인이면서도, 북을 지향했었다. 그 과정에 맞닥뜨린, 이 땅의 모든 비극이 그에게는 모조리 기회가 되었다.
박정희가 아주 오래전 옛날에 행한 일도, 대통령이 된 일도, 대통령으로서 행한 일도, 모두 다 지나간 과거이고 이미 발생된 일이니, 현재의 우리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주체하지 못하는 야망으로, 스스로 왕이 된 자는, 뭐 어쩔 수 없으나, 2012년 18대 대선을 앞둔 대한민국의 유권자로서, 그의 자식을 굳이 우리 손으로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간절하게 박근혜의 낙선을 바랐던 것이다. 어쨌든 나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의 딸은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
최초가 언제나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럿 붙던 대통령은, 최초의 탄핵 대통령이 되었다.
* 표지 : 이승만 (이미지 출처 :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