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치유
아버지와 아들은 어쩌다 서로 등지게 되었을까?
“때로 말은 상처가 된다.”
말과 상처
영화 중후반부, 또 다른 등장인물 '테런스 맨(Terence Mann, 배역 : 제임스 얼 존스)'과의 대화에서, 레이는 아버지와 있었던 일에 대한, 추가 정보를 준다.
대화 도중에 1920년대에 레이의 아버지가 낮에 일하고, 밤에 야구를 했었다는 말을 하게 되는데, 테런스가 묻는다.
테런스 :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지?
레이 : 야구선수로 성공 못해서, 아들을 대신시키려 했죠. 10살 무렵에는 야구가 진절머리 나게 됐어요. 14살부터는 거부했고요. 믿어지세요? 미국애가 아버지랑 공 받기를 거부하다니... 어쨌든 17살 때 짐 싸고 한마디 뱉고 나왔죠. 다시 돌아가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랐어요. 장례식 때 갔었죠.
(한참 후)
테런스 : 그 내뱉은 한마디가 뭐였지? 아버지에게 말이야.
레이 : 범죄자를 우상으로 삼는 사람은 존경할 수 없다고요.
테런스 : 우상이 누구였는데?
레이 : 슈레스 조 잭슨
테런스 : 범죄자가 아닌 줄 알았으면서, 왜 그런 말을 했나?
레이 : 17살이었으니까요. 취소할 기회도 안 주고, 돌아가셨어요.
아마도, 존(John)은 자신의 아들이 조 잭슨을 범죄자라고 한 것보다는, 자신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말에 더 큰 상처를 받았을 테지만, 어쨌든 테런스의 말처럼, 실제로 레이는 조 잭슨(Joe Jackson)을 전혀 범죄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옥수수밭을 밀고, 야구장을 만들던 때에, 레이와 자신의 딸 캐린(12살가량)과의 대화다.
레이 : 화이트삭스가 1919년 월드시리즈를 포기했었지
캐린 : 포기라뇨?
레이 : 돈을 받고 고의로 시합에 진거야. 슈레스 조만 빼고. (조 잭슨이) 돈은 받았지만, 그가 일부러 지는 행위를 했단 걸 증명하지는 못했지. 그런 사람이 에러도 없고, 타율이 3할 5푼 7리나 되겠니?
캐린 : 안되죠
레이: 12개의 안타와 시리즈의 유일한 홈런을 쳤는데 말야
캐린 : 말도 안 돼요
레이 : (위대한) 슈레스 조를 포함한 8명에게 평생 출장정지처분이 내렸어
캐린 : 출장정지가 뭐죠?
레이 : 다신 야구를 못한다는 거야.
딸(캐린) 앞에서, 레이는 조 잭슨을 열렬히 변호한다. 특히 8명에게 평생 출장정지 처분이 내렸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조 잭슨의 이름을 언급할 때는 great(위대한)이라는—자막에는 없고, 영어 대사로만 들린다—수식어까지 붙인다. 이는 조 잭슨에 대한 레이의 평가가 아버지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결국 레이가 아버지에게 했던 말은, 10대의 반항심에 의한 전혀 마음에 없는 말이었고, 오직 아버지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었다. 내뱉은 말이라 다시 주워 담지도 못했고, 돌아갈 길도 찾지 못하고, 긴긴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것을 만들면, 그가 올 것이다
영화의 말미,
당일의 야구를 끝낸 선수들이, 내일을 기약하며, 모두 옥수수밭(천국)으로 돌아간 야구장. 마지막에 남은 조 잭슨이, 레이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서있다.
왜 그렇게 웃느냐는, 레이의 물음에, 조 잭슨이 입을 연다.
"If you build it"(그것을 만들면)
그리고, 운동장의 한쪽을 가리키며,
"He will come"(그가 올 것이다)
그쪽에는 한 젊은이가 허리를 굽혀 다리 보호대를 풀고 있고, 상체를 일으킨 후, 포수 마스크를 벗는다.
레이는, 마스크를 벗은, 그 젊은이의 얼굴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레이 : 맙소사!
애니 : 뭐? 왜 그래?
레이 : 아버지야!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젊은이를 보며, 레이가 계속 말한다.
"마이 갓! 난 삶에 완전히 지쳐버린 모습만 봤었는데,
그를 봐!
그는 그의 삶을 눈앞에 두고 있고,
난 섬광조차도 아니던 때야."
※ 이 부분, "난 섬광조차 아니던 때야."라는 자막 번역이 조금 어색하다.
영어 대사는 "I'm not even a glint in his eye."인데,
"(저 때) 나는 그의 눈의 반짝임조차 아니야." 정도가 자연스러울 것 같다.
우리말로 더 의역하면,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야”정도가 어울린다.
애초에 천국에서 들려오는 듯했던, 그 목소리가 했던 말을 들은 후, 야구장을 지으면 온다고 했던 그(He)를, 레이는 줄곧 슈레스 조 잭슨(Joe Jackson)이라 확신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He)는 바로 아버지였던 것이다.
레이는, 자신보다 56살이 많은, 자신의 아버지를 진짜 늙고, 꿈이 있었을 텐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어떤 충동적인 행동도 하지 않고, 그래서 절대로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야구복을 입은 아버지를 보자, 젊디 젊은 그의 꿈이 무엇이었는지, 그 일(야구)에 얼마나 열정을 가진 청년인지를, 그때야 비로소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공 받기 할래요?
레이는 아버지를 바로 알아봤지만, 존은 아들을 못 알아보는 듯하다.
레이에게 다가온 존이 말한다.
“야구를 할 수 있게 야구장을 만들어 줘서 고맙소. 존 킨셀라입니다."
레이는 자신과 아내 애니와 딸 캐린을 순서대로 존에게, 모두 (성을 빼고) 이름으로만 소개를 한다.
해질 무렵, 존과 레이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대화가 아닌, 존이 낮에 했던 야구와 아름다운 야구장에 대해 약간의 대화를 나눈 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한 어떠한 확인도 없이)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눈다.
존 : 굿 나잇! 레이
레이 : 굿 나잇! 존
그리고 존은 돌아서서 옥수수밭(천국)으로 향하려 한다. 존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레이가 그를 부른다.
너무 오랜만에 사용해보는 호칭이 가슴 벅찬 듯, 목소리가 떨린다.
"아버지!" ("Hey Dad!")
"공 받기 할래요?" ("You wanna have a catch?")
존이 돌아보며 답한다.
"좋고 말고."("I'd Like That.")
존은 레이가 자신의 아들임을 이미 알고 있었고, 아들의 제안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 것이다.
작년 메이저리그의 ‘꿈의 구장 이벤트‘[글 ’아버지와 아들(프롤로그)참조]를 지켜본 후에,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이 영화를 다시 보고, 또 보고, 여러 번을 봤는데, 볼 때마다 이 장면은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그들은 22년만—레이의 14살 때 이후 처음—에 캐치볼을 하게 된다. 날이 점점 더 어두워지자, 애니는 야구장에 조명을 켜준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밤이 깊도록 공 받기를 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꿈의 구장(Field of Dreams)
가만 생각해보면, 이 영화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야구장에 나타난 이들이 모두 아주 젊고 팔팔하다는 것이다. 1951년에 사망한 조 잭슨은 1887년생이니, 64세로 생을 마감했는데, 전성기 때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영화에서, 평생 의사였던 또 다른 등장인물 아치볼드 그래햄은, 70세 이상의 아주 많은 나이에 사망했는데, 20살 정도의 앳된 청년으로 '꿈의 구장'에 나타난다. 존 킨셀라도 78세로 사망했는데, 36살인 레이보다 오히려 더 젊은 모습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혼이 등장하는 거의 모든 영화에서, 영혼은 대체로 사망 당시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반해, '꿈의 구장'은 다르다. 영화에서 레이의 야구장에 나타난 모든 이들은, 그들의 꿈과 열정이 가장 충만했던 그때의 모습인 것이고, 그래서 그곳은 '꿈의 구장(Field of Dreams)'인 것이다.
조 잭슨 정도의 슈퍼스타급 메이저리거도 아닌, 일반인과 다름없는, 그들에게 대체 야구가 어떤 정도의 의미란 말인가?
아치볼드 그래햄(Archibald Graham, 배역 : 버트 랭커스터)은 메이저리그에 도전했으나, 한 타석에도 들어서지 못하고, 야구를 그만두었다. (1972년에 이미 사망한) 나이 든 그는, 레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메이저리그에서 타격을 못해봤소.
단 한 번이라도 투수를 상대로, 그가 모르는 뭔가를 아는 듯, 투수를 노려보는 것이 내 소원이오.
눈이 아플 정도로 푸른 하늘을 실눈으로 보고,
공을 칠 때 팔의 울림을 느끼고,
2루타를 3루타로 늘려 쏜살같은 슬라이딩으로,
베이스를 두 팔로 껴안는 것이 내 소원이오."
꿈이란 이런 것이다.
각자 자기만의 꿈.
그래햄의 저 소원은 '꿈의 구장'에서 실현된다.
‘꿈의 구장’은 이런 꿈들이 실현되는 곳이다.
레이의 아버지 존 킨셀라의, 야구선수로서의, 꿈이 어떤 것인지까지, 영화에 구체적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다만 야구복을 입고 나타난 그 모습 만으로도, 그것에 도전하던 그때가, 그의 열정이 가장 충만했던 때라는 짐작은 충분히 가능하다.
존이 ‘꿈의 구장’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러하고, 게다가 결국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꿈의 구장’을 만들게 한 장본인이니, 더욱 그러하다.
우리에게 '꿈의 구장'과 같은 곳이 있어,
그곳에서 (나보다 더) 젊은 아버지를 마주하게 된다면,
그의 앞에서 지금의 내 모습이 부끄러울지도 모른다.
동시에, 우리가 오래전 언젠가, 무언가에 대해 가졌던, 호기심과 열정이 있었던 그때보다,
훨씬 더 젊고, 열정 넘치고—그것이 일이든, 운동이든, 글쓰기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다른 그 무엇에든—
진심을 다하는, 생각보다 훨씬 더 멋진, 우리의 아버지를 만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레이가 그랬던 것처럼, 오직 늙고 지친 아버지의 모습만 기억했던,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아주 많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 아버지와 아들 (에필로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