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라, 나팔꽃. 오래전 그때처럼 다시 한번 색색(色色)으로
오래전 살았던 옛 동네 근처 지나다 차 돌려 도로에서 제법 떨어진 그곳 향해 차를 몰았다. 이런저런 볼일로 이따금 근처 지나친 적이 있었지만 그날따라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느닷없이 치밀어 오르던 그 무엇이 있어서였다.
그 무엇이 뭐냐고 물으면 딱히 이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리하여 계절이 길 양편 줄지어 선 벚꽃나무마다에 희디흰 꽃 만개한 봄이었기 때문이라거나 그로 인해 문득 든, 사무치는 어떤 마음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이었다.
동네 초입(初入) 이르러 아직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는, 어릴 적 ‘느티나무 할배’라고 불렀던 고목 근처에 차 세워두고는 천천히 동네 향해 걸어갔다. 낮은 산자락에 고즈넉이 자리한 동네는 이전과는 달리 많이 쇠락해 보였다. 돌이켜보면 이십 대 중반 동네 아주 떠난 후 강산이 세 번하고 반이나 바뀌었으니 대개의 시골 동네가 그렇듯 그럴 수밖에 없는 세월이 흘러서였을 것이다.
오래전 한 때의 거주(居住)가 그때껏 유효할 리 없을 것임으로 내 낯선 동네에 든 이방인(異邦人)으로 조심스럽게 돌담길 따라 걷다 처음 걸음 멈춘 곳은 동네 한복판 배꼽마당 근처였다. 지금은 한쪽에 그때는 없던 경로당이 만들어져 있고 이곳저곳에 농기구들이 세워져 있어 옛 흔적 찾기 어려웠지만 한때는 무척이나 넓어 굳이 부르지 않아도 나를 비롯한 또래의 조무래기들이 제 알아서 삼삼오오 모여들어 자치기며 비석치기, 구슬치기를 했었던 이를테면, 아이들의 재잘거림과 웃음소리 끊이지 않았던 놀이의 성지(聖地)였던 곳이었다.
그렇듯 어울려 한 시절 근심 없이 뛰놀았던, 그러다 어느 순간 풍매화(風媒花)로 바람에 날려 제각각 터 잡고 뿌리내린 그곳에서 제 몫 다하며 살아가고 있을 옛 동무들의 이름들 나직하게 호명(呼名)하며 동네 안쪽으로 더 걸어가다 멈춘 곳은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던 한 소녀의 집이 있던 곳이었다.
누구에게든 사춘기(思春期)라는, 한 얼굴 가슴에 담아두는 것만으로도 심신이 온통 두근거리고 홧홧하여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 듯한 때가 있었을 것이고 보면 탱자나무집 소녀는 한 때 나를 그런 지경에 빠뜨렸던 소녀였다.
벚꽃처럼 희디흰 얼굴에 수줍게 웃을 때마다 볼우물 지던 그 소녀를 날마다 울타리 너머로 훔쳐보다 가시에 찔려 그즈음 내 눈은 늘 충혈되어 있었다. 세월이 한참이나 흘렀으니 지금은 길 걷다 마주쳐도 한낱 타인(他人)으로 스쳐 지나고 말 초로(初老)의 여인일, 그리하여 오래전 그때의 앳된 모습으로만 각인되어 있는 소녀를 애틋한 마음으로 추억하며 걷다 다시금 발길 멈춘 곳은 옛 집 근처 우물이 있던 자리였다. 진즉에 메꾸어져 지금은 채마밭 되어있는 이곳을 바로 찾지 못해 한참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비로소 찾은 곳이었다.
물 긷다 걸핏하면 빠뜨렸던 두레박과 아무리 더워도 한 두레박의 물이면 족했던 여름날의 등목과 새벽닭 울기 전까지 절대 내려다보지 말라던 무서운 금기(禁忌) 어기고 한밤중 내려다본 거기에 맑은 달과 구름, 그리고 뭇 별들이 빠져있어 마치 건져 올리기도 할 요량으로 공연히 두레박 내리기도 했었던, 바로 그 우물이 있었던 자리. 그리하여 그곳에 서서 눈감고 주문(呪文) 외듯 나직하게 우물,이라고 되뇌자 우물과 그 주위 둥글게 둘러싸고 있던 돌담이 마치 어제 본 것처럼 또렷하게 떠오르고 더불어 돌담 휘감아 오르며 색색(色色)으로 피어있던 그 여름날 이른 아침의 나팔꽃들이 돌담이 아니라 기억의 어느 한쪽 휘감아 오르며 다시 선연하게 피어나는 것이었다.
그랬다, 나를 느닷없이 이곳으로 향하게 한 가슴속 그 무엇의 정체는 바로 나팔꽃들이었다.
그 어떤 마법(魔法)과 주문(呪文)으로도 도무지 되살아나지 않는, 그리하여 애틋하거나 사무치는 그 무엇 하나 없이 살고 있다는 삭막하기 이를 데 없는 생각 혹은, 삶이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이었다. 휘감아 오르는 넝쿨에 칭칭 감겨 잠깐만이라도 간절하게, 참으로 간절하게 그 옛날의 그 나팔꽃 내 안에 피워보고 싶던 것이었다.
오래전에는 그리도 넓었던, 그러나 지금은 드문 발자국 때문인지 한없이 좁아 보이는 고샅길 따라 걸어 나와 동네 입구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았다. 그간 사라지고 변한 것도 많지만 여전한 골목처럼 비록 가난했으되 주고받던 이웃 간의 도타운 정(情)이 넘쳐나 잠시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저 깊은 곳까지 금세 따뜻해지는 옛 동네에서의 애틋한 추억(追憶)들이 마치 어제 일인 듯 되새겨졌다. 더불어 문득, 내 안 어딘가에 맑은 샘물 솟아나는 우물 하나 생겨나고 나는 그때처럼 한밤중 고개 숙여 그에 떠있는 달과 구름, 총총한 뭇 별들 내려다보며 어쩌면, 그것들이 이른 아침 색색의 나팔꽃들로 핀 것이라 믿는 소년이었다.
누구든 사무치는 그 무엇 하나 없어 허허로운 가슴일 때 고향 옛 동네 찾아가 보라. 가서는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관성(慣性)에 의해 앞으로만 내닫는 걸음이며 수시로 어깨 짓누르는 까닭 모를 짐 따위 잠시 멈추거나 내려놓고 고샅길 걷던 옛 발자국 따라 걸어보라.
때로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눈이 아니라 가슴이 느끼는 애틋하고도 아름다운 더 많은 것들이 서걱거리는 마음에 그때의 나팔꽃으로 다시금 피어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