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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종훈 Sep 25. 2023

부치지 못한 편지(便紙)

보이저(Voyager) 2호와 1호가 연이어 우주를 향해 발사되었을 즈음 나는 한 소녀에게 내 마음을 실어 보냈다. 오십 페이지짜리 분홍색 편지지가 열흘도 가지 못해 동이 났고 보낼 때마다는 아니었지만 이따금 소녀에게서 답장이 왔다. 두근거리던 마음 애써 누르며 우체부를 기다렸던 행복했던 시간. 그러나 서럽게도 그 시간은 짧아 소녀는 위성이 목성(木星)에 채 이르기도 전에 한 기의 위성으로 멀리 날아가 버렸다. 이후 위성이 태양계 벗어나 성간우주에 진입한 지금껏 지금에서는 초로(初老)의 나이일 그녀에 관한 그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다. 


가끔 고개 들어 밤하늘 올려다본다. 오래전 위성에 실어 보낸, 멀어질수록 더 빠르게 달려와 내 안에 닿는 그것의 수신(受信). 그리하여 다시 두근거리는. 




몇 번의 이사와 대청소에도

차마 버리지 못한, 세월의 더께로

누렇게 변색된 책들

이제는 눈 딱 감고 정리해야지며

한 권씩 책장에서 꺼내 박스에 담는데

그중 한 권, 오래된 시집(詩集)에서

연분홍 편지봉투가 툭, 떨어졌다.  

무엇일까 싶어 안에 든 것 꺼낸즉

꽃무늬 편지지였고 펼쳐 첫 줄 읽자마자

세상에나, 편지 한 장이 순식간에

사십여 년 전 저편의 기억 호명(呼名)해 내다니

진즉에 식어버린 심장 다시 뛰게 하다니-.    


한 소녀(少女), 비비안1)과 오드리2)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던 내 사춘기(思春期) 단번에 정리해 준

오래전 살았던 옛 동네 초입의

딸만 다섯인 탱자나무울타리 집 셋째 딸.

하얀 얼굴에 웃을 때마다 볼우물 지던

나보다 한 살 아래인 그녀에게 보내려고 했던,

그러나 보내지 못한 편지.

소녀가 내 안 들어왔던 그즈음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울타리 틈새로 소녀 훔쳐보았고

그로 하여 가시에 찔린 눈은 늘 충혈(充血)된 채

도무지 풀리지 않았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나는 왜, 그때껏

몰래 엿보기만 했을 뿐

말 한 번 변변히 건네지 못한 소녀에게

용기 내어 썼을 이 편지를

결별 염려하는 시구(詩句)의

인용(引用)으로 시작했었던 것일까?

기억컨대 그즈음 ‘폭풍의 언덕’이며

‘햄릿’ 등을 읽었었고 그로 하여 사랑은

달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멀쩡한 사내를 냉혈한(冷血漢) 혹은 광인(狂人)

만들 수도 있다는 것 저어하여

시작도 전 새드 엔딩의 예방주사 미리

맞아두려 한 것이거나 설령, 답장 없을 것이라도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 것이

결코 유죄(有罪)일 리 없으리라는, 그리하여

자존심에 금이 가더라도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역설(逆說)로

소녀 향한 내 마음이 얼마나 깊은 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도 여겨져

한 때의 두근거리는 소년으로

찬찬히 편지 읽어내려갔는데

문득, 보내지 못한 편지 지금 내 읽고 있듯

이제서는 초로(初老)의 나이에 이르렀을

그 한 때의 소녀에게 이 편지 보낸다면

그녀도 나처럼 한 때의 소녀로 두근거리며  

이 편지 읽어줄까,는 생각 들어 헛웃음

자꾸만 일던 것이었다.  


무엇이 그리도 쓸 말 많았던 것일까?

편지지 두 장 채우고도 모자라

석 장 째, 이 편지 받고 사귈 의향 있으면

모일(某日) 모시(某時) 읍내 역 앞 

다모아 제과점으로 나와 달라는 부탁으로

끝을 맺는 편지. 그리고 다시 한번

소녀의 심장 정확하게 저격하려는 듯 

추신(追伸), 그렇듯 너를 좋아하다 내 히스클리프3)로

폭풍의 언덕 미친 듯 헤매고 다닐 것이라도

행복(幸福)할 것이다,로 추측컨대

어쩌면 그때 나는 이 편지를

소녀가 아니라 가엾은 캐서린4) 혹은,

오필리어5)에게 보내려고 했던 것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들기도 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취인(受取人) 불명(不明)인.    


나는 왜, 밤 꼬박 새워

마음 꾹꾹 눌러 담아 썼을 이 편지를

부치지 못했던 것일까?

그리하여 나는 내일 이 편지를

내게 부칠 것이다.  

한참을 돌고 돌아 비로소 내 받은

소녀의 때늦은 답장인 듯.        



1)비비안 : 영국 출신의 여배우. Vivien Leigh

2)오드리 : 벨기에 출신의 여배우. Audrey Hepburn

3),4) : 소설 ‘폭풍의 언덕’에서의 남녀 주인공.

5)소설 ‘햄릿’에서의 여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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