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작컨대 생(生)이 상강(霜降)쯤에 이른 것 같다. 남은 절기(節氣)는 입동(立冬)부터 대한(大寒)까지의 여섯 절기로 잔뜩 몸 움츠린 채 걸어가야 할 길이다.
-가을이 오긴 왔나 봐요.
호수 근처 월광(月光) 커피숍 2층 창 너머로
한참을 말없이 호수 내려다보던 여인이
이윽고 고개 돌려 말한다.
물빛 약간 검어진 것뿐 별 다를 바 없는
호수의 무엇을 보고 여인은,
상강(霜降)이 코앞인데
이제야 가을을 말하는 것일까?
여인이 호수 보고 있을 때
그런 여인의 옆얼굴 물끄러미 보고 있었던 나는
이전보다 제법 늘어난 여인의 흰 머리카락 헤고 있었다.
-아직 낮볕이 따갑기는 하지만
추분(秋分), 한로(寒露) 지나
상강(霜降) 무렵이니 완연한 가을이지요.
물빛 때문인지 수심(愁心) 때문인지 좀 전보다
얼굴 다소 검어진 듯한 여인 눈앞에
부인할 수 없는 계절의 증거라도 내밀 듯
절기(節氣) 나열하며 내 말한다.
-병(病)인가 봐요, 가을만 되면 까닭 없이 도지는.
내 말에 가타부타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으며 여인이 독백(獨白)처럼 말한다.
병명(病名)도 증상(症狀)도 말하지 않고
다만, 가을이면 더 심해진다는 그녀의 병(病)
섣불리 문진(問診)하다 외려 덧날까 싶어
내 그저 뜻도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무엇일까?
가을 직전 다소 수다스럽기까지 했던
여인의 입 저렇듯 봉해
실어(失語)에 빠뜨린 가을의 속내는.
-병(病)이 아니라 더 깊어지려는 것이겠지요.
그때쯤 막 드리워지기 시작한 저녁놀이
여인의 얼굴에 물빛처럼 어른거리고
마치 어두워지면 할 수 없을 말인 것처럼
서둘러 내 그렇게 말하자
무슨 말이냐는 눈빛으로 여인이 나를 쳐다본다.
-삶의 내공(內工) 같은 것이 말입니다.
푸훕, 뜻밖의 말이라는 표정과 함께
여인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풍선 같은 소리 새어 나왔지만
아부성 짙은 내 해석이 그리 싫지는 않은지
곱게 눈 흘기며 웃는다.
그러나 사실 그 말은 그즈음 나 스스로가
까닭 모를 허무(虛無)와 염세(厭世)에 치우쳐져 있어
깊어지고 싶던 것은 나였으므로
그녀가 아니라 내게 하는 말이었다.
-상강(霜降)이 몇 번째 절긴가요…,
우리 생(生)도 그쯤에 이른 것 같은데…,
이제 어둑해져 잘 보이지도 않는 산 쪽으로 눈길 주며
미처 내 대답할 틈도 아니, 어쩌면
굳이 답 구하려는 것이 아닌 흡사
일인극(一人劇) 배우의 낮은 중얼거림처럼 내뱉는
여인의 말에 내 느닷없는 갈증(渴症) 일어
탁자 위 잔에 반쯤 남은 커피, 마저 마신다.
그런 것일까? 여인의 병(病)은
이미 흰 이슬, 찬 이슬 다 맞아
그 생(生) 희끗희끗한데 속절없이
서리조차 내리면 하얗게 세어 억새처럼
서걱거릴 것을 그리도 저어한 때문일까?
-상강(霜降)쯤이면 단풍이 절정(絶頂)이지요.
내 어림짐작 알 리 없는 여인에게 던진
선문답(禪問答) 같은 말이라 어리둥절하겠지만
그것은 상강(霜降)이 쇠락이 아니라
그대 생의 가장 화려(華麗)한 한 때임을 알라는,
그리하여 여인에게 건넨
나의 위로 같은 것이었다.
-……,
-……,
-먼저 일어날게요.
두터운 침묵 깨듯 여인이 말과 함께 일어서며
가볍게 목례하고 뒤돌아 또각,또각 걸어간다.
여인이 문 열자 그 앞에서 서성거렸을
차가워진 저녁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틈입자처럼 밀려들어 얼굴에 닿는다.
아직 그곳에 있기라도 한 듯
빈 여인의 자리 보며 가을 추(秋)
마음 심(心) 거듭 되뇌다
문득, 작년 이맘때쯤 찾았던
천관산(天冠山) 꼭대기, 약한 바람에조차
그리도 도리질하던 억새 떠오르는 것인데
환시(幻視)였을까?
여인이 앉았던 자리에 한 잎, 두 잎
마른 잎들 떨어져 내리고
이내 수북이 쌓이는 것 같은.
상강(霜降),이라고 나직하게 읊조리자
멀리 북쪽으로부터 흰 말들이
갈기 휘날리며 힘차게 달려 내려오는 것 같은,
허옇게 입김 토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