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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종훈 Oct 13. 2023

상강(霜降) 무렵

짐작컨대 생(生)이 상강(霜降)쯤에 이른 것 같다. 남은 절기(節氣)는 입동(立冬)부터 대한(大寒)까지의 여섯 절기로 잔뜩 몸 움츠린 채 걸어가야 할 길이다.




-가을이 오긴 왔나 봐요.

호수 근처 월광(月光) 커피숍 2층 창 너머로

한참을 말없이 호수 내려다보던 여인이

이윽고 고개 돌려 말한다.

물빛 약간 검어진 것뿐 별 다를 바 없는

호수의 무엇을 보고 여인은,

상강(霜降)이 코앞인데

이제야 가을을 말하는 것일까?

여인이 호수 보고 있을 때

그런 여인의 옆얼굴 물끄러미 보고 있었던 나는

이전보다 제법 늘어난 여인의 흰 머리카락 헤고 있었다.


-아직 낮볕이 따갑기는 하지만

추분(秋分), 한로(寒露) 지나

상강(霜降) 무렵이니 완연한 가을이지요.

물빛 때문인지 수심(愁心) 때문인지 좀 전보다

얼굴 다소 검어진 듯한 여인 눈앞에

부인할 수 없는 계절의 증거라도 내밀 듯

절기(節氣) 나열하며 내 말한다.


-병(病)인가 봐요, 가을만 되면 까닭 없이 도지는.

내 말에 가타부타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으며 여인이 독백(獨白)처럼 말한다.

병명(病名)도 증상(症狀)도 말하지 않고

다만, 가을이면 더 심해진다는 그녀의 병(病)

섣불리 문진(問診)하다 외려 덧날까 싶어

내 그저 뜻도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무엇일까?

가을 직전 다소 수다스럽기까지 했던

여인의 입 저렇듯 봉해

실어(失語)에 빠뜨린 가을의 속내는.


-병(病)이 아니라 더 깊어지려는 것이겠지요.

그때쯤 막 드리워지기 시작한 저녁놀이

여인의 얼굴에 물빛처럼 어른거리고

마치 어두워지면 할 수 없을 말인 것처럼

서둘러 내 그렇게 말하자

무슨 말이냐는 눈빛으로 여인이 나를 쳐다본다.


-삶의 내공(內工) 같은 것이 말입니다.   

푸훕, 뜻밖의 말이라는 표정과 함께

여인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풍선 같은 소리 새어 나왔지만

아부성 짙은 내 해석이 그리 싫지는 않은지

곱게 눈 흘기며 웃는다.

그러나 사실 그 말은 그즈음 나 스스로가

까닭 모를 허무(虛無)와 염세(厭世)에 치우쳐져 있어

깊어지고 싶던 것은 나였으므로

그녀가 아니라 내게 하는 말이었다.


-상강(霜降)이 몇 번째 절긴가요…,

우리 생(生)도 그쯤에 이른 것 같은데…,

이제 어둑해져 잘 보이지도 않는 산 쪽으로 눈길 주며

미처 내 대답할 틈도 아니, 어쩌면

굳이 답 구하려는 것이 아닌 흡사

일인극(一人劇) 배우의 낮은 중얼거림처럼 내뱉는

여인의 말에 내 느닷없는 갈증(渴症) 일어

탁자 위 잔에 반쯤 남은 커피, 마저 마신다.


그런 것일까? 여인의 병(病)은

이미 흰 이슬, 찬 이슬 다 맞아

그 생(生) 희끗희끗한데 속절없이

서리조차 내리면 하얗게 세어 억새처럼

서걱거릴 것을 그리도 저어한 때문일까?


-상강(霜降)쯤이면 단풍이 절정(絶頂)이지요.

내 어림짐작 알 리 없는 여인에게 던진

선문답(禪問答) 같은 말이라 어리둥절하겠지만

그것은 상강(霜降)이 쇠락이 아니라

그대 생의 가장 화려(華麗)한 한 때임을 알라는,

그리하여 여인에게 건넨

나의 위로 같은 것이었다.


-……,

-……,

-먼저 일어날게요.

두터운 침묵 깨듯 여인이 말과 함께 일어서며

가볍게 목례하고 뒤돌아 또각,또각 걸어간다.

여인이 문 열자 그 앞에서 서성거렸을

차가워진 저녁 바람이 기다렸다는 듯

틈입자처럼 밀려들어 얼굴에 닿는다.

아직 그곳에 있기라도 한 듯

빈 여인의 자리 보며 가을 추(秋)

마음 심(心) 거듭 되뇌다

문득, 작년 이맘때쯤 찾았던

천관산(天冠山) 꼭대기, 약한 바람에조차

그리도 도리질하던 억새 떠오르는 것인데

환시(幻視)였을까?

여인이 앉았던 자리에 한 잎, 두 잎

마른 잎들 떨어져 내리고

이내 수북이 쌓이는 것 같은.

상강(霜降),이라고 나직하게 읊조리자

멀리 북쪽으로부터 흰 말들이

갈기 휘날리며 힘차게 달려 내려오는 것 같은,

허옇게 입김 토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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