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의심한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가 나인지를.
기억(記憶)이 기억(記憶)을 지우고 있어요.
돌아서면 금세 잊어 나이 탓이려니 했는데
근래 들어서는 기억하려고 용쓸 때마다
기억은 점점 더 멀어지고 나중에는 머릿속이 온통 까매져요.
한 날은 익숙한 현관문 비밀번호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그 앞에 멍하니 서있었어요.
어쩔 수 없어 근무 중인 딸에게 전화해서 알아내
열고 들어와서는 어이없어하며 웃었지요.
불과 며칠 전 생일 축가 함께 불렀던 손자의
생년월일 여섯 자리였어요.
비밀번호가 정말 비밀이 되고 있어요.
더 이상 거울 보지 않으려고 해요.
날로 깊어지는 주름과 흰 머리카락 때문이 아니에요.
섭리(攝理)인 것을요
나를 보고 있는 거울 속 그 눈이 두려워요.
한 때는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했던 그 눈이
텅 빈 검은 동굴만 같아 자꾸만 아득해져요.
나주댁, 고상하고 총명했던 내 엄마
여든 해 생일 며칠 앞두고
그때껏 희미하게나마 켜져 있던
머릿속 불 완전히 꺼트리고 말았어요.
군대에서 휴가 나온 손자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누구냐 묻던 그날부터 억장(億丈)과 함께
일상(日常)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어요.
기억의 무게, 그것이 빠져나간 엄마의 몸피는
너무나 얇고 가벼워 한사코 싫다고
도리질하는 당신 가까스로 달래 씻길 때마다
지난날들이 한 움큼씩 허물처럼 벗겨져
물에 둥둥 떠다녔어요,
엄마, 미안해요, 아주 오래전
당신 손잡고 나들이 가던 나처럼
좋아라 하며 따라나선 당신을
멀고 외진 요양원에 떠넘기듯 맡겼고
그때 어쩌자고 당신은 돌아서가는 내게
그리도 해맑은 표정으로 웃으며 손 흔들어
운전하는 내내 눈물 쏟았지만 그것의 절반쯤은
무거운 짐 내려놓은 홀가분함이었어요.
그렇지만 엄마, 거듭 미안해지더라도
다시 그런 처지가 되면 다시 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한라산지리산설악산…,
기억 붙잡아두기 위해 날마다 외는
이를테면 기억의 되새김질 같은 것이에요.
순서 뒤바뀌고 헝클어져 뒤죽박죽이 되다
어느 순간 한꺼번에 무너져 더는 욀 수 없는
무서운 날 오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요.
이름이 뭐냐구요? 잠깐만요, 그렇게
느닷없이 물으시니 좀 당황스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