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나로 산다는 건
한국 소설 읽는 방에서 이번에 선정한 책은 《친밀한 이방인》수지가 주연한 드라마 『안나』의 원작, 정한아작가님의 책이었다. 드라마를 재밌게 보고 소설을 찾아봤다. 드라마는 책에서 뼈대를 가져오긴 했지만 좀 더 짧은 시간에 집중할 수 있는 사건 위주로 구성했고 책은 활자답게 훨씬 스케일이 크고 사기의 범위나 떠도는 시간도, 인물들의 내밀한 성격도 촘촘하게 펼쳐졌다. 개인적으론 드라마의 결말이, 책의 반전이 좋았다.
두 개가 완전히 다르기에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마주하는 기분이 든 것도 같다.
정한아 작가님의 다른 책도 재밌다고 하기에 도서관에서 〔친밀한 이방인〕을 비롯 몇몇 책도 같이 빌려왔다.
도서관 책인데 스마일 스티커라니;;; 그래, 눈*코*입을 안 그려준 게 어디냐.
엄마, 얼굴이 없어서 너무 무서웠어.
그래서 내가 얼굴을 만들었어. 너무 무서워!
무슨 얼굴을 한 거야?
글씨도 모르는 아이는 얼굴이 지워진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아이의 말을 듣고 보니 제목 그대로 친밀한 이방인(사기꾼을 이렇게 우아한 단어로도 표현할 수 있구나!라고 생각했다.ㅎㅎㅎ)들은 어쩌면 웃는 얼굴일 수도 빼어난 미모일 수도, 수수하고 그냥 평범한 얼굴일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수지처럼 예쁜 얼굴일 수는 없겠지. 한 번 봐도 기억할 수밖에 없으니까.
소설 읽는 방에 함께 있는 영주님께서 얼굴이 없어도 표지에서 수지가 보여서 놀랐다고 하셨다. ㅋㅋ 나도 강렬한 드라마 때문인지 다시 본 책 표지에선 바로 수지가 떠올렸다. 단아한 헤어스타일, 우아한 목선.
그야말로 그가 말한 코스프레 쇼 같았다. 하지만 그를 비난할 생각은 없다. 누구나 자기의 환상을 좇는 것이다. p52
그녀는 되도록 말을 줄였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대화를 주도하게 하면서 경청하는 식으로 질문을 피했다. 모두 그녀의 그런 태도를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성격으로 받아들였다. 그 그룹에서 이유미의 가짜 신분은 한 번도 의심받지 않았다. p110
그녀는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고, 자신이 원하는 역할을 맡고 싶었다. 그 불가능해 보이는 욕심이 그녀를 자꾸만 무리한 사칭으로 몰고 갔다. p141 (*영주님이 골라준 문장)
나는 거짓말을 하는 기분을 알고 있다. 스스로를 진실에서 배제시키고, 거짓말쟁이라고 낙인찍고, 어둡고 습한 자기혐오의 늪에 가둘 때 느껴지는 작은 쾌감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그래서 이유미에게 관심이 갔던 것이다. 우리가 동종의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호기심과 두려움이 나를 그녀에게 이끌었다. p237
세상에 거짓말을 한 번도 안 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그때의 기분, 얼버무리듯, 상황을 모면하려는 듯한 태도 조마조마하면서도 또 안 걸렸네, 하는 쾌감은 저마다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볼 때 외모나 학벌, 위치, 표정, 화법 같은 걸로 판단하면서 저럴 거야, 저런 사람이야라고 쉽게 판단하고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당연히 작은 거짓말이나 선한 거짓말을 커다란 사기랑 비교하거나 사기를 미화할 마음이 있는 건 아니다. 이유미역시 사람들 사이에서 부잣집 딸, 좋은 학벌의 귀한 아가씨로 관심받는 걸 그대로 즐기며 스스로 "아니에요, 전 그런 사람 아니에요."라고 굳이 말하지 않는다. 알아서 착각해 주고 알아서 겸손한 사람으로 호감을 가져주고 다가와주는데 왜 마다하겠는가. 그녀가 점점 한 계단씩 높은 곳으로 갈 때마다 사실은 높은 곳이 아닌 추락하는 길이었음에도 말이다.
의미 있는 존재, 원하는 역할, 불가능한 욕심
한 번도 자기 방에 있는 거울을 제대로 못 본 사람처럼 , 이유미는, 안나는, 이유상은 결국엔 M은 (모두 동일인이다) 다른 사람으로 질주한다. 그러니 결국 자기 자신은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하다. 사실 사기 치려고 허우적거리고 노력하는 부분이 가상하긴 하나, 그런 노력에서도 결국 시간당 버는 돈, 높은 위치, 의사의 부인자리, 의사까지 전부 맛본 이유미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제목처럼 매력 있지만 함부로 튀어선 안되고 친근하지만 자기 위치보다 우아하고 겸손해 보이는, 모든 요소들을 전부 연기하고 거짓된 사람을 '친밀한 이방인'이라고 하는 건 아닐까.
우리는 소설의 화자인'나'부터 중심인물인 유미, 유미의 주변 인물까지 모두 대부분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뭐 나라고 다를 수 있나. 사회적 나의 자리, 위치, 각자의 역할에서 곤란한 상황에서 '하얀'거짓말이란 표현도 있을 정도로 에둘러서 거절하거나 피할 때는 거짓말을 이용한다. 사실은 쉽게 남을 속이면 진짜 더 어려운 자기 자신에겐 결국 정체성을 밝힐 수 없는 사람, 가련하고 아무것도 아닌 내가 될 뿐이다. 화자인 '나'역시 상황을 피하고 모면했다 생각하고 철저하게 속인다고 생각했겠지만 속은 건 이미 스스로였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의 말처럼 거짓말은 냄새처럼 전부 티가 날 수밖에 없으니까.
이유미, 이안나, 이유상 뭐가 됐던 어떤 이름, 어떤 위치로도 나는 그녀가 행복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건 따라가고 흉내 내려는 노력만 있었을 뿐 '진짜' 내가 좋아하는 걸 발견하고 저절로 받아들이는 '인정'이나 진심이 없었기에. 누군가의 삶이 저 정도면 좋아 보인다, 느끼는 것과 나는 그래도 뭘 좋아할까는 분명 다르다.
내가 이걸 먹고, 이렇게 행동해서 이 음악을 들어서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이렇게 부족한 점이 넘쳐도 그냥 나인 게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한국소설 방에서는 그 뒤로도 전청조 이야기와(그녀인지 그인지 알 수 없는 그도 이 소설을 읽은 게 아닐까 싶은데?! 2017년에 나온 소설이다) 노인대상으로 물건을 판매하는 떴다방 이야기, 알면서도 속아주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졌다. 미미여사의 화차와 디카프리오 주연의 '캐치 미 이프 유캔'까지.
아, 나다움이란 결국 부족하고 결핍 투성인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부터 출발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다시, 그냥 세상 사람보다 부모님보다도 성장하면서 나를 더 많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고 살펴보고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나에겐 분명 나사 하나(하나 아니고 여러 개) 빠진 것처럼 완벽하지 않은 구석이 분명히 있지만 그걸 뛰어넘을 정도로 더 큰 나사도 채워진 사람이구나 깨닫는 과정이 우리에겐 꼭 필요할 것 같다. 내가 나에게 친밀한 이방인이 돼서는 안 되겠다.
신기하게도 오늘 아침에 배달된 글감과도 연결된 것 같아서 좀 더 오래 '나'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우선 별로 만족스럽지 않아도, 나로 살기로 결심하고 (나에겐 일단 이 두 과정은 필요가 없어서 감사했다^^)
나에 대해 '대단히' 만족해서가 아니라 나는 그냥 어렸을 때부터 내가 나인 게 재밌고 좋았다. ㅎㅎ
'나'라는 자체에 매몰되기보단 내가 꼭 해야만 하는 것, 할 수 있는 거, 좋아하는 것을 떠올려 보는 일!
삶에서 나로 살아서 감사한 것들을 제일 먼저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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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이방인/ 정한아 장편소설/ 문학동네/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