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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우리 통리 할무니

by 앤나우

할머니


할머니들은

진짜 뭔가 자꾸자꾸

주려고만 하신다

진짜 점점점점 더...


밥이 꿀맛이네,

하면

20kg 농사지은 쌀 한 가마니가

뚝딱

고추 튀각이 고소하네,

하면

어느새 기름에 바싹 튀겨진 바삭바삭

고추 튀각 한 봉지가

뚝딱


뭐 먹을 거 없나,

입이 심심하면

옥수수콘 통조림 두 개

마른미역 한 봉지

알록달록 제사 사탕까지

어디선가 내가 좋아하는 것만

쏙쏙 나오는 울 할머니 집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보물처럼 쌓아만 두시고

제대로 한번

잡수지도 못했을 귀한 음식

마트 가면 다 있다며

도로 빼는

우리 엄마의 야속한 손









*내가 어렸을 때 우리 할머니 생각을 하며 지은 동시다.


나에게 '할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이제 영주에 사시는 외할머니뿐이다. 어렸을 때 통리에 가면 할머니가 저녁을 먹고도 배고프다고 하면 언니와 나에게

-니네 배고프나? 닌징 먹을래?

빙그레 웃으시며 물어보곤 하셨다.

닌징이 뭔지 모르면서도 나는 키위 같은 멋진 외국 과일인 줄 알고


-응응, 먹을래, 먹을래! 그거 나 줘!


할머니가 가지고 온건 흙이 잔뜩 묻은 당근과 딱딱한 고구마였다. 세상에! 닌징당근이었다니, 초등학생이 알리가 있나. 그래도 그렇게 강력하게 달라고 했는데 안 먹을 수도 없고 할머니가 예쁘게 깎아준 당근을 언니랑 같이 까르르 웃으며 오독오독 씹어먹었다. 뭔지도 모르고 식탐이 많아서 다 먹겠다고 했지만 생당근을 씹어먹게 될 줄은 몰랐다. 서울에 가면 엄마한테 웃기다고 이야기해 줘야지, 이렇게 하나하나씩 추억이 쌓이는 것 같아서 행복했다. 생애 처음 밤에 야식 대신 오독오독 씹어먹는 당근은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기막힌 별미였다. 강원도의 밤은 길고 길었고 정말 추웠고 할머니 따뜻한 품 속에서 뒹굴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유난히 밤이 길고 깜깜했던 통리, 늦은 밤 아파트 앞에 그나마 길게 켜진 가로등 불빛 하나를 의지하며(*깜깜하면 잠을 못 자서, 할머니 집 안방에서 창문에 비친 그 불빛을 뚫어져라 보다가) 잠들었던 생각이 난다. 새벽에 한 번씩 깬 할머니는 우리가 추울까 봐 연탄을 한 번씩 꼭 다시 갈아주셨다. 한보아파트는 말만 아파트지 아궁이처럼 연탄 때는 곳과 서양식 싱크대가 공존하는 이상한 부엌이 있고 화장실은 또 수세식으로 한 단 높게 되어있었는데 언니랑 나는 거기서 물 내리는 걸 아주 재밌어했다. 언니랑 나는 할머니집 부엌에서 커다란 대야 같은 데다 뜨거운 물로 머리도 감고 목욕도 했다. 아주 재밌었다. 할머니는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찬물로 세수를 시킨 적도 없다. 늘 따뜻한 물을 따로 연탄아궁이에 끓여주셨다. 비록 화장실에서 힘줄 때 쭈그리고 앉아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방학 내내 할머니댁에 있는 것 자체가 천국이었으니까, 그런 것쯤이야. ㅎㅎㅎ

내내 놀고 맛있는 거 먹고, 뒹굴거리고 TV도 우리 마음대로 볼 수 있고 점심때면 할머니가 늘 과자며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 간식도 마음껏 사 먹게 해 주셨다. 어린아이에겐 천국이 따로 없는 방학이었다. 엄마나 아빠를 찾지도 않았던 것 같다. 아니,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는 생각도 안 들었다.



일본어를 배우면서 닌징이 홍당무, 당근인걸 다시 배우면서 울 할머니 생각이 났다. 나도 할머니처럼 빙긋, 웃음이 나왔다.



할머니는 마른미역 한 줌, 콘 통조림 같은 것도 우리에게 입이 심심하다고 하면 늘 간식으로 아낌없이 꺼내주셨다. 아궁이 불 때는 게 궁금해서 구경하고 내가 좀 해보려고 하면 절대 못하게 하시고 대신 연탄불에 맛있는 임연수어랑 고등어를 구워주셨다. 나는 할머니 집에서 처음으로 고등어와 삼치 맛이 다르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 생선 비린내라면 아주 질색을 해서 요리도 잘하셨지만 생선은 절대 안 구워주셨다. 삼겹살 같은 고기를 굽기 전에도 주변에 기름종이며 신문지부터 깔끔한 대비가 먼저였다.


-너희 엄마가 냄새난다고 물괴기도 잘 안 구워주제? 너네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비위도 약하고 냄새도 예민해서 생선도 잘 안 먹었다. 그거 서운해 말고 할머니 집에서 많이 먹고 가라.


매일 우리 밥상엔 바닷가 마을도 아닌데 각기 다른 생선이 종류별로 세 마리씩 나왔다.

언니랑 나는 그래서 할머니가 엄청 부자라고 생각했다. 늘 우리에겐 아낌없이 풍족하게, 더 먹으라고 계속 먹고 더 놀고 늦게 자라고 하셨다.


지금은 많이 쇠약해지셨지만 우리 외할머니는 체격이 통통하시고 건강하신 편이었다. 머리숱은 없으셔서 흰머리가 올라오기 전부터 가발을 쓰셨지만 특유의 밝은 성격답게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리시고 여기저기, 이 집 저 집에서 인기도 대단했다. 할머니 손녀딸이라고 하면 이 집 저 집 할머니들이 과자 사 먹으라고 만 원짜리를 한 두장씩 꺼내주셨는데 할머니는 우리 엄마와 달리 그 돈을 한 번도 할머니 지갑에 따로 챙기신 적이 없다. 고스란히 우리가 가져가고 원하는 걸 살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래서였을까. 늘 내 편이라고 생각했다. 아, 할머니는 늘 내 편이구나! 조건 없이, 그냥 무조건적인 내 편! 이렇게 삶에서 무조건적인 내 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다. 더군다나 그 존재가 부모님처럼 좋기도 하면서 은근히 통제하고 엄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


사춘기 때 엄마랑 엄청 싸웠는데, 그날도 뭐 때문인지 몰라도 아침에 엄마랑 대판으로 싸웠다. 그렇게 싸우고 나가면서 (등교 전에 싸운 것 같다) 씩씩거리며 눈이 빨개지도록 울고 있는데 때마침 서울 집으로 와계신 할머니가 내 뒤를 따라왔다. 아, 그래도 할머니가 나를 위로해 주시려고 따라 나왔나 보다. 걱정돼서 그러신가 보다 했는데 할머니는




나경아, 너그 많이 속상하제?
그래도 내는 니 엄마가 너무 불쌍타.
내는 누가 뭐래도 엄마 편이다.
엄마한테 고마 틱틱거리고
좀 잘해라.



세상에 하나뿐인 내 편인줄 알았건만 세상에! 내 편이 아니라니, 안 그래도 날 따라 나온 할머니 덕에 눈물이 들어가려 했는데 웬걸. 아파트 계단 앞에서 들은 할머니의 말 한마디가 눈물 버튼이 돼서 이성을 잃고야 말았다. 할머니에게도 온갖 심통이 나서 짜증을 내고 난리를 치고 오는 그날 등교 길에서 죄책감과 알 수 없는 자괴감에 눈물이 쏟아졌다. 엉엉 소리 내면서 서럽게 울며 학교를 갔다. 학교를 참, 안 갔을 법도 한데 그래도 학교는 무조건 가야 하는 곳인 줄 알았다. ㅎㅎㅎ 이상한 범생이 기질이 있었다, 하여간.


할머니, 엄마 모두 애교 있고 다정다감한 성격이 아니었다. 둘 다 손이 빠르고 대접하길 좋아하고 이웃사람들과 어울리며 맛있는 걸 나누고 좋은 물건을 함께 베풀고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했다. 따뜻하거나 살갑게 말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미 행동으로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았지만 좀 더 따뜻하게 말로도 표현해 주길 원하는 어린 나는 보글보글 끓여주는 된장찌개 하나에, 차가운 겨울 하늘에 쏟아질 것 같은 별을 바라보는 순간에 '함께 있는 것, 옆에 있는 주는 것'만으로도 사랑이라는 걸 스스로 깨달아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난 말로 전달받고 요구하고 확실한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기에 더 늦게 늦게야 그 사랑을 깨달았다. 아니면 그냥 철이 없었거나, 나도 잘 모르겠다.


엄마는 맏딸로 삼촌 세 명 모두 아빠랑 같이 서울에서 데리고 살았는데 할머니는 며느리들 집도 한 번도 찾아가지 않고 맨날 서울에 오면 우리 집에만 있었다. 삼촌도 숙모들도 전부 우리 집으로 왔다. 어느 날은 내가 물었다.


-할머니, 왜 안 가? 삼촌네 가서도 새로 이사한 아파트도 보고 거기서도 할머니 따뜻한 이부자리 펴주면 누워서 호강도 하고 좀 쉬다 오고 하면 좋잖아. 할머니는 이렇게 우리 집 와서 우리 이불 펴주고 음식만 해주고 고생하면서 가는 게 좋아?

-내는 여기가 제일 편하다. 아들보다 사위가 더 편하고, 가면 나 때문에 뭐 하나라도 물고기 하나라도 굽고 상 차리고 폐 끼치는 거 같아 불편하다. 니는 할매가 여기 있는 게 싫으나?

-아아니, 나는 할머니 계속 같이 울 집에 살았으면 좋겠어. 성적표 나올 때 할머니가 대신 혼나는 것도 좀 막아주고,


할머니에게 애교를 부리면서도 할머니는 어디 하나 마음 둘 데가 없는 쓸쓸한 분이란 생각이 들어서 조금 서글펐던 기억도 난다. 이제는 점점 말라가고 작아져서 허리가 한 줌도 안될 것 같은 할머니, 숨을 가쁘게 쉬시면서도 우리가 간다고 하면 지금도 된장찌개를 준비해 주시고 지짐이며 계란찜까지 한 상 차려 주시려고 애쓰신다. 나는 그냥 할머니가 오래오래 좀 더, 그냥 좀 더 오래 나랑 함께 하면 좋겠다. 이번 설에 친정 엄마를 모시고 할머니댁에도 다녀오려 한다. 내 소망은 부석사에 할머니랑 올라가 보는 건데, 계단이 너무 높아서 부석사의 멋진 경치를 할머니께 보여줄 수 없어서 속상하다. 할머니 손을 잡을 수 있고 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사실은 너무도 감사하고 멋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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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사이에 정말 작고 더 마르신 우리 할머니 | 할머니 집 화단에 핀 할미꽃




할머니집 화단에 핀 할미꽃이 정말 아름다웠다. 나는 할미꽃을 직접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인 것 같았다. 길을 가다가 한 두 번 봤을지는 모르지만 늘 지나쳤던 것 같다. 우리 할머니를 닮은 할미꽃. 듬성듬성 빠진 흰머리 같기도 하고 보랏빛 솜털 같은 꽃잎들이 포근하고 보드라웠다. 손녀, 손주들 중에 내가 말이 젤 빠르고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젤 살갑고 다가와서 제일 많이 수다 떤다고, 언젠가 할머니가 누군가에게 나를 그렇게 소개해주시는 걸 듣고 웃었다. 할머니께서 나에게 젤 많이 하시는 말이 바로


야야,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좀 천천히 말해라, 였으니까. ㅋㅋㅋ


효도 좀 해드리겠다고 신혼집에 초대해서 할머니한테 콩나물 밥을 했는데 물이 너무 적어서 거의 꼬들밥 수준을 넘어 설익은 느낌마저 났다. 그래도 밥을 한 공기 다 비우시고 그날 이후로 내가 한 밥은 먹으면 가슴이 답답하다며 드시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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