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장염 해방 일지
몸이 무리를 한 탓일까, 지난주 금 ·토 ·일로 이어진 영어캠프에 아이들과 나는 좀 지치긴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거기에 왕복 2시간이 넘는 거리를 차로 이동했으니 피곤할 법도 한데 긴장이 풀어지니 한 방에 피로가 몰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3일간 이어진 영어캠프를 통해 아이들도 나도 알차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태껏 캠프 중에서 가장 즐거웠고 나도 교사로는 처음 참여해 봤지만 다른 아이들과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 행복했다. 둘째만 하더라도 쉬는 시간마다 맞춰주고 놀아주는 선생님들, 누나, 형들 덕분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백번도 넘게 하고 캠프 중간 쉬는 시간에는 뻗어서 잠들기까지 했다. 얼마나 고되게 놀았으면, 안 그래도 사람들을 좋아하는 아이인데 중학교 고등학교 누나 형들도 보조교사로 함께 해주니 더 신나서 선생님들에게 매달리고 끊임없이 장난을 쳤다.
긴장이 풀어진 일요일 저녁, 집에 오자마자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축 처져있는 아이가 갑자기
아앗, 여기서부턴 조금 더러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비위가 약하신 분들은 단단 마음의 준비를!
거실 중앙에서 먹은걸 다 토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거실 중앙에 생생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흐아악! 먹은 것도 점심에 단체로 먹은 짜장밥이랑 우거지 된장국이 전부였는데 그 이후로도 먹지도 않고 엄청나게 신나서 방방 날뛰던 아이였다. 감기로 고생한 적은 있어도 여태껏 토한 적은 처음이라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밥을 먹던 신랑과 옆에 있던 선재가 먼저 눈치채서
-엄마, 선율이가 토해요! 빨리요!
라고 소리쳤고 나는 달려갔다. 누군가 아이 입에 깊숙이 호수를 연결해서 쫘악 물로 뿌려대는 속도로 부엌과 거실 경계가 난리가 났다. 뒤에서 등을 두드려주고 달랠 새도 없이 끝난 일. 그때부턴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아이가 울기 시작했고 신랑은 아이를 달래서 목욕탕으로 보낸 후, 뒷정리를 시작했다. 나는 목욕탕에 들어가서 아이를 씻겼다.
몸살기운을 동반한 장염, 감기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 뒤에 이 증상은 어제부터 첫째가 똑같이 반복하며, 바이러스성 '장염'으로 밝혀진다. T_T
하여간 이런 증상이 요즘 유행이라고 했다. 맞아, 난 이래서 겨울이, 특히 1월이 싫었지. 작년에도 요맘때 큰아이가 독감과 수족구가 함께 와서 끙끙 앓았다. 매일 땀을 흘리고 다시 눈뜨면 잠들고, 입 안에 엄청난 수포 때문에 밥 한 수저 먹기도 힘들어했다. 식은땀을 흘리고 약을 먹고 다시 이불을 꽁꽁 뒤집어쓰고 땀 흘리고 자기를 반복했다. 하루에도 땀 흘린 이불을 몇 번씩 갈아주고 빨았다.
*독감이 차례대로 신랑과 나에게도 와서 결국 둘째를 뺀 온 가족이 고생을 좀 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엄밀히 말하면 장염도 몸살의 한 종류란다. 몸이 피로하고 병이 나서 소화기관이 탈이 난 거니까. 날이 추우니 감기처럼 콧물, 미열을 동반하는 것도 물론, 엄청난 고열로 가면 좀 더 정밀 검사를 해야 하지만 대부분은 미열, 얕게 지나가는 감기 같은 증상이라 며칠은 고생해야 한다고 했다. 아이들에게(돌봐야 하는 어른에겐 더더욱 크게 느껴지는) 묵직한 한 방이 또 이렇게 소리 없이 찾아왔다.
방학이 끝나서 다시 원으로 보낼 날만 학수고대, 월요일만 기다린 먼데이 마더스 맘인데, 당장 월요일과 화요일에 도서관에서 특강 수업도 해야 하는데 어쩌지, 내가 꼭 해야 할 일들, 참여해야 할 스터디 몇 개가 떠올랐고 아이들 둘이 방학이니 잠시 몇 시간 외출은 큰 아이에게 부탁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며 우선 아이 돌보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잘 먹진 못했지만 죽을 거부 해서 소고기 뭇국에 밥을 말아주니 생각보다 잘 먹어서 뭇국이랑 밥, 어묵국과 밥 이렇게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안 매운 국물과 밥으로 아이 식사를 해결하고 컨디션이 나아져서 낮에는 가볍게 동네 산책도 하고 큰 아이 학원 근처에서 조금씩 놀기도 했다. 그러다가 일은 수요일 새벽 3시에 다시 터졌다.
새벽 3시에 갑자기 잠이 깬 선율이가 화장실로 와다다 달려가더니 배가 아프다며 울었고, 한 시간 간격으로 화장실에서 일을 봐야 했다. 설사가 시작된 거닷!!
(*중간에 이틀은 잠복 기였던 걸까) 거의 뜬 눈으로 잠도 제대로 못 잔 나는 큰 아이 학원 스케줄을 보내고 병원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께선 환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좋은 신호예요! 이제 다 나았네~
어머님, 설사하면 장염은 거의 다 나은 거예요.
…? 예?
나도 과거에 장염으로 몇 번 끙끙 앓아본 경험이 있기에, 선생님의 이런 긍정적인 반응이 의아했다. 지금 화장실을 네 번 가고 잠도 못 자고 며칠째 비몽 사몽 상태로 병원에 다시 간 건데, 아이 상태는 좋아지는 중이라고, 나아가는 중이라며 위를 달래는 약을 삼일 치 처방해 줄 테니 이렇게 먹으면 좋아질 거라고 했다. 이 약을 다 먹을 때면 다 나와서 다신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평소에도 과잉진료 없이 잘 모르는 증상에 대해선 전부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신 선생님인지라 아이도 나도 일산에 이사 온 이후로부터 쭈욱 가던 소아 청소년과 병원이다.
-아니, 선생님 그래도 항생제라든가 좀 더 강력한 약으로...
-아유, 항생제요? 지금 먹으면 더 고통스럽죠. 배가 우르릉 쾅쾅 요동치는데 더 난리 나고 힘들어요. 항생제는 절대 안 돼!
비타민을 손에 가득 쥔 아이는 진료가 끝나자 신났다고 다시 뛰기 시작했고 뭐, 좋고 다 낫는 중이라니 나도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참, 화장실에서 다 도와줘야 하는 어린 나이인지라 그게 귀찮고 힘들어서 지사제를 먹일까 하다가 병원에 물어보고 먹일 생각에 안 먹였더니 그걸 오히려 칭찬해 주셨다.
속에서 나쁜 게 이제 다 나오는 중이에요. 염증, 바이러스, 고통스럽지만 이 순간이 지나가야 하는 걸 억지로 지사제로 막으면 그게 염증이 더 굳어서 원활하게 나오기 힘들어요. 잘하셨어요. 어른이 좀 힘들다고 아이 지사제를 먹이는 경우도 많은데 약은 잠시만 멈추게 할 뿐 근본 해결이 안 되거든요. 구토하는 순간이 아이들에게 제일 힘들고 **나오는 건 뭐, 괜찮아요. 나아가는 중이다, 낫는 신호이니 그렇게 생각하시고 먹고 싶은 거 달라는 거 다 주고 충분히 물 마시고 쉬면 돼요. 너무 기름기나 튀긴 음식, 밀가루 같은 것만 좀 피하시고요.
병원을 나오면서 우리가 열이 나는 거, 배가 부글부글 화장실에 가는 신호, 구토, 전부 너무 사소하면서도 내 몸의 아픈 신호들이 어쩌면 내 안의 세균을 죽이고 몸이 낫고 있는 신호라면 *당장의 해결*을 바라는 게 아니라 우리는 이제 낫고 있다 낫는 중이다 생각하며 시간을 잘 보내는 게 어쩌면 전부가 아닐까 생각했다.
기다리는 일, 낫고 있는 중이다. 괜찮아지는 중이다, 생각하는 일.
자면서도 미열에 발개진 볼, 후다닥 몇 번이나 화장실로 뛰어가는 소리, 뒤척이는 잠자리, 아픈 중에도 아픔을 견디고 나으려고 끊임없이 시간은 흐르고 아이들은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다급하게 항생제를 찾은 내가 부끄러웠다. 사실 나도 젊었을 때 불규칙한 식습관으로(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식사를 거의 제 때 하지 못해서) 여름마다 한 차례씩 장염에 걸렸고 그때마다 떼굴떼굴 굴러서 꼭 병원에 갔다. 병원에 가지 않으면 방법이 없는 것처럼 너무 배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는데 신기하게도 응급실에 가자마자 그 순간부터 통증이 멎는듯했다. 수액까지 한 방 맞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몸에 기운은 없지만 통증은 많이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그랬기에 장염이라면 아주 끔찍했고 그걸 조그만 아이가 걸렸다고 생각하니 어떻게 해서라도 고통을 견디게 하는 게 아니라 고통이 '사라지게'해주고 싶었다.
누워서 자는 선율이가 유산균이 포함된 위장약을 먹고 누워서 이런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 벌에 쏘인 적 있잖아.
그때도 진짜 아팠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안 아픈 거 같아.
선생님 말처럼, 괜찮아졌어. 신기해!
또 토할까 봐 무서웠는데 이제는 무서운 것보다 배고파서 이거 저거 먹고 싶은 게 하나씩 생기는 아이.
라면을 엄청 좋아하는데 당분간 먹을 수 없다고 하니 새벽엔 라면을 먹는 꿈을 꿨다면서 엉엉 울기까지 했다. 세상에!
라면이 너무 먹고 싶어서 꿈에 나오기도 하는구나, ㅎㅎㅎ
그리고 어젯밤, 밤 9시 넘어까지 천문대 수업을 마치고 온 첫째 아이가 자기 방에서 커다란 하품을 하더니 선율이와 똑같이 전부 쏟아내기 시작했고 똑같은 새벽 3시에 배가 아프다며 깨서 화장실로 뛰어갔다.
너희는 어쩜, 새벽 3시, 이것마저 맞춘 듯 똑같이 ㅋㅋㅋ
휴우, 이제 잘 낫는 일만 남았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아픈 아이를 돌보는 중에 나를 한 번 돌아보게 했고 웃게 했고 좀 더 기운이 나게 했다. 좋은 의사 선생님을 만난 것도 감사하고, 아픈 중에도 먹고 싶은 음식 꿈을 꾸고 땀을 흠뻑 흘려도 다시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아이들이 있어서 행복하다.
이제 내 차례인가, ㅋㅋㅋ
심장이 쫄리는 이 기다림만 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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