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장편소설
부서진 삶을 수리하고
미완으로 남은 인간의 소망을 재건하는 눈부신 발걸음
책의 뒤표지에 이런 말이 쓰여있었다. 그래, 수리 보고서라고 하니 '수리'까진 알겠지만 눈부신 발걸음은 또 뭘까, 궁금해졌다. 책을 다 덮고서야, 아침이 밝았다는 걸 알게 됐고 (진짜 하룻밤을 꼴딱 새서 책을 읽은 것이다! 얼마 만에 이런 경험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마음속 '숙제'처럼 남은 우리의 미완성 같은 삶이, 평생 수리를 계속하고 또 해야 할 것만 같은 내 삶이, 눈부시게 느껴졌다. 어마어마한 책이구나.
대사 하나하나가 소중해서 아끼면서 읽었다는 혜은쌤의 말에도 고개가 끄덕여졌고 이제는 지성의 대명사처럼 느껴지는 영화평론가 이동진님도 '소설의 영화화를 적극적으로 고려할 것이다', '올해의 책'으로 왜 이 책을 꼽았는지 알 것 같았다.
소설은 여러 시대와 공간을 아우르는 다층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인물 간의 관계도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나는 그 점이 오히려 흥미로웠다. 역사란 언제나 반복되듯이 반복되는 구조나 대응하는 인물들을 비교해서 보는 것도 재밌었다. 역사적 시련과 개인의 고통, 이 둘을 어찌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겠냐만은 일제 강점기부터 이후 100여 년의 시간을 아우르는 동안 같은 공간, 대온실의 비밀은 우리의 상상보다 놀라운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전혀 다른 두 가지 소재, 평범한 듯 보이는 주인공 영두의 아팠던 사춘기 시절 삶과 역사적 시련 속에 자기 이름은 물론 존재마저 지워야 했던 여인(마리코)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창경궁 안에 있는 '대온실'을 현재 진행형,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든 작가의 솜씨가 감탄스러울 뿐이다. 거기엔 전혀 다른 시대, 연관성이 없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결국 그 '사람들'에 의해, 또 그들과 연결된 '이야기'를 통해 소설이 완성된다.
아, 소설이 완성되고 맺음을 한다는 건 누군가의 삶이 다시 시작된다는 거구나, 거기에 나온 인물 속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완전히 몰입됐다가 한 번도 누군가의 인생에 그렇게 온전히 들어갈 수 없는 경험을 몇 시간 동안 빠져있다가 나오면 이렇게 되묻곤 한다. 그러면 이제 영두의 삶은? 순신이와 영두의 삶은? 산아와 스미의 나무 같은 삶은? 그리고 내 삶은, 하고 결국 이야기의 청자로 시작했다가 화자에게 완전히 몰입했다가 서서히 내 인생으로 생각이 옮겨가는 게 바로 소설 아닐까. 이젠 그들의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내 이야기가 펼쳐지는 기분이 든다.
낙원하숙 / 창경궁 대온실
리사와 나 / 산아와 스미
두자와 당아줌마 (*나는 어쩐지 이렇게 떠올랐다)/
그리고 안문자 할머니 / 시미즈 마리코
역사와 시간, 인물을 넘어 물 흐르듯 연결되고 풀어지는 이야기가 놀랍도록 촘촘하고 자연스러웠다. 어린 시절의 아픈 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겁고 벅찬데 주인공 영두는 결국 아픔을 다시 끄집어내서라도,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찾아낸다. (*이 부분이 왜 이리 통쾌하던지!)
아이러니하게도 실낱에서, 바로 그 아픈 과거에서 현재의 나를 치유할 단서를 찾는다는 게 놀라웠다. 깨죽이라는 명랑한 별명을 가진 귀엽고 어린 소녀가 모멸과 모욕을 겪고도 어찌 이렇게 훌륭한 처자로 자랄 수 있었을까, 생각해 봤다.
영두 곁에는 아버지, 순신, 산아, 제갈도희, 마리코 할머니가 있었다.
문자 할머니가 '마리코'할머니로 변하는 순간 또 다른 시간의 마법이 펼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기억 속의 문자 할머니의 진짜 본모습, 그림자 같은 삶이 아니라 숨겨진 다락방 속에 꽁꽁 감춰진 진짜 자신이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는 이야기. 나는 그 부분이 무척이나 뭉클하고 감동적이었다. 그때 나에게 버팀이 되고 의지가 돼준 사람들이 그 당시는 아니지만 미래의 어느 순간 나에게 힘이 되기도 한다. 힘을 줄 때가 있다. 별 일이 아닌데, 특별한 말과 제스처가 아님에도 나를 기다려주고 내 편이었다는 '정서'하나가 우리를 성장시키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다시 마주하게 되는 대온실까지! 자연스러운 구성과 따뜻한 대사들이 와닿았다.
맞아, 좌로 우로 갈라져서 갈팡질팡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결국 앞으로, 시간에 따라, 역사처럼,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사람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아픈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당연한 삶을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그 덕분에 우리 내면의 기억들도 다시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또 이야기에 엄청난 빚을 진 기분이 든다. 행복한 빚을 매일매일 지면서 살고 싶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읽으면서 와, 이런 이야기를 나도 쓸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나도 내 이야기를 꺼내놓고 싶어졌다.
곁에 있는 사람들, 나를 가만히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눈빛으로 사람은 느리지만, 아프지만 성장할 수 있다.
기억이 정렬돼있는 게 아니듯 넘나들며 오가는 타이밍들이 때로는 아프고 따갑게, 불친절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막바지로 갈수록 점점 의문이 풀리고 환해진다. (그러니 조금 복잡해서 끝까지 붙잡고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한 공간이 아픈 기억에서 다시 환한 추억으로 회복되는 과정의 뭉클하고 감동적인 순간을 함께 느껴보길 바란다. 아픈 순간에도 '아픔'만 있었던 건 아니구나. 나는 이 자체로도 큰 위로가 된 것 같다.
마리코 할머니도, 영두도, 산아도, 스미도, 순신도, 제갈 도희도, 인정하긴 싫지만 얄미운 리사에게도 각자 지키고 싶었던 게 하나씩 있었고 그것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다.
(*그냥 한 번 이 인물들 이름을 불러보고 싶었다 ^^_)
말할 힘을 찾기 위해 보낸 시간은 길었지만 이제 별다른 상념 없이도 내가 입은 상처의 형태가 그려졌다. 그러니 그 상처에서 빠져나오는 길에서도 나는 아주 안전할 것 같았고 리사와 만나는 일도 더 이상 꺼려지지 않았다. p373 · 8장 〔얘들아 내 얘기를〕중에서
아니란다, 영두야, 그건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들이 언제나 흐르고 있다는 얘기지. … 세상 어딘가에는 지금이 아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스미와 산아가 서로 손을 흔들며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질 때 나는 완성이라고 여겼던 보고서를 다시 이어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p403 ·9장 〔대온실 수리 보고서〕 중에서
대사뿐 아니라 행동을 표현하는 비유도 곳곳에서 빛난다.
*7장 목어와 새 이야기는 시작부터 읽다가 눈물이 뚝뚝 떨어져서 몇 번을 읽다가 멈췄다. 감정이 가장 차올랐던 장이다.
"누나 배고프지?"
"너 배고프지?"
"누나 무섭지?"
"너 무섭지?"
"누나 눈물 나지?"
"너 눈물 나지?"
어린 두 남매가 서로에게 건네는 말을 가만히 떠올리다가 그냥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애절한 대사를 시작으로 7장은 마지막까지 긴장되고 숨 막히고 감정이 고조됐다. 읽는 내내 가장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역사적 사실로 나열된 기록, 같은 인물(*박목주가 그렇다)이지만 국사책에서 보듯 넘겼을 때와 누군가의 일기의 기록, 동화나 소설 같은 이야기로 접했을 때 느낌은 왜 이토록 다른 걸까. 딱딱하고 단편적으로만 기록된 한 줄의 사실이 '서사'의 숨을 만나 인물을 살아나게 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마리코가 할머니가 돼서도 세상 어딘가에 있다는, 지금이 아닌 다른 시간 속에서 여태껏 살았구나, 고개가 끄덕여졌다.
책에서 등장하는 멋진 새 마마무가 사냥을 하고 낚아채기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기다린 것처럼 우리도 진실을 향해, 성장을 향해 기다리고 기다린, 텅 비고 의미 없어 보이기까지 한 그 시간들이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대온실에서 환대받는 기분이 드는 소설이다.
이 책 덕분에 창경궁에 다시 가보고 싶어졌다. '온실' 자체로 기능할 수 있게 한 그 힘과 시간의 단단하고 유연한 힘을 나도 한 번 느껴보고 싶다. 김금희 작가님처럼 갑작스러운 비나 눈을 만나도 좋고.
그러면 나도 그 순간을 더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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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장편소설/ 창비 2024년 10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