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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중앙 박물관

9시가 돼도 나가고 싶지 않은 곳

by 앤나우

일주일을 아이들과 집에 갇혀 지내다 몸이 조금씩 회복되자마자 가고 싶은 몇 군데가 떠올랐다.


창경궁 대온실국립 중앙 박물관 '사유의 방'이었다.


얼마 전 읽은 소설의 영향으로 창경궁은 그렇다 해도 박물관이 왜 가고 싶을까, 나 스스로 박물관 덕후도 아닌데, 신기해서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토요일은 9시까지 박물관을 운영한다는 점. 나에겐 사람들이 거의 없고 복잡하지 않은 곳에서 관람을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설렌 거 같다. 최근에 우리나라에 좋은 전시회가 정말 많이 들어오고 있고 기쁜 일이지만 사람들에 쓸려 사람들 머리를 더 많이 정신없이 보고 온 경험도 있기에 나는 한적한 전시회, 미술관이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 새삼 깨달았다. 한 톤 어두운 조명 속에 조용히 혼자 있을 수 있다는 사실도 나에게 끌린다. 늘 정신없고 어수선한 삶, 겨울 방학이라 아이들과 함께였으니까.



그냥 그 시간에 온전히 몰입돼서 머물 수 있는 장소가 바로 박물관이 아닐까.



백화점에는 쇼핑에만 우선 집중해야 하니까 어디에도 시계를 걸어놓지 않는다. 심지어 해가지고 어둑해지는 것도 몰라야 하니 창문도 없다. 오로지 판매하고자 하는 물건과 친절한 미소를 지닌 직원들이 전부다. 비슷한 이유로 1층에는 화장실조차 없었는데 요즘엔 각 층마다 친절하게도 화장실이 있는 백화점이 많다. 감사해라! ㅎㅎㅎ 다른 데보다 백화점 화장실은 깨끗해서 공중화장실 쓰기를 꺼려하는 편인데 한 번씩 들르곤 한다. 또 다른 곳으로 이야기가;; 아무튼 이렇게 철저하게 상업적인 공간과 사고 싶어도 팔 수 조차 없는 귀한 유물이 있는 박물관이 묘하게 닮은 점이 있다.



물론 오래된 귀한 유물이 쌓인 보물창고니 조명조차도 훼손되지 않게 하기 위해 최소한의 빛만 이용한다. 좀 다른 이유로 창문과 시계가 없는 걸까. 시계는 몇 개쯤 걸어둬도 될 법한데 내 생각엔 시간이 멈춰 있기 때문에, 아니 오히려 과거의 먼 시간으로 흘러가서 거기에 가만히 서있기 때문에 애초에 시계가 중요하지 않은 장소가 바로 박물관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관람하는 순간만큼은 놓인 유물과 현재 거기서 그걸 바라보고 있는 내 시간에 오롯이 몰입되고 시간이 멈춘 듯하다. 일상에서 지나치고 스쳐갔을 무언가가(유물들의 실체가 사실은 너무도 평범한 것들 아닌가!) 박물관에선 너무도 진귀한 대접을 받는다. 누가 그걸 만드느냐, 썼느냐만 중요한 게 아니라 더 세세히 들여다보면 기증하고 발굴하고 만들고 기획한 사람들의 손길까지 어느 하나 쉽게 된 과정이 없을 것 같다. 여기도 어마어마한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공간임에는 확실하다! 단 조용하다는 것만 빼고. 아닌가? 늦은 시간임에도, 8시가 넘어서까지도 도슨트 체험 견학팀을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었다. 어린아이들, 어른들 팀으로 구성도 다양했다.



한 달에 한 번 심선생님과 함께
마지막 주 토요일 국립 중앙 박물관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나 말고도 여기저기 몸이 아픈 분들이 많고, 다른 관람이나 일정으로 바빠서 모이지 못할 것 같았는데 그래도 나는 왠지 박물관에 또 가고 싶었다. 역시나, 선생님께선 5시부터 혼자서라도 박물관에 있겠다고 하셨다.


아이들과 함께 모아나 2를 피아노 학원 단체관람으로 보고 박물관으로 넘어갔다. 해가 져서 어둑어둑, 야경이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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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율이도 함께 한 시간 : 엄마, 여기가 내 침대야!





일본관의 사무라이 칼이나 갑주나 노 가면, 신라 쪽에 황금 유물도 재밌어할 거라고 추천받았지만(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얼른 보고 싶어서 발이 동동, 몸이 들썩 ㅋㅋ) 아이는 역시나, 컴컴한 어두운 조명에 아예 한 군데 조차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_-;; 밝은 실감영상관(1층)조차 ㅋㅋㅋ 심드렁한 반응에 대신 곳곳에 빛나는 바닥이나 오르락내리락 계단을 더 흥미로워했다. 숨을 수 있는 장소나 이어진 기둥 같은 데서 눈을 반짝였다. 아니, 엄마가 여기 있고 싶어서 온 건데 들어와서도 보물이 아니라 이렇게 박물관 건물에만 흥미를 느끼고 머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몸이 피곤한 건지 여기저기 그냥 누워서 그냥 오늘은 나도 박물관에 발만 내디딘 걸로 마음을 위로하고 가려했는데 주말에도 밀린 업무를 마친 신랑이 잠깐이라도 그래도 보고 오라며 아이를 맡아줬다.

고마워서 절로 터지는 웃음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선생님이 계신 2층 서화관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5시에 오신 선생님께선 그 시간까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박물관을 누비고 계셨다. 나는 그냥 지나쳤을 기증관이나 귀한 작품들을 선생님 덕분에 마지막 문 닫기 직전까지 하나라도 더 볼 수 있었다.



김홍도의 새로운 그림도 있다는 이야기에, 오늘 여기 와서 김홍도라도 보고 가야 잠을 잘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드디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두근두근 설렜다. 참, 서화관을 가기 전에 만난 '사유의 방'을 빼먹을 순 없지. 여기는 박물관에 오면 내가 제일 먼저 오고 싶은 장소기도 하다.


반가사유상을 보고 내내 방방 뜨고 어수선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관람을 시작하고 싶기 때문이다. 꽤나 불편해 보이는 자세로, 알 수 없는 미소로 놓인 두 개의 반가 사유상을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포즈를 따라 해보기도 하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면서 나도 모르게 두 반가상이 함께 하는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부드럽지만 단단한 삶과 시간이 들어있는 듯하다. 그간 나에게 힘들었겠구나, 중생아, 끄덕끄덕 그냥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고 있는 듯도 했다.

(*여기선 사진을 찍을 틈도 없이 온전한 시간을 바라보는데만 집중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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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관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작품




선생님께선 내가 곁에 온 것도 모르고 집중해서 그림을 보고 계셨다. 그림에 푹 빠진 선생님의 뒷모습,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김홍도의 신선도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도화서 화원이 그린 것 같은 작품인데 너무 멋진 호랑이 작품도 감상해 보라고 정홍래의 <일출 앞의 매> 그림을 비롯 몇몇 작품을 꼽아 주시고 옆에 다른 곳을 둘러보겠다고 천천히 감상 후, 오라고 하셨다. 시간이 거의 30분가량 남았을 텐데도 여유롭게 감상을 즐기시는 모습이 멋졌다.



나는 아기자기하고 편안한 그림을 좋아하는데 도화서 화원이었던 이형록의 그림이 그랬다. 집으로 가는 겨울 행렬이 춥고 쓸쓸하게 보이지만은 않아서 복작복작한 그 광경이 왠지 좋아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거문고를 타는 이의 표정도 정겨운 인상이다. 순박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커다랗고 섬세한 손은 이미 연주에 능숙하고 편안해 보였다. 어딘가 낯익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더니 역시나, 혜진쌤한테 빌린 책 《멈춰 서서 가만히》에서도 바로 이 이형록의 다른 그림이 실렸다.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접시에 이런 그림이 있다고 생각하면 여기에 호빵도 담아먹고 과일도 담았을 때마다 내 마음이 더 즐겁지 않을까, 하는 그림을 좋아한다. 오래, 그만큼 더 가까이 두고 싶고 자꾸 보고 싶은 그림이 나에겐 좋은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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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록의 [책가도] 멋진 책꽂이다! / 멈춰서서 가만히 (정명희 지음) 중에서





이형록 그림은 좋아서 지나가면서 한 번 더 하는 마음으로 세 번을 봤다. 나도 소나무 아래, 거문고를 타는 사람처럼 나의 취미와 시간을 저렇게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고 저렇게 늙었으면 하다가, 나보다 더 젊을 수도 있기에 ㅎㅎㅎ 가까이 보니 주름 한 줄 없는 얼굴이다. 긴 수염에 속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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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가는 시간 속에서도 느리게 감상 할 수 있었던 작품들






각기 다른 매화 그림. <매화서옥도> 전기의 유명한 작품. 매화에 둘러싸인 집, 김명국의 산수화 <눈 속에 나귀 타고 떠나다>, 마지막 김수철의 <매화에 둘러싸인 집 :역시 매화서옥도이다> 같은 소재로도 저마다 다른 그림이 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놀랍다. 마지막 김수철의 그림에서 빨갛게 점으로 채색된 사람은 색 하나만 덧댔을 뿐인데 앞으로 나와서 뭔가를 기다리는 듯한 기분을 준다는 심선생님의 말씀이 와닿아서 한참을 쳐다봤다. 와, 이렇게 흑백의, 이전에 어렸을 땐 재미없다고 지나쳤던 서화에도 놀라운 매력과 비밀이 있구나! 오래되고 퀴퀴한 시간의 흔적이 여실히 느껴지는 흔적 속에서도 저마다의 매화는 담대하고 섬세하게 아름답게 피어있는 듯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자연에서 유유자적하는 느낌, 찾아가는 느낌, 붓 하나로 이뤄낸 마법 같은 일이다. 전기의 <매화초옥도>도 실제로 보고 싶다.


그림책 속 사진으로만 봤던 강세황이 70세에 자신을 그린 자화상을 직접 보는 영광도 누렸다. 꼿꼿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눈빛, 옥색 도포는 흐리지만 눈빛은 빛나고 있었다. 심사정 그림이냐, 아니냐로 더 풍부한 이야기를 뻗어 나갈 수 있었던 도화서 화원의 습작품인듯한 호랑이 그림! 이야기가 풍부하게 담겨있고 재밌다. 김홍도의 호랑이 그림을 후에 찾아서 읽어보니 더 재밌었다. 마지막은 추사의 글씨, 한글로 만나니 더 반가웠다. 한자는 뭔 말인지 못 읽었을 텐데 읽을 수 있는 구절이 나온다는 것도 반갑고 제주도 유배 중 아내에게 보낸 편지글이라 한글로 썼다는 걸 알았다. 편지의 글씨뿐 아니라 내용도 다정하다. 평범한 안부 속에서도 가족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홀로 고생하고 있을 아내에 대한 애틋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글씨 하나도, 편지 하나도 유물이 되는 공간, 추사의 글씨가 아니라 그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라 더 좋았던 것 같다.

나는 그림도 글씨도 뭐가 어떻고 기법도 하나도 모르지만 조금씩 가만히 빨려 들어가고 있는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모든 게 다 좋은 게 아니라 그중에서 나에게 말을 걸고 다시 손짓하고 한 번 더 지나치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 것 같은 작품들을 발견하는 일은 즐겁고 놀랍고, 새로움을 선물해 준다. 왜 좋았는지 뭔가 와닿는 것을 좀 더 기록하고 찾아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박물관 덕후가 되고 싶다.

장염이 나았다!


▶ 김홍도의 신선도와 도자기는 말 꺼낼 틈도 없었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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