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보다 먼저 깬 아이를 바라보는 표정은
아침마다 그림과 이야기를 한 편씩 보내주시는 심선생님 덕분에 나만의 '모닝 갤러리'가 생긴 기분이 든다.
오늘 만난 화가는 메리 카사트, 월요일마다 함께 읽는 책, [ Gateways to art : 예술가의 관문]에서 그림 한 편을 본 적 있기에 오오, 이 화가 했지만 이렇게 놀라운 비밀이 숨어있을 줄이야. 때론 그림 한 편 보다 화가들의 이야기가 영화나 소설처럼 흥미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리고 삶의 한 부분일지도 모를 화가에 대해 조금 알게 되면 그림이 다르게 보인다. 아무 감흥 없이 읽어 내려가고 봤던 그림이 새롭게 다가오는 날이었다. 심선생님께선
사람이 눈이 참 보물이에요,
한 번 본 걸 또 봤을 때 기억하고 찾는 걸 보면.
ㅎㅎㅎ(여기에 언제나 웃음을 덧붙이신다)
사람의 눈이 보물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해주시는데 나는 어쩐지 이 말이 참 정겹게 들린다. 한 번 봐도 까먹고 스치고 지나가는 것도 많은 세상에서 신기하게도 '나만의 시간'으로 간직한 순간, 시간에 봤던 건 아주 짧게 스쳐가더라도 또 기억해 내는 게 사람이니. 그림을 잘 모르지만 미술사 책을 읽으면서, 화가의 생애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그림을 하나하나 보는 게 다르게 다가오고 특별하게 느껴졌다.
지난 시절 나는 단순히 미술관,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그림에 담긴 이야기를 찾아가고 상상의 나래를 펼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메리 카사트 Mary Stevenson Cassatt (1844년 5월 22일 ~ 1926년 6월 14일)
미국의 화가, 판화 제작자
미국의 화가이자, 판화 제작자이다. 그녀는 피츠버그 펜실베이니아의 매우 부유한 집안과 좋은 환경 속에서 유년을 보냈다. 그녀의 집안은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에 반대했으나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그림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엔 전문적으로 화가가 되기 위해 그림을 공부하는 여학생은 극히 드물었다. (여학생들은 누드모델을 쓸 수도 없기에 오로지 추측과 상상으로만 그림을 그려야 했다) 인생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 드가를 만나 친분을 쌓게 되고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전시회를 갖게 된다. 그녀의 작품들은 대다수가 여성들의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일상생활을 담고 있으며 어머니와 자식, 모녀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다.
내가 읽은 기사는 이거였는데 올케, 시누이의 다른 관점으로 포문을 여는 이야기가 재밌어서 아침드라마 보듯 푹 빠져서 읽었다. (사실 아침 드라마를 찾아보진 않습니다만;; ㅎㅎㅎ '나만의' 모닝 갤러니까요!)
그러면서 카사트는 알게 되었습니다. 누가 봐도 부족할 것 하나 없는 로이스(올케)가 자신을 보며 좌절감을 느껴왔다는 사실을요. 카사트(시누이)가 들려주는 파리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로이스는 그림 같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자신의 평화로운 삶이 지루하게 느껴졌습니다.
가족에 매여 있는 로이스와 달리 카사트가 주체적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점도 부러웠습니다. 사람들은 로이스를 누군가의 조카, 딸, 아내, 어머니로만 기억했습니다.
하지만 카사트는 언제나 카사트였습니다. 로이스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카사트를 질투했습니다.
그건 사실 카사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사트도 로이스를 부러워했습니다. 프랑스 미술계에서 배운 신랄한 말투로 일부러 로이스의 신경을 긁곤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결혼 대신 미술을 택한 걸 진심으로 후회한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 *출처는 여기 (위의 기사와 동일)
이 부분을 읽는데 갑자기 마음이 울컥해지고 이상했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서로 다른 여성들의 모습에서 '그냥 좀 안 맞네', '스타일이 다르네'하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더 깊은 속내의 본질이 나오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두렵고 떨리면서도 애잔한 마음이 든다.
주체적으로 자기 삶을 당당히 살아온 멋진 화가의 모습도 있지만 사실은 남성들만이 추앙받고 대우받는 세상에서(여성은 투표에 참여할 권리조차 없던 시대였으니!) 홀로 고군분투했을 외로움과 쓸쓸함이 오죽했을까. 가장 의지했던 친언니의 죽음은 또 어떻고...
그녀의 올케였던 명문가 집안의 로이스 뷰캐넌(*그녀는 15대 대통령 제임스 뷰캐넌의 조카였다고 한다)도 마찬가지다. 지고지순 현모양처, 모든 걸 갖추고 희생하는 어머니, 또 사랑스러운 아내의 본보기 같은 모습이지만 그 안에 외로움과 슬픔이 없었을 리가 없다. 자유분방해 보이는 시누이가 철없다가도 멋있게 보이진 않았을까. 언제나 자기 이름으로 오롯이 불릴 수 있는 한 존재가 부러웠을 것도 같다.
내가 책에서 본 그림은 이 그림이었기에 잘 몰랐는데
이때는 친숙한 벽지나 가구, 아래 깔린 카펫의 무늬 같은 걸 봤던 것 같다.
그림을 죽 보다 보니, 세상에! 너무 내 표정 같은 부분들이 와닿아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이를 안고 있는데 이토록 심드렁한 표정일 수 있을까!
두 번째 든 생각은, 아이랑 있다고 늘 웃어야 할까? 웃고 있진 않지만 무표정하고 지쳐있지만 누구보다 아이가 떨어질세라 꼭 쥐고 있는 엄마의 두 손이, 포개진 양손이 눈에 들어왔다. 놓치면 떨어지고 내 아이가 다치니까.
인위적이지 않은, 현실적이고 그 부분이 친근하고 따뜻하게 와닿았다. 나보다 먼저 잠에서 깨서 뒤척이는 아이의 표정을 보는 내 눈빛도 저러지 않을까? 무거운데도 자꾸 앵기는 아이의 몽글몽글 부드러운 촉감을 느끼고 있으면 너무 사랑스럽다가도 무념무상이 되곤 한다.
누군가 내 일상의 매 순간을 눈으로 좇아주고 기억해서 그려준다면 그건 이런 모습이겠구나. 애정이 담겨있다. 나는 절대 그녀들의 화가 나거나 성난 게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다.
그저 좀 피로하고 휴식이 필요하고 자기 시간이 허락됐다면, 하는 마음은 들지만.
어쩔 수가 없다. 엄마도 사람이고, 역시, 한 사람인 것을. 아이를 안고 바라보는 순간 매 순간이 반달눈, 화사한 별이 총총 박힐 수는 없다. 그럼 엄마의 눈이 반대로 빛나는 순간은?
세 번째 그림 《극장에서》처럼 무대를 바라보고 집중한 눈처럼 자기도 좋아하는 뭔가를 찾아가고 발견했을 때, 그걸로 기쁨을 느끼고 누리는 순간이 아닐까. 아이와도 잠시 떨어져서 온전한 내가 되는 시간, 그런 시간이 엄마들에게 좀 더 많이 생기길 바라본다.
나는 심드렁한 무표정 엄마와 뺨이 통통하고 귀여운 아이 그림이 가득한 카사트 그림이 친숙하고 애정을 담아서 그려진 그림처럼 느껴진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물론이고 피곤해 보이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또 삶을 감당했을 여인들의 모습에 내 마음도 온통 빼앗겨버렸다. 그림 속 모델이 아름답게 모델처럼 이쪽을(관객을) 쳐다보지 않아도, 자신의 미를 과시하지 않아도, 화려하지 않아도 오히려 그래서 더 좋다. 일상에 스며들어 아이와 체온과 체온을 마주하는 순간도, 언제나 우리 모두 각자가 삶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꽉 안아준 양 손, 두 손의 연대에서 아이들을 향한 단단한 애정을 느꼈다.
***나의 보물 같은 눈은 아이들이 다 잠든 후, 글을 쓰는 이 밤에 고양이처럼 빛이 난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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