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엄마는 여기 살아
선재를 잠깐 배웅해주러 단지 앞까지 나간 사이에 선율이가 깼다. 혼자 집에서 깼을 때 아가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나도 그 기분을 안다. 어렸을 때 잠깐 눈을 떴을 때 낮잠 잔 사이에 윗집으로 마실 간 엄마가 눈앞에 안 보여서 크게 으앙 하고 울었더니 후다닥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선율이도 그렇게 엉엉엉 내가 올 때까지 하염없이 울고 있었겠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훌쩍거리며 달래고 안아줘도 좀처럼 아이의 감정은 가라앉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안고 토닥토닥
선율이 많이 무서웠다 그치, 엄마가 아가가 푹 잠든 줄 알고 나갔는데 말도 안 하고 나가고 나빴네.
엄마, 맘마 꼬기 밥 배 고파.
그래 맘마랑 꼬기도 얼른해서 먹자.
엄마, 형 학교?
응, 그럼. 형은 학교 갔지.
아빠는 회사?
응 아빠는 회사 갔어.
엄마? 엄마는!!
그래. 엄마는 뭐 하는 사람이지 그름? (이쯤에서 나만 출근하고 갈 때가 없었네 하는 현타가 왔다.)
엄만 집에 살아, 엄마 여기 살아.
그래, 엄마는 집을 지키고 이렇게 아가 옆에 있어주는 거 그게 지금 바로 나의 자리인데 나는 이 자리에 없었으니 네가 얼마나 서운했을까. 아이는 계속해서 엄마가 집에 살아야 한다고 반복했다. 감정 실린 목소리는 '집'을 강조하는 듯했다.
나는 너를 비롯, 네 형이 태어나던 순간부터 십 년간 여기에 묶였다는 생각에 얼마나 많이 울고 갑갑해했던 걸까. 내 공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얼른 나가고 싶기도 했던 공간이 되기도 했던 이 집. 새벽같이 신랑이 출근을 하고 아침 일찍 큰 아이가 등교를 하고, 나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낸 둘째가 마지막으로 등원을 한다.
집은 내가 지켜야 하고 아이들이 올 때 밖에서 일하고 돌아온 신랑이 퇴근할 때 밝게 맞이해줘야 할 공간이기도 하지만 나는 가끔 아이들도 신랑도 나를 밝게 맞이해주는 상상을 해본다.
나의 어린 시절은 어땠지? 부지런한 엄마 덕에 도마질 소리가 탁탁탁 경쾌하게 들리는 아침, 구수하고 따뜻한 국물이나 찌개 냄새로 눈을 뜨고 지각 전에 부랴부랴 아슬아슬하게 집을 나서곤 했는데 돌아오면 엄마가 맞아 준 기억은 별로 없다. 엄마는 아빠랑 같이 늘 맞벌이로 뭔가 일을 하셨고 한 번도 쉰 적이 없으셨다. 가게에서 장사를 하기도 했고 미경이이모랑 같이 오락실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런 탓에 나는 학교 갔다 올 즘에 집에서 엄마가 웃으며 문 열어주는 상상을 종종 하곤 했다.
어서 와, 어서 와, 밖에 많이 추웠지?
문도 열어주고 인사도 건네주는 상상. 하지만 진짜 엄마가 돼 보니 그런 나의 마음이 얼마나 이기적이었을까 깨닫는다. 엄마라는 존재가 하루종일 남편과 자식을 기다리고 음식을 하고 방을 치우고 집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나에게 그렇게 엄마가 채워지길 바랐구나,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생각해 봤다.
항상 어딘가 마실을 가거나 일을 하러 바삐 나간 엄마가 없는 오후, 저녁을 언니와 둘이 보내야 했고 그 시간들이 사실은 어딘가 조금 허전하고 외로웠던 것 같다. 더더더 어린 시절에는 엄마가 늘 집에서 전기 그릴에 팬케이크도 구워주고 간식으로 라면을 끓여서 베란다에서 나눠먹기도 하고 수다도 떨었던 것 같은데 뭔가 그런 기억은 나에게 너무도 짧고 스쳐간 기억이 됐달까. 그 스쳐간 아가 시절, 유년의 기억이 아주 좋았나 보다. 그렇기에 그 시절 그때 모습이 자꾸 생각나고 그리워서 나 역시 아이들 옆에 꼭 붙어 있고 싶은 동시에 조금이라도 늦거나 내가 잠시 잠깐이라도 없는 시간엔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게 앞섰다.
내내 일을 쉰 적 없는 내 친구는 연달아서 삼일을 쉬니 큰 아이가 오히려 불안해했다고 하던데, 엄마가 이제 아예 직장에 안 나가나, 계속 집에 있어야 하나 하고. 저절로 크는 시기엔 사실 엄마랑 꼭 붙어있을 필요는 없겠지. 그래, 언젠가 아이들은 점점 크고 자라고 사람은 누구나 최종적으로 '독립'을 꿈꾼다고 하니까.
선율아, 선율이가 엄마 찾고 도움이 필요하고 무섭지 않을 때까지 엄마가 옆에 있어 줄게. 엄마랑 선율이랑 아빠 형아도 모두 여기 살지, 맞아. 세 명이 모두 떠나고 난 뒤에도 엄마는 여기에 있어. 여기가 엄마 공간이네. 그럼 엄마도 더 즐겁고 편안하게 있어야겠다. 엄마는 '집에 사는 게' 좋기도 하면서 어떤 날은 갑자기 갑갑한 마음도 드는 거 같아. 이상하지? 엄마도 그래서 *우리 집*을 떠올리면 문 열어주면서 반겨주는 선율이, 선재, 그리고 너네 아빠의 환대를 상상하면서 즐겁게 웃고 싶어. 도어록의 비밀을 알아서 선율이가 형아처럼 비밀 열쇠를 풀어서 혼자 들어오는 날엔 엄마도 조금 더 나이 들어 있겠지. 그때 선율이도 우리 가족이 '함께' 있는 공간이라는 것만으로도 무서워하지 않고 가장 편하게 쉬고 "집"에 머물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