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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나우 Feb 24. 2023

피노키오

판의 미로에서 살아남은 나무 인형


-피노키오, 내 아들, 내 아들 일어나 피노키오 그래, 지난번처럼 눈을 떠. 넌 괜찮으니까. 내 소중한 아들, 너 아빠 보이니? 너 살아있지? 아빠는 네가 필요해. 
*제페토 앞에 푸른 요정이 나타난다.
-제페토 영감님, 난 그저 당신에게 기쁨을 주고 싶었어요. 
-네 주셨어요. 기쁨을 주셨어요. 너무 안타깝고 애처로운 기쁨을요. 이 아이를  제발 저에게 돌려보내주세요.
-당신을 살리려고 피노키오는 인간 아이가 됐어요. 진짜 인간 아이는 돌아오지 않아요.
-그건 나도 알아요. 안다고요. 하지만...


40명 넘는 스텝들이 15년 넘게 만든 작품. 미니 단추 하나도 사람 단추처럼 표현한 정교함, 런덜*포틀랜드* 과다할라 세 곳을 연결해서 끊임없이 접촉하고 매달린 결과물. 아웃사이더가 그 어떤 캐릭터보다 공감된다는 감독. 진짜 자기가 평범한 소년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말이 거짓말이 되어 무시무시한 나뭇가지가 삐져나온다. 코가 점점 자란다. 기분이 이상하다. 이상해, 피노키오는 진짜 어린 남자아이가 맞는데, 내 눈에도.

아. 평범하진 않을지도 모르겠다. 감독의 말처럼 이게 옳은지 저게 그른지 궁금해하고 세상에 순응하는 게 아니라 직접 뛰어든다. 동화를 뛰어넘는 상상력, 동화보다 더 현실적이어서 아픈 이야기 피노키오, 꼭두각시 인형 피노키오-하지만 피노키오만 유일하게 줄이 달려있지 않은 걸- 이 노래가 더 슬프게 느껴지는 피노키오. 피노키오 이야기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을 좋아한다. 피터잭슨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통통한 체형과 얼굴까지. 귀여운 외모와 달리 영화는 암울, 우울, 판타지 그 자체다. 괜히 크리처물의 대가라 불리는 게 아니다. 톨킨 원작의 반지의 제왕, 호빗이란 영화를 각각 찍었으니 피터잭슨과는 또 하나의 연결점이 있기도 하다. 그를 처음 좋아하게 된 영화는 미라 소르비노가 나오는 '미믹'. 어렸을 때 토요 명화로 본 미믹은 '불가사리'만큼 재밌게 본 기억이 난다. 제한된 공간, 알 수 없지만 소리에 민감한 괴생물체, 배수진을 친 상황에서 탈출하려고 머리를 짜내는 주인공들 어차피 해피엔딩이란 걸 알아도 그 과정이 지리멸렬하지 않다. 자꾸만 응원해서 꺼내주고 싶고 같이 막 탈출 하고 싶어 진다. 여기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꼬마가 흰개미와 사마귀의 합성 유전자로 만들어진 '유다'의 소리를 모방할 땐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자폐 성향으로 민감한 덕분에 이상한 존재를 눈치 채지만 숟가락으로 경쾌한 쿵 따라 닥따 삐약삐약 같은 소리로 벌레의 울음소리를 따라 한다. '츄이'라는 이 아이는 앞에 무자비하게 죽는 두 꼬마와 달리 목숨을 건진다.(지금 다시 본다면 그 소리는 쿵 따락 삐약은 아닐지도 모른다.ㅎㅎㅎ) 

 판의 미로는 지금 찾아보니 관람 등급이 15세다. 하긴 이 영화도 내가 20대 후반에 짬뽕을 시켜 먹으며 PC방에서 봤으니. 그냥 별생각 없이 남자친구가 '내 스타일'이라고 추천해 줘서 봤다가 짬뽕 먹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영화에 푹 빠지고 말았다. 맛집 짬뽕이었지만 영화가 너무 재밌고 잔혹하고 슬퍼서 짬뽕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잔인, 잔혹한 장면이 곳곳에 나온다. 얼마 전에 다시 보고 싶어 10살 아들과 잠깐 봤다가 

재밌어! 근데 계속 이렇게 무서워?

라고 묻는 아들 때문에 관람등급을 후다닥 확인했다.(이제 막 재밌기 시작한 두 번째 열쇠에서 영화를 끊어서 미안해 선재야) 공상, 판타지 세계가 아닌 스페인 내전 속 '현실'이 훨씬 잔혹하기에 진짜 총으로, 칼로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장면이 영화 후반부에 계속 나온다. 나는 괴기스러운 판의 얼굴을 보는 건 조금도 괴롭지 않았지만 총과 칼이 나오는 장면엔 어른인 나도 움찔 거리는 걸.


이번 겨울 방학에 아이와 넷플릭스로 영화 두 편을 재밌게 봤는데 한 편은 마틸다고 또 다른 작품이 바로 이 피노키오다. 극과 극, 분위기도 등장 인물도 전혀 다른 작품이지만 하나에 꽂히면 최소 3~4번 이상은 집중해서 보는 아들 덕에 나와 4살 둘째 아이도 여러 번 볼 수밖에 없었다. 

엄마 같이 봐요, 이 장면이 최고야, 재밌어! 엄마도 보면 분명 반할걸?

같이 보자고 나를 꼬시기 위해 틀어준 장면이 하필이면 노래를 시작하려는 귀뚜라미 세바스티안이 문 여는 피노키오 손에 눌려 노래도 멈추고 노래는 시작도 못한 장면이라 뭐야? 했는데 어... 어..., 자꾸자꾸 보다 보니 이거 정말 멋지잖아? 그제야 감독을 찾아보니 기예르모 델 토로였다. 작품은 실사도 아니고 2D나 3D애니메이션도 아닌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태껏 바온 유명한 아드만 스튜디오의 월레스 앤 그로밋, 핑구처럼 귀염뽀짝한 느낌의 스톱모션이 아닌 나무의 결 그대로를 살린, 죽어간 아들 앞에서 비통하게 늙고 초라해진 그 모습 그대로를 담은 현실적인, 좀 더 예술적인 스톱모션이라고 해야 하나.(나는 월레스 앤 그로밋과 핑구의 엄청난 팬이다. 그 두 작품에 예술적 요소가 전혀 없다는 건 아니다.) 

1차 대전이 주요 배경이 되고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 아래 피폐해진 사람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줌으로 전쟁과 독재에 대한 날카로운 우화 같기도 하다. 아, 물론 피노키오의 등장 만으로도 어마어마한 판타지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카를로 클로디의 원작 '피노키오'는 절대 아니라는 말씀. 둥글둥글 귀여운 캐릭터가 나오는 디즈니 만화 피노키오랑도 완전히 다르다. 디즈니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실사 피노키오와도. 사실 우리가 익숙한 얼굴도 바로 1940년대 나온 월트 디즈니 만화 속에 등장하는 피노키오의 둥그렇고 귀여운 얼굴이다. 


이런 법이 어딨어요? 베푼 만큼 받는 게 세상 이치라면서요. 피노키오한테 배운 게 있어요. 저한테서 배운 걸 곧바로 다시 가르쳐 주더라고요. 왜 그런지 알아요? 피노키오는 착하기 때문이에요. 

자자, 우리도 배운 걸 다시 복습하듯 이 영화를 찬찬히 뜯어보자. 




아이와 함께 본 델 토로 식 피노키오는 그럼 뭐가 가장 달랐을까. 

-생각할 거리와 떠오르는 질문을 정리해 봤다. 본 걸 다시 알려주고 싶어서. 나도 착하게 살고 싶다. ^^ 벗트. 하지만

당연히 온통 스포일러다.

*세계대전으로 인해 하나뿐인 아들 카를로를 잃고 제페토가 슬픔에 빠졌다. 신기하게도 원작자 이름도 카를로인데 제페토 할아버지에게도 사연이 있다. 학대받는 원숭이 스파차투라(원숭이)에게도 관찰자로 나오는 멋진 귀뚜라미 세바스티안에게도 사연이 있다. 작년 여름에 재밌게 본 우리들의 블루스처럼 모두가 주인공이다. 

*푸른 요정 말고 죽음의 요정도 등장한다.

꼭두각시 인형 피노키오 나는 네가 좋구나, 파란 머리 천사 만날 때면 나도 데려가주렴 이 노래를 좋아했는데 여기에 나오는 파란 머리 천사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 A.I에도 한 번 더 등장해서 피노키오 같은 A.I 어린 데이비드의 꿈을 이뤄주기도 한다. 요정만 알려 주기엔 세상이 너무 달콤해서일까. 나무, 목각인형이 죽지 않는다는 설정 때문인지 피노키오 앞에 죽음의 신도 등장한다. 이 죽음의 신 동생이 바로 푸른 요정이고 뭐 관계가 좀 복잡하게 돼있는데 동전의 양면성처럼 둘은 맞닿아있고 또 요정치고는 아이가 비명 지를 정도로 무서운 외모를 가지고 있다. 둘 다. ㅋㅋㅋ처음에 나도 물어봤다. 

아니 대체, 누가 착한 요정이라는 거야?

하지만 누군가를 애처롭게 여기고 도와준다고 해서 죽음을 도맡는다고 해서 착하고 나쁘고를 정의할 수 있을까? 오히려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진짜 '삶'을 알게 해 준 건 죽음의 요정 같기도 한데 이 부분을 아이와 함께 이야기해보면 더 풍부한 감상이 될 것 같다. 

> 인간의 유한한 삶. 피노키오는 여러 번 죽었다 다시 살아나도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소나무로 만든 작은 나무소년아, 태양과 함께 깨어나서 땅 위를 걸어 다녀라. 아빠의 아들이 되어 모든 날을 빛으로 채워라. 그러면 아빠는 외롭지 않을 거다. 
-피노키오, 내 아들아, 아빠는 널 네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바꾸려고 했어.  이제 넌 다른 누군가가 되지 말아라. 카를로가 되지 말아라. 그냥 이대로 피노키오로 있어주렴. 아빤 널 사랑한단다. 있는 그대로의 널 아빤 사랑한단다.
-그럼 전 피노키오로 있을 테니까 저의 아빠로 계셔주세요. 그래도 되죠?

*피노키오를 처음엔 사랑하지 않은 제페토도 놀랍다. 자기가 죽은 아이의 염원을 담아 만든 인형임에도 그 기괴함에 놀라고 비명을 지른다. 아주 현실적이다. 나 같아도. 삐걱삐걱, 나뭇결 그대로 걸어 다니는 모습에 놀라고 나자빠 질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부분 때문에 또 감동이 생긴다. 사람들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서도 점점 피노키오를 '귀여워하고', 있는 그대로 모습을 '사랑'해 주는 제페토의 모습은 진짜 사람 같다. 자기의 소중한 아들과 똑같길 바랐지만 사실 피노키오는 '피노키오'그대로 더 사랑스러운 아이인 걸. 마지막 대사를 들으면서 같은 부분에서 얼마나 펑펑 울었는지 모르겠다.

> 아이에게 말해주면 좋겠다. 엄마는 있는 그대로 널 제일 사랑해. 

*피노키오는 그냥 피노키오다. 사람으로 변하지 않는다. 델 토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이 그렇듯이 환골탈태는 일어나지 않는다. 피노키오조차도. 살아났지만 그냥 피노키오 그대로다. 헬보이가 자신의 뿔을 잘라내도 그냥 헬보이듯이, 쉐이프 오브 워터에 나오는 괴생명체가 대단한 능력을 지녔어도 자신의 모습을 단 한 번도 바꾸지 않은 것처럼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왕자님 모습이 '야수'그대로였어도 벨은 계속 왕자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나는 사랑스러웠다. 러닝타임 117분 동안 목각 인형 얼굴에 정들었는지 그 얼굴 그대로 남아 있어도 귀가 떨어지고 상처 입고 갈라져도 나는 피노키오가 처음보다 더 사랑스러웠다. 

> 피노키오는 진짜 사람이 됐는데도 왜 사람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우리 아이 대답은 이랬다. 

진짜 사람 아니에요? 나중에 피노키오도 죽겠죠?


피노키오는 세상으로 뛰어들었고 세상은 그 아이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답니다. 그 아이도 나중에 죽을까요? 아마 그럴 테죠. 일어날 일은 모두 일어나고 우리는 모두 떠나요.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흐르는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이렇게 끝내는 영화도 있구나. 

일어날 일은 모두 일어나고 우리는 모두 떠난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평론집에 나온 글이 생각났다. 이 글로 마무리를 하면 더 좋을 것 같다.




이 결말이 뜻하는 바가 절망인지 희망인지를 묻는다면 나는 희망이라고 말할 것이다. 삶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지난 시간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김연수의 단편소설 '벚꽃 새해'-(사월의 미, 칠월의 솔-문학동네, 2013년)의 전언이기도 하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신형철)중에서


*사진 출처 : 길예르모 델 토로 피노키오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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