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나우 Feb 22. 2023

커피 너란 사람은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지만 나와 개인적 추억이 더 많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어디에서든 금방 섞여 버리는 낭창한 아가씨 같지만 네 속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여기저기 섞여있어도 네 고유의 본성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라비카, 로부스타, 리베리카, 수프리모, 산토스, 블루마운틴,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따라주 등등 이런 멋들어진 이름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건 무수한 너의 고향과 동료들을 말하는 것 중 단 하나일 뿐. 너에게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한 종류가 될 뿐이다. 너는 꽤 여러 개의 이름으로 나뉘고 불리고 사람들마다 정의도 다르지만 누구에게나 개인적인 추억을 가진 친구, 멋들어진 애인이 되고 장소가 어디건 편안함을 준다.


코 끝만 갖다 대도 벌써부터 올라오는 향긋하고 편안한 향, 과일향도 아니지만 누구나 '너라고'느낄 수 있는 묵직하게 퍼지는 향으로 자꾸 돌아보게 만든다. 존재감만으로 사로잡긴 힘든데 딱딱한 네가 모두의 일상이 돼서 곳곳에 함께 하고 있는 친근함 마저 너의 매력이 된다.  향기로 먼저 잡아끌고 입을 댄 순간 쌉쌀하지만 새콤한 듯 가볍게, 피칸과 아몬드 땅콩 같은 견과류에서만 느낄 법한 고소함까지 입 안 가득 선물해 준다. 도저히 한 잔 만 마실 수 없다.


여기저기 섞여 잘 어울리는 핵인싸 스타일의 가벼운 친구 같다가도 가득 부은 물에 네가 ㅡ 한 방울만 들어가도 너는 이렇게 불리지. 

'커피' 


한 때는 임신으로 널 못 먹어 눈물을 글썽인 적도 있었다. 너랑 향기, 색과 맛이 꽤나 그럴 듯 비슷한 오르조를 타서 먹어봤으나 오르조는 끝내 네가 될 수 없었어. 카페인이 제로였거든. 보리차, 둥굴레차, 메밀차까지 모두 좋아하지만 '로스팅'이란 말이 들어가는 건 너밖에 없거든. 그래서 네가 더 고유하고 애틋한가 보다.


주연이 소개로 알게 된 개웅산 드립 하우스(개*드*립)에서 처음 예가체프 드립 커피도 마셔보고 아인슈페너가 유행하기 전, 아인 슈페너를 만나게 됐지. 쓰디쓴 커피 아래 엄청 달콤하게 다시 가공된 크림이라니, 와, 이건 정말 미쳤다. 하지만 이렇게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사람과는 절대 엮이고 싶지 않은데 너는 자꾸만 어울리고 싶어 진다. 시그니처란 말도 어때, 나처럼 너를 제일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거야. 동경이니, 블루 마운틴이니, 유명하다는 카멜에서도 전부 아인슈페너를 마셨어. 진하고 묵직한 커피가 깔리고 그 위에 가게 특색이 잘 드러나는 고유의 휘핑이 올라가 있는데 그게 어쩌면 각각의 개성을 잘 드러내서 시그니처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특별한 날만 먹었던 엑설런트, 투게더를 제일 맛있는 부분만 반반 섞어서(사실 전부 다 맛있지!) 쓰디쓰게 무겁게 떨어진 네 위에 툭 올려 넣는 거야. 잘게 부숴놓은 피스타치오나 아몬드가 올라갈 때도 있고 코코아 파우더를 뿌리거나 그냥 크림 그 자체로 나올 때도 있어. 나는 그 자체로 후루룹 아래 깔린 커피를 기분 좋게 살짝 씁쓰레하게 마시다가 나중에는 여러 번 돌려서 섞어 먹는 걸 좋아해. 적당하게 간(?)이 베기까지 커피와 크림 양 조절이 중요하거든. 우울한 날에는 위에 올라간 크림만 잔뜩 먹어도 되고. 돈이 없는 날에는 아포가토를 시켜서 카페에서 따뜻한 물 한 잔을 달라고 해서 한 두 방을 따뜻한 물에 똑똑 너를 퍼뜨리는 거야. 그럼 한 잔은 아메리카노로, 달달 아이스크림과 섞인 아포가토는 친구와 맛있게 퍼먹기도 했지. 이런 소소한 추억거리가 되는 너만 한 디저트가 있을까. 남자들은 대부분 널 안 좋아해서 나는 혼자서, 기분 좋은 친구들과 마신 기억이 더 많아.  커피타임은 절대 불편한 사람과 할 수 없지. 어색한 사이에 식사는 가능할지 몰라도 불편한 사람이라면 차라리 혼자 마시고 말지, 어쩌면 시간을 더 보내고 싶은데 배는 부르니까 네가 시간을 좀 더 붙잡아주는 역할을 해주는지도 몰라. 게다가 네 앞에선 이런저런 말이 술술 나오더라고, 난 그래. 


체인점으로 된 베이커리, 카페보다 동네 작은 카페에 있는 너를 더 좋아했어. '카페 아뜰리에'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또, '개웅산 드립 하우스(일명 개드립)' 아이스 라테, 슈르르까(지금은 사라짐), 얼마 전에 친구들과 간 '폴리'도 내 스타일, 내가 좋아하는 장소야.


너를 떠올리면 먼저 떠오르는 너와의 추억 장소들. 너 한 잔만 있으면 나는 왜 이리 든든하고 좋았는지, 두 시간도 네 시간도 심심하지 않게 있을 수 있을 것 같은 나의 조용한 친구. -네 시간씩 있을 때는 너에게도 어울리는 친구 한두 잔을 더 시켜서 둬야 오래 앉아있을 수 있단다. 아니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잘을 급하게 리필하거나. 다 먹은 네가 테이블에 혼자 있으면 그게 또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가 없더라고.- 후다닥 급하게 원샷해도 여유 있게 천천히 향을 음미해도 어떤 순간이든 네가 주는 기쁨의 크기는 언제나 나에게 차고도 넘쳤어. 


아직 한국에 들어오지 않아 아쉽지만 영국이나 유럽에 많은 '코스타'커피도 내가 좋아하는 커피 중 하나야. 거기 아이스 라테에 설탕 시럽을 살짝 넣어서 흔들어서 거품 내 달라고 하면 진짜 이런 환상적인 맛이 없더라. 영어를 많이 할 필요도 없었어, 물어보거든, ㅎㅎㅎ 흔들어서 줄까, 설탕 시럽은? 그러면 아주 조금 넣고 쉐이킹 많이 많이 해달라고 하면 돼. 아, 나는 얼죽아인데 꼭 아이스만 마셔. 아주 특별 한 때 빼고는. 고양이 혓바닥이거든. 절그럭 거리는 각얼음이 들어간 아이스 라테가 나의 주력 메뉴야. 잔 얼음 알갱이는 노노. 오도독 씹는 맛은 있는데 너무 빨리 녹아버리거든. 아이스 라테를 마시기 시작한 후부터 달달이 마니아인 내가 유일하게 설탕을 가미하지 않고 마시는 음식이 바로 너야. 그냥 우유만 마셨을 때 보다 네가 첨가된 우유일뿐인데 그 맛은 천차만별인 거 있지? 더 시원해지고 신선해지고 배도 든든해진 느낌이랄까. 


사실 널 이리 좋아한다고 하지만 난 에스프레소와 아메리카노 자체를 잘 못 마셔. 쏘리. 너무 쓰거든. 주변에도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사람들을 몇 명 봤는데 설탕을 무진장 넣거나 작은 잔 위로 수북하게 휘핑을 올리더라고. ㅋㅋ

네가 싫어서는 아닐 거야. 그냥 사람들은 원래 쓴맛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잖아. 뭐 은단 같은 걸 씹어먹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약간의 씹는 재미라도 있지.;;; 그래도 보약보다 너를 마실 때 웃는 이들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해. 너는 향부터 아주 우아한 은은한 매력을 내뿜기에 난 지금껏 널 대할 때 한약 마실 때처럼 코를 막고 마시는 사람들은 한 번도 못 봤어. 갈색머리란 노래를 들을 때마다 네가 떠오르더라고. 내가 느끼는 너의 색깔과 이미지가 온통 갈색이어서 그런가, 블랙조차 브라운을 띄어서 그런가, 지금도 브라운 아이즈의 위드 커피란 노래를 들으며 글을 쓰고 있어. 


 커피는?
 이미 아침에 한 잔 때렸지. 




너를 처음 알게 된 건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는데 우리 엄마가 그때부터 너의 엄청난 추종자였거든. 하하, 내가 엄마가 또 되어보니 너 없인 못살겠더라고. 아침마다 아주 커다란 머그컵에 너를 하나 가득 온통 블랙으로 부어서 엄마는 화장실로 조용히 들어가셨어. 세상에! 엄마는 화장실에 있을 때 내가 문 두드리는 것조차 싫어하는 예민한 사람이었는데 너는 그렇게 쉽게 허용해 주다니, 그냥 온통 까만색인데 네가 뭔 매력이라고? 우리 엄마는 그 후에도 사람들이 오거나 혼자서 몸이 추워지거나 심심할 때면 널 꺼내서 먹었지. 내가 한 입만 달라고 해도 (글쎄, 믹스면 달랐을지 모르지만 처음 맛본 쓴 커피는 연탄재 같은 맛, 숯불을 다시 갈아서 태운 맛이었어. 둘 다 먹어본 적은 없다만;; 미안) 머리 나빠져서 안 되니 꼭 스무 살이 넘어야 마시라고 했지. 그때는 그 말이 유행이었어. 머리 나빠진다, 하면서 카페인이 있기에 좀 늦게 배워라 하는 거지. 그러면 더 궁금하잖아. 사실 공부를 핑계로 고삼 때 까페라떼 마일드라고 우유처럼 부드럽게 생긴  너를 처음 사서 마셨는데 너무 맛있어서 마시고 마시고 한 자리에서 세 통을 더 사서 꿀떡꿀떡 마신 기억이 있어. 삼각형 봉지 우유 커피도 한쪽만 쪽, 가위로 조그맣게 구멍을 내서 빨대를 꽂아서 쭈우욱 마시면 얼마나 달달, 맛있다고! 도서관에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마이 까페라떼 마일드'를 만나러 갔다 해도 뭐;;; 널 만나는 시간이 제일 즐겁고 달콤했으니까. 행복했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부터 정신이 진짜 반짝 나는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 잘 잤단다, 지금도 잘 자. 하하하- 확실한 기분 전환이 됐거든. 아, 엄마가 이래서 눈 뜨자마자 빈 속에서 뜨겁게 팔팔 끓인 너를 먼저 찾았구나 싶어. 


20대 초반에 직접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보니 네가 참 단순하지만 다양하게 만들어진다는 생각을 했어. 기억나니? 내가 처음 맛든 카페 모카는 휘핑이 엉망이어서 그걸 받은 손님이 아주 얼굴이 울상이 돼서,

이게 뭐예요? 다시 만들어주세요. 

나에게 내밀었을 땐 말만 휘핑크림이지;;; 참 비주얼이 그렇더라고. 


위에 마끼아또 우유 거품이 올라가든, 카페 모카 휘핑이 올라가든 너는 그냥 맛으로만 이뤄지는 게 아니라 보는 것도  참 중요한 까다로운 애구나 느꼈어. 그때 무수히 널 만들고 하루에 네 잔씩도 마셨는데. 마끼아또 우유 거품을 내고 위에 캐러멜 시럽으로 별표 그리는 걸 나는 제일 좋아했어. 좋아하는 단골손님에겐 별표도 막 다섯 개씩 그려주고, 거의 다 떨어진 캐러멜 통은 뚜껑을 따고 긴 수저로 퍼먹었지.  네가 들어가는 양에 따라서 모양에 따라서 마끼아또, 라테, 카푸치노로도 불리지만 너를 시키는 사람들 표정은 모두 여유로워 보였어. 조급해 보이는 사람도 네가 한 모금 들어가면 차분해는 마법 같은 일도 일어나고. 어떤 음식이랑도 잘 어울리는 건 너의 무수한 장점 중 하나일 뿐이야. 네가 진짜 진짜 사랑스럽기 때문에 딱딱하게 볶은 커피콩 위에 초콜릿을 덧입히기도 하고, 커피 빵이란 것도 있더라. 기분 좋게 끌어올리는 음식으로 불리는 '티라미수'에도 네가 꼭 들어가. 부드러운 마스카포네 크림과 촉촉하게 적셔진 커피(스펀지) 케이크, 위에 수북하게 뿌려진 코코아 파우더까지 한입에 아웅 먹으면 진짜 행복해져. 네 다른 이름은 '행복', '업'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글쓰는 오늘 Season 10 우리들의 글루스 II

'음식을 의인화하여 쓰기'

두 번째 글을 씁니다.

작가의 이전글 인천 공항 가는 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