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장선거 연설문

너는 언제나 나를 울리고 웃게 만들어

by 앤나우

큰 아이는 매번 반장이 되고 싶어 했다.

'반장선거'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 누가 등 떠밀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자처해서 나가고 늘 반장으로 뽑아달라고 이야기를 했다.


한 표가 안 나온 적도 있었고 2표 차이로 아쉽게 떨어진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또 도전했다. 아쉽긴 하지만 매번 도전하는 아이에게 오히려 그 아이보다 내가 마음이 안 좋고 우울한 날도 있어서

그냥 안 나가도 너 자체로 멋져!라고 말하다가 이내 후회도 했다.


내가 뭐라고 도전하겠다는 아이를 막았나도 싶고, 그날은 공책 한 귀퉁이를 잘라 아이가 쓴 연설문도 발견하고 펑펑 울기도 했다. 급하게 날조해서 쓴 듯한 날아가는 듯한 글씨였는데 사실 눈물이 난 건 뒷장 때문이었다.


삐뚤빼뚤 글씨에는



제가 만약 반장으로 뽑히지 않더라도 전 우리 반에서 꼭 도움이 되는 필요한 사람으로 열심히 제 역할을 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뽑히진 않았지만, 뽑아주신 분들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신 분들도, 모두 감사합니다.




가방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공책 귀퉁이 조각을 발견하고 펑펑 울었다. 엄마보다 나은 아이구나, 진짜 하고 싶어서 나간 거였구나. 떨어진 후에도 단단하게 쌓아갈 마음이 있었던 거였어, 뭔가 꼭 슬프다기보다는 만감이 교차하고 기특하기도 해서, 벌써 이렇게 컸나 하는 생각에 나온 눈물이었다.


그날도 아쉽게 반장엔 떨어졌지만 '일인일역'으로 가장 어려운 역할인 칠판 담당을 맡았다면서 좋다고 신나서 떠들던 아이,

심드렁하게

-힘든 게 좋은 거야? 왜 그런 걸 했어?

라고 하니

>> 난 가장 힘든 일이 가장 보람된 것 같아. 남들이 안 하니까 그래서 그게 제일 멋지고 좋아 보여.



그 말을 들으니 부끄러웠고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는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정치인들이 너처럼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엄마는 단순히 네가 감투만 쓴 반장을 동경하는 줄 알았는데 네가 진짜 하고 싶은 '봉사'와 일꾼의 의미가 뭔지 그제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4학년, 5학년때도 도전이 계속 됐지만 그때부터 2학기 여행으로 반장선거에 두 번이나 참여를 못한 아이는 여행을 가서도 아쉬워했다. 아, 이번엔 이런 걸 준비했는데 하면서 자기가 생각한 연설을 나에게 말해주기도 했다.


5학년 반장 선거 때 아이의 연설이 기발하고 재밌었는데 그건 바로 이랬다.







여러분, 뒤를 보세요!(손가락으로 뒤쪽을 갑자기 가리킨다)




아이들은 모두 일제히 뒤를 쳐다본다.




이것이 바로 저의 통치력입니다. 통치력!








푸하하핫, 이게 뭐야!?? 했는데 뒤에 뭔가 또 이어지는 멘트가 있었으면 더 좋았을걸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5학년때 이어, 6학년 선생님도 같은 선생님께서 지도해 주시는데 덕분에 아이들 학교 반장선거 연설 장면도 모두 영상으로 볼 수 있었다.



글 쓰고 말하길 좋아하는 엄마에게 그 어떤 도움 한 번 청하지 않고 그대로 자기 생각대로 나름의 연설을 준비해서 반장 선거 앞에 당당히 섰던 아이!


사춘기의 시작점에 영국에 다녀오고 나서 6학년이 시작하자마자도 역시 반장에 도전했다. 늘 보던 그 친구들이 그 친구들일텐데도 나보다 키가 훌쩍 커진 아이는 새 학기 첫날,

엄마, 마음이 좀 떨리고 불안하기도 한데 저를 한 번 꽉 안아주세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언제든지, 얼마만큼이라도, 나는 아이를 꽉 안아주고 도닥여줬다.









새 학기에도 이어진 반장선거


신기하게도 아침에, 그날 아침에 아침부터 눈이 왔다. 3월에도 눈이 오는구나, 눈은 쌓일 때까지 계속 내렸다. 온 세상이 하얘졌다.


*언젠가 아이에게 물은 적이 있다. 반장을 언제부터 왜 그리 계속하고 싶었어?

이렇게 물으니 아이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런 답을 했다.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맨날 반장 했다고 했잖아. 그것도 1학기엔 인기 없어서 못하고 맨날 2학기에. 1학기때 이미지 잘 쌓고 친구들한테 잘해줘서(진짜 그랬다. 감투 쓰고 권력을 휘두르고 싶었다 ㅋㅋㅋ), 그래도 어쨌든 엄마는 중학교 가서도 그다음에도 계속 반장을 한 거잖아. 그 말을 들으니 엄마가 한 '반장'이 어떤 기분인지 알고 싶어졌어, 그냥.



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아이에겐 거울처럼 다가오고 보인 걸까. 그 이후부턴 나는 더 이상 아이의 도전을 어떤 말로도 내 생각의 한계로도 막지 않았다. 아이를 통해서 내가 더 많이 배웠다. 떠든 사람 이름이나 적고 싶어서 이미지 관리를 했던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얼마나 철없던가! 우리 아이가 떨어져도 슬프고 속상하기보단 기특한, 단단한 마음이 들었다.








눈이 온 날 아침에 그런데 처음으로, 아이가 나에게 자기가 쓴 연설문이 어떤지 봐달라고 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뭐라고 쓴 거지?

궁금해서 슬쩍 보고 내 앞에서 연설도 해 보라고 하니 이런 내용이었다.




여러분!
오늘 아침에 눈이 온 걸 보셨나요?
눈이 와서 온 세상이 새롭게 변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새로운 얼굴을 원하시지 않으신가요? 그렇다면 저에게 투표하세요!
제가 여러분들의 뉴 페이스이자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드리겟습니다!(여기서 오타가 하나 나왔으나"겟"을 따로 "겠"이라고 따로 지적하진 않았다 ㅋㅋㅋ 꾹 참았다)



간결하지만 호소가 가득 담겨있는 문장, 읽자마자 손뼉 쳐줬다.

ㅁ AI도움을 하나도 받지 않은, 순수 창작물이라고 아이는 뿌듯해했다. (요즘엔 많이들 활용한다고 한다.)


와! 선재야! 내가 볼 때 넌 글을 써야 할 것 같은데! '페이스'로 라임을 맞추고, 내용도 정말 좋아! 느낌이 좋아!


별다른 코멘트나 분석대신 그냥 그대로 손뼉 치고 오버하는 반응으로 칭찬해 주며 아이를 학교에 보냈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웃음이 났다.


뭐야, 그냥 대놓고 원래 하던 애들 말고 자기를 뽑으라는 거네. ㅋㅋㅋ 피식피식 새어 나온 웃음이 어느새 우리 아이가 뭐를 하든, 도전하는 그 마음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2교시 수업이 거의 끝날 무렵 선생님께서 하이톡으로 직접 아이가 반장이 당선됐다는 당선 소식을 보내주셨다. 오마낫!! 세상에나! 아침에 쓴 연설문 작전도 통하고 드디어 소원을 이뤘네! 괜스레 기분이 좋고 졸업하기 전에 꼭 하고 싶었던 아이의 마음을 더 잘 알기에, 뭉클해졌다.


나에게 아무런 도움도 청하지 않고 그 과정도 자세히 말해준 적 없지만 네가 뒤에서 고민하고 생각했을 시간에 더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거기에 선생님께서 5학년에 이어 6학년까지 우리 아이가 누구보다 반장을 하고파 하는 마음을 잘 알기에 함께 기뻐해주시고 나에게도 알려주고 싶어 하신 것 같아서 그 마음이 참 따스하고 고마웠다.



그래, 반장이 뭐라고?



근데 기다려왔던 게 아이 스스로의 힘으로 또 당선이 되니 나 역시 고맙고 뿌듯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저번 총회에 가서 선생님께서 매번 수업 시간이 끝날 때마다 칠판을 어찌나 깨끗이 지우고 정리하는지 혼자 하면 힘드니까 같이 하거나 힘들면 안 해도 된다고 하니 자기가 먼저 힘든 일 하기 위해서 반장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고 착하다며 칭찬해 주시는데, 속으로 자꾸 웃음이 나왔다.(겉으로도 물론 새어져 나왔을 거다)


자식자랑은 70살 넘어서하라고 하던데(한 마디로 하지 말란 말이다)그런데 나는 어쩐지 나보다 마음보가 더 선하고 단단한 이 아이를 자랑하고 정치인들도 이런 마인드로 제발 정치를 해달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


나를 울리고 웃게 하는 아이.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라는 시가 있는데 요즘은 자꾸 이런 생각이 든다.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


언제부턴가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말이 되려 거북스러웠던 게 바로 그런 이유였구나 하고 말이다. 꽃길만 걸을 수만 없는 인생이니까 애초에 말이 안 되고 공감할 수 없었던 말이란 걸. 어떤 마음에서 하는 말이란 걸 알지만 사실 세상엔 꽃길만 있으면 그게 또 꽃길인가도 싶다. 걷다 보니 길이 되고 처음에 길이 아니던 흙바닥 암석 자갈투성이 밭도 길이 되는 것처럼 흔들리고, 젖고, 그래서 더 아름답게 빛나는 법이라고.


나도 그래서 이 나이까지 더 많이 울고 웃고 일상 속에 날마다 시련도 조금 더 태연하게 받아들이고 안아주며 살고 싶단 생각이 든다. 나만의 꽃길은 흔들리고 젖어야만 완성될 수 있다. 꽃길만 걸으세요,라는 말보다 아이에게 도정환 시인의 이 시를 더 많이 읽어주고 싶다.


우리 아이 덕분에 반장선거에 나가는 또 다른 아이들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아니, 더 정확히는 떨어진 아이들을 더 응원해주고 싶다. 떨어질 수 있다는 '도전'자체가 빛나고 아름답다는 걸 나는, 이렇게야 뒤늦게 깨닫는 어른이다.


선거는 언제나 지나간다. 선거 때만 요란하고 폭풍 같다가도 그 자리에서 막상 서보면 정신병자처럼 고치지 못하는 병에 걸린 대통령도 있다.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는)


자리에 맡는 책임과,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선 사실 얼마나 '눈물 나는'자리인 줄도 깨달아야 할 텐데 말이다.

:이건 물론 초등학교 반장 선거 이야기는 아니다. 그보다 더 못한 어른들의 정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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