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의 일기를 읽고
선재 : 엄마, 갑자기 나 하리보가 싫어지려고 해. 이제 하리보 안 먹을래!
나 : 왜 선재야?
선재 : 바깥에 외출도 못하고 사람을 이렇게 작은 데서 살게 하고. 과일 병에 몰래 오줌을 싸게 만들고 숨어 살게 했잖아!
엄마도 하리보 먹지 마, 이젠! 하리보가 어디에서 만든 젤리인 줄 알지?
어린 시절 누군가의 일기를 들춰 보는 것만으로도 콩닥콩닥 큰 재미를 주었던 안네의 일기. 얼마 전 선재도 밀크T를 하면서 학습 탭 안에 들어 있는 e-book으로 「안네의 일기」를 처음 보게 됐다.
아, 하리보의 시작이 독일이라 독일에서 만든 거라서, 독일인도 하리보도 싫어졌구나. 젤리 맛을 들인 4살부터 하리보를 엄청 좋아하는 선재가 한 말이 충격적이었다.
나는 선재보다 좀 더 늦은 나이, 4학년인가 5학년쯤 이 책을 봤지만 한 번도 이런 생각은 안 해봤던 것 같은데 오히려 숨어 사는 은신처에 대한 궁금증과 페터에 대한 첫사랑, 여럿이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에 더 큰 호기심을 가졌던 것 같다. 설레기도 하고 두근두근 조마조마하면서 웃으며 읽었던 나의 안네의 일기.
그 일기 덕분에 내 일기장에도 Joy(기쁨이)란 이름을 붙여주면서 안네 흉내를 내기도 했다.
아이의 말 한마디 덕분에 「안네의 일기」를 다시 읽어봤다. 몇십 년 만에 찬찬히 제대로 읽어보니 눈물이 났다.
끄덕끄덕, 선재가 왜 그토록 화가 나고 속상한 마음이 들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유대인이란 이유로 자유롭게 다닐 수도 없었고 매사에 제약이 따랐고 보고 싶은 시간에 극장에 가거나 먹고 싶은 음식, 가지고 싶은 장난감도 가질 수 없는 삶. 그것부터 이해할 수 없는데 나중엔 전부 잡혀가서 수용소에서 죽음을 당해야 한다니.
언니 마르고와 안네는 작아진 속옷과 얇은 옷으로 계절을 버텨야 했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앞으로 갖게 될 예쁜 속옷, 드레스, 맛있는 음식, 따뜻한 햇살을 온몸으로 맡으며 천천히 걸어가는 산책을 상상하는 것뿐이었다.
지금도, 그때도 누구나 누리며 할 수 있는 걸 그들만 할 수 없었다니 너무 불공평하고 갑갑하고 화 나는 일이 분명하다. 전쟁으로 인해 은신처에 숨어 살 때조차 큰 가방에 잔뜩 뭔가를 싸 오는 게 눈에 뜨이기에 여러 겹 스타킹과 코트를 걸치고 트렁크 하나도 제대로 못 챙겼다는 그 말엔 어찌나 가슴이 아팠던지. 우린 2박 3일 여행을 가도 트렁크 하나가 꽉 차는데...
모든 순간에 유일한 안네의 것이 돼주었던 작은 일기장 '키티'속으로 들어가 보니 전쟁의 참상뿐 아니라 엄마나 함께 사는 판단 부인, 페퍼씨로부터 받은 안네의 상처도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안네는 참 섬세하고 영리하고 유쾌한 아이 었구나.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일기장을 나눠 볼 수 있는 언니 마르고가 있어서 언제가 가장 크고 좋은 걸 안네에게 주었던 아빠 오토가 있어서 그래도 다행이다, 그런 마음이 들었다.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삶 속에서도 크리스마스에 서로 따뜻한 음식과 작은 선물을 나누는 풍경, 마로니에 나무 입장에서 안네와 가족들을 바라본 이 짧은 동화를 읽으니 은신처 바로 앞에 굵고 커다란 마로니에가 있어서 그것 역시 다행이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까지 제대로 누릴 수 없는 삶, 숨어있어야 하는 삶, 없는 것처럼 잔뜩 움츠린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또 행복했던 것 같다. 가족들이 함께 살 수 있단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딱 몇 주만 더 버텼더라면 안네는 연합군에 구조되어 살아남았을지도 모르고 '미래의 작가'라고 소개한 아빠 오토의 말처럼 멋진 시나리오 작가나 소설가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이 위대한 작은 작가가 남긴 일기장을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 우리가 누린 자유와 평범한 하루가 새삼스러워진다. 죽음을 이긴 일기장 '키티'덕분에 안네의 마음을 알 수 있어서 고맙다.
『더 리더 책을 읽어주는 남자』마지막 장면에서 한나는 그동안 자신이 모아둔 돈을 감옥에서까지 모은 전액을 나치 전범의 희생자였던 작은 소녀에게 건넨다. (소녀는 물론 살아남은 희생자, 할머니가 됐다.) 자기처럼 글을 모르는 유대인 아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덧붙이면서.
거절한다, 살아남은 자는 당당하게.
유대인은 대부분 글을 쓰고 읽을 수 있기에.
( 유대인과 한국인은 문맹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한다. )
하지만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았던 작은 저금통, 예쁜 통은 자기에게 달라고 한다. 자기도 어린 시절 이렇게 예쁜 통에 뭔가 소중한 걸 모은 적이 있다고.
가슴에 별을 단 어린 소녀도 독일인도
예쁜 쿠키나 티 박스에
작고 소중한 걸 간직하고 싶었겠지.
독일인도, 유대인도, 나치도, 그리고 우리 선재도 작은 통에 소중한 일상을 모으고 간직하고 싶어 한다.
아무것도 가질 수 없어 나중에는 뭔가를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꿈조차 버거웠던 어린 소녀를 나는 꼭 기억하고 싶어졌다. 안네의 일기를 다시 읽었을 때 많고 많은 장면 중 이 영화의 마지막장면이 떠올랐다.
안네 프랑크에 관한 동화책이 생각보다 다양하고 많았다. 도서관에서 몇 권 더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 두 권의 책도 올해는 끝까지 도전해 봐야지. 어려울라나, 하지만 안네 덕분에 나도 용기를 내봐야지.
안네 프랑크와 마로니에 나무 그리고 안네의 성장 이야기, 『안네의 일기』/ 제프 고츠펠드 글
안네의 일기 / 안네 프랑크 / 태동출판사
더 리더: 책을 읽어주는 남자 / 스티브 달드리 감독
나우 앤 히어
앤나우
브런치에서 매거진으로 글을 발행하기 위해 네 명이 모였다. (솔방울 베이커리가 아니라 줌으로) 우린 서로 취향과 개성, 쉬는 방법도 제 각기 다르지만 모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잘 쉬고 있는 엄마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로 ‘RE: born’으로 발행을 시작하려 했으나 마지막 회의를 마치고 우리 이름은 어쩐 일인지 ‘Monday mothers’가 됐다. 주말 내내 아이와, 신랑과 함께 아침 늦잠, 혹은 이른 아침부터 함께 시간을 보내고 월요일이 다시 나만의 온전한 쉬는 시간이 된다는 점이 사실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더 와닿고 좋았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그 무엇보다 귀한 ‘나’만의 쉬는 시간.
일요일 밤부터 내일은 혼자 뭘 먹지? 잠깐 있는 오전시간 동안 나는 뭘 할까?
생각만 해도 짜릿한 순간들이 많았던 우리였기에. 마지막 회의에서 우린 엄마의 쉬는 방법이 아니라
‘아이와의 거리’, ‘각자의 공간과 시간’을 더 많이 이야기했다. 오로시님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엄마의 쉬는 시간을 말한다고 했지만 사실 엄마로서가 아니라 독서, 영화,
미술관도 각자 쉬고 싶은 방식이 아닐까요?
엄마의 쉼표보다는 나, 결국 우리의 취향과 쉬는 방식에 더 초점이 맞춰지는 것 같아요.
누구의 엄마도 아내도 아닌 한 사람. 월요일을 기다리지만 단순히 아이에게 해방돼서 행복한 게 아닌, 잠시 나에 대해 혼자 즐길 거리를 생각하는 사람으로 있다는 자체가 설렘과 행복을 주는 일이 될 줄이야!
월요일의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같은 간절한 시간을 마주하기까지 그녀들의 이야기, 과정이 나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