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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나우 Sep 11. 2024

지독한 자유영혼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선율아, 율아!

어김없이 울리는 벨 소리, 아이가 하원하기 십분 전, 원에서부터 걸려온 전화. 받기가 꺼려진다. 이미 경험으로 어떤 말이 나올지 알기에, 더 받기가 싫다. 하지만 꼭 받아야 하는 전화다. 다른 전화는 놓쳐도 이 전화는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의무감이 절로 든다.


상냥한 인사로 시작했지만 지금도 연필을 쥐기 싫어하는 아이의 학습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따라 쓰기도 버거워하고 가위질이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노래)도 끝까지 못 외운다는 이야기. 


별로 충격적이진 않았다. 집에서도 재밌는 책을 꺼내서 읽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에 관심을 가지기보단 몸을 가지고 놀고 뛰고 장난을 치고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아이였기에. 


다급하게 와다다 쏟아내는 말속엔 죄다 아이의 부족한 점만 가득하다. 그게 대부분 다른 아이들은 전부 다 하는 쓰고 읽고 가사를 외우는, 앉아서 학습하는 과정이라는 걸 반복해서 듣자니 마음이 좋을 리 없다. 칭찬을 기대하고 받은 것도, 칭찬을 해달라는 것도 아니다. 조금 더 정리되고 비교가 들어가지 않은 좀 더 세련된 표현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뭐, 그것까지도 상관없다. 선생님의 답답한 심경과 한숨에 그냥 내가 주눅이 들 뿐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인정해야겠다. 여러 명의 아이들 속에 또 혼자서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가 안타깝고 답답한 심경에 전화했다는 것도. 


내 마음이 조금도 조급하지 않았는데 점점 조급해진다. 아이 학습에 대해 이어지는 "가정 지도" 소리에 그랬던 것 같다. 어느 날은 싫다는 아이를 울리고 앉혀서 매를 들고 제대로 쓰라고 혼내다가 순간, 내 모습에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점점 스스로가 긴장하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꿈틀꿈틀 왜 남들 다 하는 것도 못하는 아이로 키웠지, 란 생각으로 화살이 나에게 향하기 전 나도 생각을 전환하기 위해 청소를 했다. 일단 다리를 움직여 전화를 받았던 공간으로부터 벗어나서 다른 곳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다른 기분이 느껴진다. 겹겹이 쌓인 먼지를 닦고 늘어져있던 장난감들을 한 데로 모은다. 하기 싫었던 청소도 생각을 바꾸기엔 정리하는 기분까지 덤으로 줘서 좋은 것 같다. 


큰 아이는 5살 때부터 저절로 통글자로 하나둘씩 보면서 글자를 스스로 터득했다. 혼자서 읽을 줄 아는 동화책도 꽤 많았다. 그래서인지, 한글을 일찍 가르쳐 주고 어떤 학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따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내 목이 아플 때까지 책을 읽어달라며, 동화책을 가져온 아이였고 떠오르는 생각을 그때그때 그리는 것도 좋아해서 유치원 소풍 때도 그림 그리는 도구를 가져가서 앞에 보이는 식물이나 풍경들을 그려오기도 했다. 카메라나 핸드폰이 따로 없었기에 그렸다 지우고 다시 그릴 수 있는 패드가 아이의 좋은 카메라가 됐다. 



청소하는 중간중간에도 다 때려 부수고 사방으로 난리 치며 논 둘째의 흔적에 울컥, 뭔가가 다시 올라오며 기분이 나빠졌다. 시시각각 변하는 기분이란, 사람은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에효, 애는 왜 이렇게 난리 치며 놀까, 좀 크긴 큰 건가...








오늘 아침에 같은 영아부에서 교사로 봉사하시는 선생님께 카톡이 왔다. 목사님 부인이기도 해서 사모님이라고 부르는데 이제 내일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가시는 사모님께서 나에게 카톡이라니 궁금했다.


| 날마다 축복해(우리 아이 3분 기도) *우경신 지음 -이미지

| 나경 집사님 안녕하세요~^^ 혹시 이 책을 갖고 계실까요?

- 아, 이 책을 본 적은 있어요. 잠자리 들기 전 3분 기도랑 다른 시리즈는 가지고 있어요. 요 책은 없네요.

| 아하, 역시 기도하시는 나경 집사님^^

- 에구, 무슨요. ㅎㅎㅎ 우리 00 사모님, 이제 곧 튼튼이와 만나네요!

| 제가 요거 보고 있는데 좋은 것 같아서 선물로 보내드리려고요. 네. 내일, 만나러 가네요~


내일 당장 출산을 앞두고 병원에 들어가는데 『날마다 축복해』라는 책을 읽으며 나를 떠올려주셨다니 그 마음이 뭉클해서 그때부터 눈물이 핑 돌기 시작했다.







교회 안에서 주일학교 예배 시간에도 우리 선율이는 말 그대로 자유 영혼이었다. 한 번도 예배엔 집중한 적이 없고 방방을 타거나 누워서 바닥을 쓸고 다니거나, 누군가를 계속 타고 올라가거나 장난칠 궁리만 했다. 정작 참여해야 할 예배도 기도도 찬양도 아무것도 안 한 채로.  

정작 엄마인 나는 앞에서 열심히 율동하고 찬양하며 아이들과 즐겁게 뛰놀고 예배를 드리는데 선율이는 예배를 방해하러 온 아이 같았다. 그래서 그때 내 기도는 선율이가 제발 얌전하게 예배드리고 집중하게 해 주세요가 아닌, 

선율이보다 더 설치는 아이 한 두 명만 더 오게 해 주세요. 급합니다, 어서 넘치는 에너지의 다른 아이들을 보내주세요! 아이가 짓궂은 개구쟁이어도 너무 티 나지 않게 같이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내주세요. 뭔가 내 안에 이 아이는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체념 같은 감정이 있었고 귀가 있어도 전혀 내 말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아이 태도에 통제력을 잃어서 부글부글했지만 사람들 틈에서 어떻게 하면 나를 좀 진정시킬까를 고민하느라 내 감정, 기분에 좀 더 치중했던 것 같다. 


그래, 그런 순간에도 00 사모님께서 다가와서 남들이 해주지 않는 우리 선율이의 장점을 이야기해 주시고 정말 귀엽다고, 선율이가 (제일)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말해줬을 때는 기분이 하루종일 좋았던 것 같다. 일희일비하는 엄마. 조마조마, 독기라곤 전혀 없고  감정도 말랑거리고 약하지만 그걸 또 잘 숨기지도 못하는 엄마. 그게 나였다.

통제력이 상실된 순간 발끈하고 너무 화가 나서 주체가 안되는데 그래도 자꾸 내가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느 날도 전부 예쁘게 열심히 율동하고 찬양하고 암송까지 척척하는 아이들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쪽에서 또 발레를 하는 건지 춤을 추는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행위 예술가 같은 우리 선율이 뒷모습을 보는데 그 모습이 불현듯,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처음부터 척척 따라 하는 아이들 모습이 오히려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고 놀라운 거였구나! 그래, 아이들 모습은 제각각 다른데! 그러면서 떠오른 내 모습 하나. 






나도, 사실 교회를 좋아한 적이 별로 없었기에. 모태 신앙으로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출석하고 예배를 드렸지만 그게 뭐? 중학교 때까지 담임 목사님이 설교하시면 그러거나 말거나 엎드려서 자고 듣기 싫으면 그림 그리고 딴짓을 했다. 억지로 집어넣는 수련회는 너무 가기 싫어서 엄마한테 매번 난리 쳤지만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수련회에서 주위엔 온통 뜨겁게 기도하는 사람들뿐이라 나는 그 속에서 위축되기도 하고 무서웠다. 


그러다가 점점 자라면서 왜 이런 시간 낭비를 하지? 너무 싫고 재미도 없는데, 어디 다른 데로 탈출할 수도 없다는 걸 알게 될 무렵부터는 그냥 그 시간에 띄엄띄엄 기도 했던 것 같다.


어떻게 기도할지 모르지만 기도가 뭔지도 모르지만 처음으로 입을 뗀 날도 기억난다.





저도 뭔가를...  저렇게 다들 울고 불고 바라는 것처럼
기도 하게 해 주세요. 
울지 않더라도 기도에 집중해서
기도란 걸 하게 해 주세요.



나로선 용기를 낸 최초의 기도다운 기도였던 것 같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는 기도 앞에서 그냥 대화하듯이 답답한 심경이 터져 나왔던 것 같다. 이전까지만 해도 교회 땡땡이를 많이 쳐서 주보에 목사님 사인을 받아오거나 용돈을 받고(꼭 돈을 받아야) 교회에 나가는 아이였는데 그렇게 십 년도 넘게 다니고도 아무것도 안 따라 하고 재미없어 지루해 투덜투덜 만 반복하다가 내가 직접 뛰어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16살 무렵이었다. 


그때의 나와 오버랩되는 걸 보니, 선율이는 뭐. 


나는 언제나 내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사랑받길 원한다면서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대로 봐달라고 그렇게 말했으면서도, 정작 나는 그러질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내 아이에겐 달랐다. 내 말을 좀 더 잘 듣는 아이, 얌전한 아이, 똘똘한 아이를 기대했던 건 아닐까. 사랑받을 충분한 짓을 해야 더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던 건 아닐까. 


떼를 쓰고 잘못된 행동은 분명 혼나야 하지만, 저 아이의 자유로운 기질 자체는 그냥 인정해줘야 하는 게 당연한 건데..., (너네 엄마는 대예배 시간에도 엎드려서 뻗어 잔 사람인데! 누가 누구의 행동을 지적할 수 있을까.)


00 사모님께 오늘 하루 나를 좀 더 돌아보고 아이에게 사랑하고 축복하는 말을 더 해주지 못한 나에게 귀한 선물을 해줘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사모님의 대답 = 선율이가 점점 자라나는 게 보인다면서 자기야 말로 걱정 가득, 이제 시작인 초보엄마라고 했다.


초보엄마, 나도 선율이에겐 미숙한 초보 엄마일 수밖에 없었구나. 전혀 다른 기질, 전혀 다른 아이, 절로 키워지는 게 아닌데 언제나 형아의 순하고 말 잘 듣는 기질에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는 마음이 컸다. 


짧은 다리, 통통한 손가락으로 온갖 세상을 다 만지고 직접 다녀야 호기심이 풀리고 채워진 아이, 어쩌면 그래서 코가 먼저 앞으로 나가서 쓰러질 것 같이 뛰는 네 뒷모습만 잡고 잡으러 가야 하는 내 처지나 상황이 너무 싫었던 것 같다. 마음을 내려놓고 학습을 하고 싶을 때 동기 부여가 스스로 될 때 시작하고 싶지만 동기부여까지가 또 너와 나에겐 험난한 여정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난 너를 기다려줄 거다. 너를 만나기 위해 설레면서 기다렸던 출산까지의 시간들을 생각해 보니 기적과 감사한 일들이 훨씬 많았구나, 새롭게 깨닫는다. 


까다롭지 않고 잘 웃고 아무에게나 편견 없이 대하고 스스럼없이 친구가 되는 아이. 작은 거 하나에도 기뻐하고 감정을 잘 표현하는 우리 선율이, 가둘 수 없는, 잡히지 않는 지독한 자유 영혼.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영화 아가씨의 대사인데 내가 정말 좋아하는 표현이다. ㅎㅎ-



하루에 수십 번씩 나의 기분과 컨디션 몸 상태까지 들었다 났다 하지만 네 덕분에 단단 해지고 나도 조금씩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엄마가 키는 이제 다 컸지만 달라지고 바뀌고 아주 조금씩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는 나의 구원자. 좀 더 유연하게 사고하고 기분 나쁜 '기분'에 대해 대처하고 생각하는 마음을 터득해 가기도 한다. 그래그래, 암, 네 덕분이야. 구원은 함부로 쓸 단어는 아니지만, 과장의 표현이 아니라 철없는 내 인생의 구원자는 네가 맞다.



어느 날 거리에서 네가 너무 말을 안 들어서 엉엉엉 큰 소리로 주저앉아서 울 때 

자기가 계속 울어야 할 타이밍을 놓친 너의 어리둥절한 눈빛 속에서 꼬물거리면서도 나한테 와서 내 어깨랑 등을 토닥토닥해 줬던 네 손길 속에서 위로는 나만 아이에게 하는 게 아니구나. 병을 준 사람이 또 위로가 되는 상황들을 자식에게로부터 얼마나 배웠는가! 








▶ 피터 레이놀즈의 『느끼는 대로』

순간의 다양한 감정마다 한 번씩 즐거움과 평안을 느끼는 자유로운 아이로 커 나가길! 






네 모습 그대로, 반짝이는 눈망울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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