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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나우 Sep 30. 2024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

오직 환대뿐인 공간 


그림 같다!

  

멋진 풍광을 볼 때마다 감탄이 터질 때 자주 하는 말이다. 굉장히 상투적인 표현이긴 한데 일산에 이사 오고 나서 텅 빈 생태 공원에서, 꽃망울, 노을, 특히 눈이 내리고 난 뒤 온 세상이 겨울왕국으로 바뀐듯한 경치에 나도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함박눈이 펑펑 온 뒤 바라본 도화공원 풍경 by혜진쌤




와! 그림 같아, 멋있다!




핸드폰 카메라 기능이 점점 좋아지면서 (달의 표면까지 확대해서 볼 수 있다니!) 사랑스러운 아이들 모습뿐 아니라 풍경을 자주 찍는데 막상 찍어보면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할 때가 있다. 렌즈를 다시 닦아보고 빛의 밝기를 조절해서 꽤나 공들여 찍어도 엥? 그냥 보는 경치랑 다르네? 카메라 성능이 암만 좋아도 역시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는구나. 그러면서 생각해 보니 그림과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 중에서도 사실 그림보다 진짜 real 한 게 더 멋있는 거 아닐까? 그래도 왜 대다수 사람들은 그리고 나는 모두 그림 같다는 말로 감탄을 했을까,

한동안 이 말에 의문을 품어서 나의 카메라 실력은 생각도 못하면서 '그림보다 멋있다! 그림을 뛰어넘네'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대자연에겐 의문의 1패를 당당하게 주기 싫었던 것 같다. 나는 이 말이 왠지 그림, 회화 같은 예술에 의문의 1승을 안겨주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여울의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을 읽었을 때도 겨울왕국 같은 멋진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넋을 잃었던 겨울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어느 때보다 지쳐있었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감이 가득했던 시기였다. 정여울 작가에 대해 잘 몰랐는데 예전에 〔글 쓰는 오늘〕에서 함께 한 필사에서 정여울 작가의 글을 발견하니 반가웠다.





심드렁한 그림 속에서도 환대받는 기분을 느끼는 곳 - 바로 미술관




자연이 그저 경이롭다면 미술관에서 내가 느낀 무수한 감정들은 바로 '환대'였구나!



개념의 울타리를 치지 않고 관용의 한계를 정하지 않고, 정체성의 그물에 걸리지 않고, 타인을 맞이하는 길은 어디 있을까. '무조건적인 환대'란 당신이 타자, 새로 온 사람, 손님에게 어떤 답례도 요구하지 않는 것, 심지어 그의 신원조차 확인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것은 당신의 공간, 당신의 가정, 당신의 나라에 대한 지배력을 포기하는 기술이라고. 
-정여울 『마음의 서재』 "우리가 서로 보이지 않는 벗임을 잊지 말자" 중에서 p.96



타인의 무한한 돌발성, 느닷없는 침입에 대해 완전히 마음을 개방해 주는 기분을 나는 미술관에서 느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하루종일 미로 같은 그곳에서 다빈치의 카툰'성모자상'스케치를 보면서 마치 처음 보는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방향 감각도 공간 감각도 전혀 없는 (엄청난 방향치에 길치다;;) 내가 구석구석 그림이 걸린 곳을 찾아다니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길을 잃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형부가 다시 미술관 앞으로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시간이 좀 늦어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전화해서 저녁에 더 늦게 오라고 하고 싶었다. 같은 그림을 또 봐도 볼 때마다 다른 풍경과 배경이 보였으니깐. 길을 잃어도 즐거운 곳이 있다면 거기가 미술관이란 걸 깨달았다. 거기는 방마다 곳곳에 앉아서 쉴 수 있는 둥근 소파 같은 의자가 있었는데 어느 구역엔 청소하던 청소부 아저씨도, 아기를 안고 온 어린 엄마도, 휠체어를 타고 온 장애인도 모두 거기서 함께 쉬고 있었다. 쉬면서 모두 한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르주 쇠라의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였다. 뽀얗게 뽀샵처리를 한 듯 한 유화, 우선 생각보다 커다란 크기에 압도당했고 나는 미술관에 앉아서 쉬고 있는 사람들 모습이 마치 그림 같다고 느껴졌다. 실제로 쉬면서 앉아서 한숨 돌리면서 그들도 물놀이를 하다 쉬어가는 사람들 그림을 보는 중이라니!

나는 그들의 시선을 따라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게 짜릿했다. 




조르주 쇠라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  1884년 유화 201*300 내셔널 갤러리 런던




그림 속에도 쉬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했지만 그 모습은 좀 달랐다. 표정을 전혀 알 수 없었고 축 처진 어깨나 구부정한 등이 무기력해 보였다. 샤방샤방한 배경과 달리 안 보이는 얼굴 표정이 점점 보이는 것 같은 놀라운 경험! 이런 경험을 했다. 같은 구역 위치에서 보고 있어도 미술관의 작품들은 전부 개인적인 마음을 보여주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마법처럼, 나이, 인종, 직업, 그 모든 걸 초월해서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심지어 관광객이 들썩이는 런던 한복판을 고되게 청소하는 청소부 아저씨도, 엄마 품에 안긴 아기조차도 무수한 감정을 느꼈을 거라 생각하니 그게 나한테 묘한 감동을 줬다. 나는 그때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도 쇠라에 대해서도 잘 몰랐지만(무슨 냉장고인지 가전제품 광고에서 잠깐 이 그림을 본 기억만 난다) 나를 환대해 주는 느낌을 확실히 받았다.  그림이 문을 열어주는 경험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미술관을 갈 때마다 발걸음이 가볍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림 같다는 표현도 사실 따져보면 괜히 나온 말은 아니다. 개개인에게 다가오는 엄청난 찬사, 감탄의 말이 바로 '그림 같다'라는 말 아닐까. 사진이나 진짜 풍경에서 보지 못한 또 다른 마법이 숨어있는 게 바로 그림이다. 그걸 그린 사람, 화가의 눈과 손길.

누군가를 한 번 거쳐간 완벽한 세계를 다시 찬찬히 들여다볼 기회란 별로 없는데 그림은 언제나 오픈 마인드로 우리를 맞이한다. 어서 오라고, 좀 쉬었다 가고 그냥 지나쳐도 된다고, 다음에 더 나이 들고 만나도 된다고, 아니면 그냥 벽지처럼 '느낌'만 받아도 된다고 아무 편견 없이 우리에게 손짓한다. 


정여울의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 


십수 년 전 감정임에도 영국에서 그림에 압도당하고 매료됐던 느낌이 다시 되살아났고 전에는 보이지 않던 또 다른 모습들이 들어왔다. 





세 그림의 공통점이 보이나요?




물론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그림이 재밌고 좋았지만 유독 다르게 다가온 그림들을 골라보니 놀라운 공통점이 있었다.


어린 소녀, 우유를 따르는 여인, 그리고 여인의 세 시기, 통통한 볼살의 복숭아빛 뺨을 한 샤르댕의 그림에선 어린 시절 유년의 나를 떠올렸고 유년을 거쳐가는 우리 아이들 모습이 보였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에선 우리 엄마, 살림을 하고 있는 언니와 내 모습이, 클림트의 그림에선 가장 유명한 가운데 아이를 안고 있는 아기와 엄마의 모습을 이미 (희경이가 선물해 준) 책갈피로 가지고 있어서 몰랐는데 저렇게 다 늙어버린 초라한 '늙은 여인'의 모습이 뒤에 숨어있었구나. 아름다움 뒤의 초라함, 세월, 잡을 수 없는 시간, 하지만 그게 또 다른 반복되는 생명처럼 뭔가 새로운 발견을 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의 삶을, 현재 내 모습을 그림에 투영하고 또 다른 걸 매 순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그림이 즐겁고 새로운 자극이자 동시에 쉼을 주는 것 같았다. 그냥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감탄스러운 풍경과는 또 다른 뭉클함이 분명 있었다. 


나를 찾고 싶어지는 호기심이 생겼다.



뒷모습만 봐도 즐겁다




《책 읽는 여인》, 엘링가의 뒷모습 속 여인이 툭 벗어던진 신발, 몰입해서 숙인 고개, 아직 벗지도 않은 모자, 전에는 안보였을 일상의 고단함과 그 속에 발견하는 또 다른 작은 환희가 나에게도 말을 걸고 있었다. 나라면 어떤 모습으로 책을 읽고 있을까, 저 여인은 책을 왜 좋아할까? 아, 뒷모습뿐이지만 쇠라의 그림처럼 여인의 표정이 보이는 듯하다. 





추구하는 내 모습과 현재의 나





그래, 어쩌면 나는 에드워드 호퍼의 <여름날>처럼 저렇게 하늘하늘 원피스에 구두를 신고 햇살을 받고 도심의 기둥 옆에 아무 이유 없이 잠깐 멈춰 멍하니 (하지만 젊음 그 자체로 당당하게) 있는 모습이 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의 <여름날> 모습은 이미 지나간 어떤 시기같이 느껴졌고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다고 말해준다. 그냥 지금의 나라고 생각했던 건 카미유 클로델의 <불 옆에서 꿈을 꾸다>란 아주 작은 대리석 작품인데 가까이 있다면 하나하나 다 만져보고 싶은 마음마저 들 정도로 끌렸다. 눈과 마음을 빼앗겼다. 우리가 알던 로뎅의 연인, 그녀도 저런 모습이었던 걸까. 고단한 일상 속에 지친 살림과 육아 속에, 그게 뭐든 치마가 탈 정도로 저 여인은 어떤 꿈을 꿨던 걸까. 그게 한낱 단잠으로 빠진 낮잠 속의 꿈이 아니라 내가 포기하고 잃어버렸던 또 다른 꿈인 것 같기도 해서 그 안에 있는 나를 한참 들여다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저마다 미술관이 필요하다.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 나에게 쉼이 되고 무조건적으로 나를 꽉 안아주고 열어주는 공간, 그게 사람이 되기도 취미나 그림, 또 다른 꿈이 될 수도 있다. 오직 나만의 미술관, 나에겐 그게 책을 펴서 글을 읽는 작은 일이고 글을 쓰는 좀 더 적극적인 일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사회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기도 하다. 








▶ 오직 나를 위한 미술관/ 정여울/ 웅진지식하우스 20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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