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시간이 쉬어가는 보수동 골목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은 시간도 쉬어간다.

by 한천군작가


걷다 보면 "참 좋다"하며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골목길.

나는 이 오래된 냄새가 참 좋다.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향기가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나는 생각할 것이 많을 때면 부산 보수동 책 골목을 걷는다.

"책 냄새"라는 단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오래전 헌책들 사이에서 보냈던 사춘기의 기억이 떠 오른다. 찬란했던 고민의 시절,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던 그때만의 아득한 외로움이 다시 살아나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올라온다. 매번 그 순간들에는 언제나 책 냄새가 함께 있었고, 그래서인지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않을 "책 냄새"가 나에게는 수시로 "책 기억"과 함께 와르르 달려오곤 한다.
책 여행자 중에서

처음 헌책방을 갔던 것은 친구 따라서였다. 학창 시절 참고서와 사전을 사기 위해 쪼로로 걸어가던 친구 녀석 때문에 가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혼자 묵은 추억들을 찾아서 두리번거린다.

운이 좋으면 아주 오래된 정말 갖고 싶었던 책을 헐값에 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의 발품을 팔아야 하고 또 그 수없이 많은 시간들 속에 잠들어 있는 녀석을 깨우는 데는 인내심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래도 그 냄새가 좋아 먼지를 만지는 것이 아니라 세월을 어루만진다는 생각으로 책장 앞에 서게 만드는 골목길.

이곳의 서점들은 참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친절하게도 어디에 어떤 서점이 있다고 잘도 알려준다.

이정표가...

학창 시절을 떠 올리게 만드는 상록수라는 책이 날 보고 "너 참 많이 늙었구나" 한다.

그래도 기분 나쁘지 않다. "나 보다 네가 더 나이 먹었잖아"하며 웃을 수 있으니까.

그 시절 내 옆구리에 꽂혀서 나와 함께 길을 걸었던 책이니 얼마나 반가운가. 그때의 표지는 아닐지라도...

이곳은 헌책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가구점도 몇몇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호기심에 간혹 기웃거리지만 멋스럽다는 생각만 할 뿐.

내 할머니 생각을 나게 하는 곳이라 참 좋다.

저 간판은 얼마나 나이를 먹었을까?

쿡 하고 웃어 버렸다.

몇 번을 새로 칠 한듯한 느낌의 저 간판이 가던 걸음을 멈추게 만든다.

아주 재미난 것이 또 길을 멈추게 만든다.

팥빙수 한 그릇이 생각나는 저 낡은 청색의 기계.

내 유년의 시절에만 존재하던 나이 먹은 기계가 반갑기만 하다.

"정말 이걸로 얼음을 갈아서 팥빙수를 만드나요?"

"그람 뽄인줄 압니꺼"라며 구수하게 웃어주는 아줌마도 저 낡은 기계만큼 반갑다.

아직도 내 책장에서 가끔 꺼내서 읽곤 하는 어린 왕자가 한쪽 벽에 기대어 서 있다.

잠깐씩 쉬어다가도 가라는 신호일까. 한참을 벽화를 보고 서 있게 만드는 골목이 참 좋다.

보수동 골목을 나와서 또 얼마를 걷다 보니 한 때 부산 인쇄의 중심지였던 동광동 인쇄골목.

예전 모습은 이제 추억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곳이 한 때 부산의 바쁜 하루를 대표한 곳이라고 생각하니 멋진 곳이란 생각이 든다.

영화의 도시라 그런지 걷는 곳곳에 이렇게 조형물들이 참 많다.

정감 어린 저 뻥튀기의 모습이 너무 좋다.

오늘도 변함없이 좋다를 계속 말하며 목을 축이고 앉았다.

영화 속 유명한 40계단 아래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떠 올린다.

거기쯤인가 하며 손가락으로 콕콕 찍으며 혼자 미소 짓는다.

다시 보수동 쪽으로 걸어 올라가다 부산의 명물로 통하는 용두산타워를 바라본다.

저곳도 어린 시절 추억이 참 많은 곳인데 하며 오늘은 널 볼 시간이 없을 것 같다 라고 말한다.

서둘러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정말 시간이 멈춘 곳을 찾아가는 길이니까.

이곳은 처음이다.

부산역사박물관.

들어서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 그 모습을 이렇게 재현을 해서 전시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비록 미니어처로 제작이 되어 있지만 그래도 그때로 돌아간 듯한 느낌에 천천히 구경을 한다.

거기 앞에 보이는 것이 그 시절 이곳을 지나다니던 전차다.

그 속에서 사진 촬영을 할 수 있게 만들어 두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곤 한다고 한다.

아기자기하게도 쇼윈도 안에는 케이크들이 빵 냄새를 풍기는 듯하다.

가게마다 그때 그대로라고 하니 신기하기도 하고 또 정말 그 시대에 내가 떡하니 걷는 듯한 착각까지 들게 만든다.


이렇게 걸어서 두어 시간이면 이렇게 볼거리가 많은 곳이 있다니 하며 이번 여행을 마친다.

물론 요 아래 남포동과 자갈치시장 그리고 그 유명한 깡통시장도 있지만 그곳들은 많은 사람들이 사진으로 글로 남기기에 숨은 곳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번 여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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