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by 한천군작가

긴 바람 아카시아 떨구고

하늘은 곱게 단장을 하는데

이름 없는 묘비는

구슬땀을 흘린다


길가 분수 줄기

가닥가닥 내어

하늘을 삼키려는데

풀 한 포기 누운 자리

긴 나팔소리로 아침을 맞는다


보리밭 가는 줄기

으스러지게 허리 굽히고

이야기할 사람 업는데

시든 꽃들만 주렁주렁

하늘을 포개고 누운

이름 없는 묘비만 울고 있다

장미는 가시에 찔려

붉은 피 흘리는데

길게 늘어진 나무

플라타너스 그늘로

후드득 비가

볼기짝 때려

넓은 묘지를 씻어주고 있다


유월은 오월만큼이나 아픈 달이다. 하지만 꽃이 많은 달이기도 하기에 나는 유월을 그냥 있는 그대로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산 모롱이 돌아가며 길게 늘어진 아카시아가 꽃 보다 그 잎으로 더욱 싱그러워지고, 산에는 들에는 하얀 꽃들이 참 많구나를 하기도 하는 유월.

유월은 꽃들조차도 고개 숙여 묵념을 하는 달이다. 이 글은 예전 국립묘지를 방문하면서 쓴 글인데 여전히 유월이면 그곳에서의 하루가 유독 진하게 나를 담금질하고 있다. 현충일과 육이오가 떡하니 버티고 앉아 나를 노려보는 유월 한 장 달력의 숫자들이 그렇다. 그래서일까 나는 유월이면 모든 것에 조심을 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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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 보다 더 가슴 아픈 이글이 나를 정말 이 땅에서 어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는 것 같다.

오타와에서의 3년여...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나와의 싸움을 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선물 받았지만 그 날의 고통으로 삶을 잃어버린 많은 이의 삶까지도 살아야겠다. 특히 유월이면 나는 그런 상념에 자주 잠기곤 한다. 하지만 그런 상념에 잡혀서 이번 달을 그렇게 우울하게 지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단지 그 날들을 기억하고 내게 주어진 두 번째 삶에 충실하면 되는 것 아닐까. 이런 날이니 어딜 찾고 저런 날이니 거길 찾는 보여주기 식은 싫다는 말이다.

내게 주어진 날들이 얼마일지는 모르지만 내 주변 모두를 사랑하고 내 일을 사랑하며 여지 것 해 보지 못한 일들을 하고 싶은 것이 내 바람이다. 그리고 아프리카를 계획하고 있으니 꼭 이루어야지 하는 맘으로 첫날을 시작한다. 마흔일곱의 처음 맞이하는 유월의 첫날 나는 또 하나의 다짐을 한다. 늘 나는 새 날을 살아가니 그 새날이 사라지기 전에 행복함으로 그 날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오늘도 하며 나에게 파이팅을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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