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신작 소설 -흰-
짧은 65가지의 이야기에는 하나하나가 서로 다름인데 그 속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는 마치 소설이 아닌 듯하면서도 끊어짐 없이 다시 이어지는 뭔가 말할 수 없는 신선함에 사로잡히는 책.
처음 책을 뚫어지게 바라만 보고 서 있기를 몇 분. 그리고 제목이 주는 의미가 뭘까를 고민하며 또 몇 분을 책 앞에서 서성거렸다. 생각한 대로 이 책은 때 묻지 않는 영원함의 소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작가의 세게를 엿볼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아니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정말 희 거즈를 덮어 숨어도 될 문장들이 한순간 사로잡아 버렸다.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나는 빨간 팬을 들고 줄을 긋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색으로 하얀색을 꼽는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색 역시 흰색이다. 이렇게 단일 색으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였을까를 생각하니 글 역시 쉬 넘길 수가 없다.
죽었다는 언니의 사연이 멍한 가슴을 잡게 만들었고, 지나간 봄날에 누군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당신이 어릴 때, 슬픔과 가까워지는 어떤 경험을 했느냐?"고 말이다. 그 순간 이 글 들을 써낸 나는 또한 이렇게 그 죽음을 떠올린다. "어린 짐승들 중에서도 가장 무력한 짐승.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 그이가 죽은 자리에 내가 태어나 자랐다는 이야기 등이 책장을 다시 잡고 다시 읽어 내려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린 짐승들 중에서도 가장 무력한 짐승.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 그이가 죽은 자리에 내가 태어나 자랐다는 이야기.
불특정 다수에게 외치는 외마디 절규 같은 죽지 마라. 죽지 말라는 어머니의 무명 저고리를 불태우며 어머니께서 입고 가실 것이라는 작가의 감정선이 그대로 녹아 있는 감성의 고조와 작가의 창조적인 문맥이 또 한번 나를 사로잡았다. 죽음을 마주하고 결별하는 그 심정은 과연 어떤 감정 이여야 할까?라는 물음을 던지기도 한다.
짧지만 강한 그녀의 글은 속으로 삼켰던 많은 단어들을 종이 위에 토악질하며 절규하는 것 같은 이 소설.
삶이 주는 기억들과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언어적 울타리가 너무 감미롭다. 그 언어들의 봉인되어진 기억들이 어느 순간 울타리를 넘을 때 생생함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이 책에서 나는 그런 것을 느꼈다. 현제 내가 가진 기억들 중 나는 얼만큼의 기억들을 소유하며 그 소유한 기억들이 또 얼마나 생생한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가의 매끄러운 단어들이 책장을 다시 한 장 넘기게 만든다.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럴 것이다 어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삶을 줄 수 있을까. 그래서 세상이 이가 맞아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흰색 이것으로 엮어나가는 글들이 고개를 끄득이게 만들고 또 손수건을 찾게도 만드는 것을 보니 이런 아이러니함을 나 스스로 즐기는 것은 아닐까 하며 다음 또 다음장을 넘겨갔다. 물큰하게 어떻게 저런 표현을 할 수가 있을까. 그저 스치듯이 이마를 만지고 지나가는 진눈깨비에게도 생명을 불어넣고 가지고 있는 슬픔을 마치 눈물이 맺힌 눈을 보는 것처럼 한 표현이 너무 좋다.
흰.
분명 소설이다.
하지만 에세이 같은 구도에서 밀려오는 또 다른 감동까지 맛보게 만드는 그녀의 신작이 나를 붙잡고 책장에 꽂혀있는 그녀의 책들을 다시 꺼내게 만들었다. 아마 이런 것이 그녀의 장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