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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천군작가 Sep 12. 2016

이 세상 어느 곳을 桃源(도원)으로
꿈꾸었나

작가당 9월 공동집필 주제-미술과 그림




아주 오래된 그림을 보면 숙연해진다. 마치 그림과 함께 그곳을 다녀온 듯한 느낌에 가슴 뭉클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선조들은 그림만이 아니다 그 그림에 어울리는 글 역시 적어 주신 배려가 더욱 좋은 것 같다.

안견(安堅)의 그림을 좋아한다. 이 말은 어쩌면 모순일 수 도 있겠다 싶다.

안견(安堅)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이라고는 유일하게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한 점인데 어찌 그의 그림을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물론 적벽도(赤壁圖)나 사시 팔경도(四時八景圖), 연사 모종도(煙寺暮鐘圖),  같은 유명한 그림이 있으나 이 그림이 안견(安堅)의 작품일 것이라는 추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어쩌면 그 추정과 오랜 세월 전해진 명작이기에 그의 작품이라고 보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소견이며,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지 않을까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안평대군()의 꿈속을 화풍에 옮긴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연사모종도(煙寺暮鐘圖) 일본 야마토문화관(大和文化館)에 소장

어느 날 밤 꿈속에 노닐던 신비로운 도원경()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부탁을 한 것이 안견(安堅) 일생의 대작이 되었던 것이다. 단 이틀이라는 시간을 통해 그는 마치 꿈속의 도원경(桃源境)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신비로운 그림을 그려 내는 데 그것이 현제 전해지는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인 것이다.

왜 그를 고려의 이녕(李寧)과 신라의 솔거(率居)와 함께 3대 거장이라는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후 다시 하기로 하고 그의 이야기를 이어갈까 한다.

相命肆農耕(상명사농경) 서로 격려하여 농사에 힘쓰고
日入從所憩(일입종소게) 해가 지면 쉬는 집으로 가네.
桑竹垂餘蔭(상죽수여음) 뽕과 대나무는 그늘 드리우고
菽稷隨時藝(숙직수시예) 콩과 기장 때를 따라 심는다오.
春蠶收長絲(춘잠수장사) 봄 누에 쳐서 긴 명주실 거두고 
秋熟靡王稅(추숙미왕세) 가을에 수확해도 바치는 세금 없네.
荒路曖交通(황로애교통) 황폐한 길이 왕래를 막았으니
鷄犬互鳴吠(계견호명폐) 닭과 개는 서로들 울고 짖는구나.
俎豆猶古法(조두유고법) 제사는 여전히 옛 법대로이고
衣裳無新製(의상무신제) 의복도 새로운 제도가 없다오.
童孺縱行歌(동유종행가) 아이들은 마음껏 다니며 노래하고
斑白歡游詣(반백환유예) 노인들은 즐겁게 놀러 다니는구나.
草榮識節和(초영식절화) 풀이 자라면 시절이 온화할 줄 알고
木衰知風厲(목쇠지풍려) 나뭇잎 시들면 바람 매서울 줄 아네.
雖無紀歷志(수무기력지) 비록 세시 절후의 기록이 없어도
四時自成歲(사시자성세) 사계절이 절로 한 해를 이룬다.
怡然有餘樂(이연 유요 락) 기쁘고 넘치는 즐거움 있으니
于何勞智慧(우하니 지혜)무슨 일에 애써 지혜를 쓰랴.

陶淵明(도연명)의 桃花源記(도화원기) 중에서.
桃花源記(도화원기)는 강의 발원지에 있는 복숭아꽃 피는 고을이라는 글로 桃花源詩(도화 원시) 앞에 있는 小記(소기)이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도연명(陶淵明)의 시가 떠 오른다.

그것은 마치 현실세계를 그린 듯 하지만 도원(桃源)이 있고, 꿈속에서 보았다는 도원(桃源)의 선경(仙境)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으니 그 변화가 무한하기 그지없다. 

이 그림에서 보이는 화풍은 곽희(郭熙)풍을 따랐다고 하지만 그것은 일부의 이야기일 뿐 필자의 견해로 볼 때 이 그림 속 화풍은 이미 금() · 원() · 명(明) 때의 화법을 두루 섭렵한 안견(安堅)의 자기만의 독자적인 화풍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조선 전기의 그림들은 송과 원의 화풍이 그대로 잔존하는 북종화가 성행을 하였다. 이때부터 수묵산수(水墨山水)가 발달하였고, 이때의 수묵산수(水墨山水)는 이른바 눈으로 즐기기 위함의 일종이었던 감상화(鑑賞畵)의 성격을 띠는데 곽희(郭熙)나 이성(李成) 등으로 대표되는 북종화 법을 주축으로 하면서 또 하규(夏珪)나 마원(馬遠)에서 시작되는 남송의 원체 화법이 조선시대 초기 회화의 범본(範本)이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세종(世宗), 문종(文宗), 성종(成宗)이 모두 그림을 그렸고 그 화풍 역시 북 종이 었다.

하지만 남송의 원체 화법이 전해지면서 화원 중심 즉 직업화가들의 화풍이 성행하며 중국의 남송과 같이 온화한 기후, 나지막한 산, 흐르는 물 등의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하는 화풍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러한 원체 화풍도 어찌 보면 

남송(南宋)의 화원에서 활약했던 마원(馬遠)과 하규(夏珪)처럼 한쪽 구석에 치우치게 하는 일각 구도에 원경은 안갯속에 잠길 듯 시사적으로 나타내어서 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리고, 산과 암벽의 표면을 부벽(斧劈) 준법으로 처리하고 굴곡이 심한 나무를 근경에 그려 넣는 것 등의 화풍인 마하파(馬夏派)의 화풍이 주였다.

일각 구도(一角構圖) : 그림의 아랫부분 한쪽 구석에 중요한 경물(景物)을 근경으로 부각하여 집중적으로 묘사하는 구도 다른 말로는 반각 구도라고도 한다.

이렇게 화원 중심의 화풍이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에 조선 초기 회화의 발전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이 도화서(圖畵署)가 아닐까 한다. 초기 도화원(圖畵院)으로 불려진 조선시대의 회원(畵院)을 총칭하는데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처럼 그렇게 많은 수의 화원을 두지는 않았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이전(吏典)의 경관직(京官職)을 보면, 도화서는 종 6품의 아문(衙門)으로서 그 직능은 ‘장도화(掌圖畵)’라고만 되어 있다. 여기에는 정직(正職)으로서 제조(提調) 1인과 종 6품인 별제(別提) 2인이, 잡직(雜職)으로서 화원(畵員) 20인과 임기가 만료된 뒤에도 계속 근무하는 자에게 서반체 아직(西班遞兒職) 3인(종 6품 1인, 종 7품 1인, 종 8품 1인)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화원의 보직은 선화(善畵) 1인, 선회(善繪) 1인, 화사(畵史) 1인, 회사(繪史) 2인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예전(禮典)에 의하면, 도화서는 예조에 소속된 관사(官司)로서 15명의 화학 생도(畵學生徒)를 정원으로 더 두었다.라고 나온다. 이것만 보더라도 그 수가 정예인 것을 알 수 있다. 

안견(安堅)은 이런 도화서(圖畵署)에서 정 4품 호군의 벼슬까지 올랐으니 그의 화풍이 어디까지가 극인지를 보여준 것이 아닐까.


세종대왕이 양화도 근처에 희우정에서 안평대군, 성삼문, 임원준과 강가에서 달과 술에 취할 때 시구를 주어 글을 짓게 하였는데 이때 안평대군은 글을 그리고 안견이 그림을 그려 유명한 사시 팔경도가 탄생한 일화 역시 전해지고 있다. 

어쩌면 이상향을 그린 몽유도원도는 단지 안평대군만의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 모든 이의 이상향이 이 한 점의 그림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몽유 도원도는 비록 일본의 일본 덴리(天理) 대학 중앙도서관 소장하고 있으나 우리 민족의 이상향을 그린 것이기에 그리고 그의 화려하면서도 소박함이 공존하기에 명작이 아닐까. 물론 우리나라 3대 거장으로 말을 하는 고려의 이녕(李寧)이 그렸다는 천수 원남 문도(天壽院南門圖)를 말하듯이 혹은 신라의 솔거를 거론할 정도로 뛰어난 화풍임에는 틀림이 없다. 만약 도화원기를 읽지 않았다면 이 그림은 어떤 형태였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보기도 한다.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만춘(晩春)                                                                          
정묘년(1447년) 음력 4월 20일 깊은 잠에 빠져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박팽년과 함께 산 아래 이르니. 우뚝 솟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가 있고,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있다. 오솔길의 갈림길에서 어디로 갈지 몰라 서성이는데 산관야 복 차림의 사람을 만났다. 그가 공손하게 가르쳐 주는 데로 박팽면과 함께 말을 몰아 기암절벽과 구불구불한 냇가 길을 따라갔다. 어렵사리 골짜기를 들어가니 탁 트인 마을이 나타났는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멀고 가까운 복숭아나무 숲에 붉은 노을이 떠올랐다. 또한 대나무 숲과 초가집이 있고, 개울가에는 오직 조각배 한 척이 흔들거렸다. 한눈에 도원동임을 알아차렸다. 최항, 신숙주도 동행했는데 제각기 신발을 가다듬고서 언덕을 오르거니 내려가거니 하면서 두루 즐거워하던 중 홀연 꿈에서 깨어났다.
안평대군의 기문.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아주 특이한 양식을 구사한다.

먼저 두루마리 그림은 통상적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전개를 하는 것이 통상적인 예이다. 이 그림 역시 두루마리 그림이다. 두루마리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이 원칙이었다. 漢(한) 나라 때 蔡倫(채륜)에 의해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나무 혹은 대나무를 쪼개서 그 위에 글을 적었다. 일명 木簡(목간)이라고 불렀고, 대나무 조각에 글을 쓴 것을 竹簡(죽간)이라고 불렀다. 이 둘을 합하여 이를 때에는 簡牘(간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여기에 글을 쓰다 보니 세로 쓰기가 편하였고 오른손으로 글을 써야 하기에 오른쪽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편하였기에 그 원칙을 따른 것이다. 그래서 그림에서도 오른쪽에서 서서히 시작하여 그 중간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형식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 그림은 그와 반대로 왼편 하단부에서 오른편 상단부로 전개되고 있으며 왼편의 현실세계와 오른편의 도원 세계가 대조를 이루고, 몇 개의 경관이 따로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큰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왼쪽부터 시작해 꿈속에 말을 타고 들어간 평탄한 도입부가 있다. 중간 부분은 도입부에서 이어지면 도원을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험한 산 무더기가 보인다. 그리고 폭포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분지처럼 보이는 곳에 도원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화풍은 종래에는 볼 수 없는 특이함이 있다. 그리고 도입부는 보통의 산수화처럼 정면에서 본 것을 그렸으며 도원의 풍경에서는 부감법(俯瞰法)을 썼다. 즉 위에서 내려 보는 것처럼 묘사 시각을 달리한다. 이렇게 두 가지 시각을 그린 것은 아마도 현실과 꿈을 다른 세게를 표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은 다른 산수화와는 다르게 자연을 아주 장엄하게 그린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중국의 화풍을 나름의 화법으로 해석한 것이 보인다. 이는 중국 북송 때 이곽을 중심으로 거 비 파적(巨碑派的) 화풍을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북송의 그림 형식을 그대로 따라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만의 독자적인 면이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틀에 잡힌 유가적 세계가 아닌 어쩌면 자유분방한 도가적인 사유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안평대군 서시 
이 세상 어느 곳을 도원으로 꿈꾸었나 은자들의 옷차림새 아직도 눈에 선하거늘 그림으로 그려놓고 보니 참으로 좋을시고 천년을 이대로 전하여 봄직하지 않은가 그림이다 된 후 사흘째 정월 밤. 치지정에서 마침 종이가 있어 한마디 적어 밝은 정취를 기리노 라 [그림 완성 3년 후 1450년 정월 어느 밤에 쓴 시문]  
두루마리 그림
手卷(수권), 卷畵(권화)라고 부르는데 그 형식이 주로 가로로 펼쳐서 본다 하여 橫卷(횡권)이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림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국보급 그림이 일본에 있는가?

가슴 아픈 현실에 먹먹함을 감출 수가 없다. 약 6년간 세간에 알려지고 존재하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1453년 세상에서 사라졌다. 임진왜란 때 제4진으로 조선에 출병한 시마즈 요시히로가 경기도 고양현 소재 사찰 대자암(大慈庵)에 있던 이 그림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가지고 간 것으로 추정만 하고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일본이 침략을 한 것으로 역사에 명시가 되어있는데 이것은 어쩌면 약탈이란 것이 증명이 어려운 이유가 된다. 아직도 일본땅에서 외부에 보이지도 못하고 꼭꼭 숨겨두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만이 알 것이다. 우리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그들은 숨기려 드는 것일 것이다.

440년이 지난 1893년 일본에 등장한 우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우여곡절 끝에 덴리대학교에 비장되었는지도 궁금증 중 하나가 아닐까. 그림을 보면 아픈 과거가 보이니 어찌 저것이 이상향일 수 있을까.


고려시대 화가 이녕(李寧)

젊어서부터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인종(仁宗) 2년(1124년)에 추 밀사(樞密使)를 따라 송(宋)에 들어갔는데 휘종(徽宗)이 한림 시조(翰林侍詔)인 왕가훈(王可訓) 등으로 하여금 그에게서 그림을 배우게 하고 또 그에게 본국의 <예성강도(禮成江圖)>를 그려 드리라는 명을 내렸다 한다. 그가 그려 올리자 휘종이 보고 감탄하여 <근래에 고려에서 따라온 화공이 많으나 이녕이 제일이다>라고 칭찬하였다. 또 송나라 상인(商人)이 인종(仁宗)에게 그림을 하나 헌정했는데 인종이 이를 중국인의 신품(神品)으로 오인하고 이녕에게 보여준 바 그것이 바로 이녕의 그림 <천수 원남 문도(天壽院南門圖)>임을 확인하고 더욱 사랑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高麗史)>에 전해진다. 의종(毅宗) 때에는 내각(內閣)의 회화를 관장할 만큼 재능을 인정받은 국제적인 화가로 알려지고 있으나 유품으로 남겨진 작품은 없다.
신라의 전설 솔거(率居)

率居, 新羅人, 所出微, 故不記其族系, 生而善畫, 嘗於皇龍寺壁畫老松, 體幹鱗皴, 枝葉盤屈, 烏鳶燕雀, 往往望之飛入, 及到, 蹭蹬而落, 歲久色暗, 寺僧以丹靑補之, 烏雀不復至, 又慶州芬皇寺觀音菩薩晉州斷俗寺維麾像, 皆其筆蹟, 世傳爲神畫

솔거는 신라 사람이나, 그 난 곳은 정확하지 아니하다. 그렇기에 그 핏줄에 대해 여기 쓸 수 없다. 그림을 능히 잘 그려 일찍이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더니, 줄기와 몸통은 비늘이 주름 잡히고 가지와 잎은 서려서 얼크러졌다. 까마귀와 솔개와 제비와 참새가 거기에 날아들어가려 하다가 벽에 이르러서는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세월이 오래되어 색이 바래자 절의 중이 단청으로 고쳐 그렸더니 까마귀 참새가 다시는 날아들지 않았다. 또 경주 분황사의 관음보살과 진주 단속사의 유마상도 다 솔거의 붓의 자취로, 세상에 전해져 귀신의 솜씨라 하였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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