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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천군작가 Sep 29. 2016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혼일강리 역대 국도 지도)

한국(韓國)의 고지도(古地圖) 이야기-1-

고산자() 김정호(浩)의 영화가 나오면서 우리의 고지도에 대한 새로움을 직면하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교과서에서만 봐왔던 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로 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그의 생에 대한 기록이 아주 미묘하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하다 먼저 집어 든 것이 요즘 화재가 되고 있는 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하는 것이 옳을 것이란 생각에 참고 자료를 봐 가면서 글을 이어 나간다.


먼저 고지도는 그 시대 인류의 세계관과 지리적 시야를 비롯하여 측량방법과 기술의 진보 단계 등을 아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동양의 경우에는 어떤 측량기술로 어떤 형태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많이 느끼게 된다. 그 궁금증을 풀어 줄 단서들이 너무 빈약하다는 것 역시 안타까운 일이다.

서양의 고대 지도로는 야자잎과 조개껍데기로 만든 항해용 지도가 마셜군도의 원주민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이집트의 경우 BC 1300년경 누비아 지방의 금광 안내지도와 BC 700년경 바빌로니아 사르곤 대왕의 원정 이야기를 기록한 점토판 지도 등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는 더욱 활발하게 지도를 제작하였다고 하는데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자이자 탈레스의 제자인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가 최초로 세계지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천구()의 중심에는 지주가 없고, 정지해 있는 원통형의 지구 주위를 해·달·별이 돈다고 생각하였고 이때부터 알랙산드로스의 세계 원정으로 지구 구형설이 확립되면서 지리학적으로 지도는 급속도로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이후 처음으로 지도에 경선과 위선이 표기된 지도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의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였던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의 지도이다. 하지() 때 태양고도의 관측에 의한 지구의 크기를 정하고 근사치를 얻었다는 그의 지도에는 인도와 영국 그리고 아일랜드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경선(經線)
적도를 기준으로 한 위선(緯線)과 직각으로 만나며 지구의 양극을 지나는 세로금 남북선. 자{子 ; 북)와 오(午 ; 남)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자오선(子午線)이라고도 한다.
국제 경 · 위도에서는 영국의 그리니치 전문대를 지나는 경선을 본초자오선이라 하고 그것을 기준 경선으로 하여 동서를 각기 180°로 분할하고 있다.
경선은 위선과 달리 모양과 길이가 같고 양극에서 한 점에 모인다.

위선(緯線)
적도를 0도 , 북극점과 남극점을 각각 90도로 정하고, 적도와 평행으로 지구 표면의 같은 위도의 지점을 잇는 가로의 선이다. 그리고, 적도의 북쪽을 북반구, 남쪽을 남반구라고 하며, 북반구의 위선 상의 위치는 북위, 남반구의 위치는 남위로 나타낸다. 북위 23 7 의 위선을 각각 북회귀선, 남회귀선이라 하며, 북회귀선에는 하지에, 남회귀선에는 동지에 태양이 바로 위를 지난다. 위도 66 33 의 위선은 극권(極圈)이라 한다. 극권의 고위도 쪽에서는 겨울에는 하루 종일 해가 보이지 않는 날이, 여름에는 해가 지지 않는 날이 생긴다.

이외에도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의 지리학 안내라는 저서에 실린 세계지도가 있는데 이는 지구의 둘레를

360˚로 등분한 경선 위선 망을 설정하고 원추 도법에 유사한 투영법으로 제작했다. 

여기서 원추 도법(圓錐圖法)은 지구본의 중심에서 지구본에 씌운 원추에 경선과 위선을 투영하고 이를 다시 펼쳐 평면으로 만드는 도법이다. 보통 북극이나 남극의 위에 중점을 두고 중위도 지역을 보여주는 지도에 쓰인다. 원래의 원추 도법에서 원추의 중심으로부터 방향은 실제 지구에서의 방향보다 압축되므로, 극이 중심인 경우 경선은 등각 간격의 직선이다. 다른 말로 원뿔 도법(conic projection)이라고도 한다.

네덜란드의 메르카토르 (Mercator :1512~94)가 지도상의 임의의 항정선(航程線) 또는 방위선을 직선으로 나타내고, 방위각이 항각(航角)이 되도록 고안한 메르카토르 도법을 창안함으로써 서양의 고지도는 현대 지도로 변모하게 되었다. 하지만 적도에서 멀어질수록 축척 및 면적이 크게 확대되어 극을 표시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동양의 지도는 어떤가.

동양의 지도는 철저하게 중국 중심의 지도가 많다.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지도는 11세기에 제작된 우적도(禹跡圖)와 화이도(華夷圖)를 들 수 있다. 하지만 동양 최고의 지도로 꼽히는 것은 단연 혼일강리 역대 국도 지도이다.


화이도(華夷圖) 탁본

바로 우리 선조의 작품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선사시대의 암각화에서도 지도와 같은 요소를 갖춘 것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삼국시대에는 세 나라가 지도를 제작하였고 행정구역을 정비하는데 이용했다는 기록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을 외교에도 사용했다고 한다. 

1953년 평남 순천군에서 발견된 4세기경의 고구려 벽화 요동성 총(遼東城塚)에 그려진 ‘요동성도’를 가장 오래된 지도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영류왕 11년(628)에 견당사를 통해 중국(당나라) 당 태종에게 봉역도(封域圖)라는 지도를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며 각종 지지서(地誌書)에도 지도 제작 기록이 나타나지만 현재까지 전해지는 지도는 없다.  


의종 2년(1148) 때 이심과 이지용 등이 송나라 사람들과 오도양계 주현 총도(五道兩界州縣總圖)를 제작하였고, 1396년에 이담이 삼국지도를, 윤보가 오천축 국도(五天竺國圖)라는 세계 지도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또 중국 명나라 때 출판된 라홍선의 지도첩인 광여도(廣輿圖)에 나타나는 조선 지도가 13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지도의 사본이라고 추정된다.

본격적인 지도 제작 사업은 세종 대에 이르러 시작되었다. 각 지역의 행정 기구를 동원하고 또 각지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지도 제작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세종 19년(1437)에 천체를 관측하는 도구인 대간의()가 완성되어 위도 측정에 사용되었으며, 천문용 시계인 혼천의()의 발명으로 경도 측정도 가능해졌다. 그리고 세종 23년에는 10리마다 자동적으로 북을 치게 고안된 기리고 차(記里鼓車)가 제작되었는데 오늘날 거리를 측정하는 방법으로 기리고 차와 동일한 원리를 이용한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마라톤 경기의 거리를 측정하는 데 쓰이는 존스 카운터라는 장치이다. 이 장치를 자전거 앞바퀴에 부착하고 마라톤 거리를 달리면 회전한 바퀴 수를 알려주어 이를 바탕으로 이동한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 택시의 이동 거리를 측정하는 타코미터도 같은 원리이다. 

세조 때는 측량 기구인 인지의(印地儀)를 만들어 지도 제작에 사용했다. 이처럼 세종~세조 기간에 과학적인 지도 제작을 위한 기초 작업이 완료되어 새로운 지도 제작 방법을 도입하는 등 획기적인 진보가 있었다.
세조 9년(1463)에 정척(鄭陟)과 양성지(梁誠之)에 의해 동국지도(東國地圖)가 만들어졌는데 이 지도에는 교통, 일정, 이수, 항구 등이 비교적 상세히 표현되었으며 한강을 비롯한 큰 강들의 유로도 정확히 표현되어 있다. 동국지도의 제작에는 산수의 형세와 풍수적 특성을 읽는 상지관(相地官), 길이를 측량하는 산사(算士), 지지 전문가인 관사(官士)그리고 지도에 색칠을 하는 화원(畵員)이 협력하여 과학적인 근거에 의해 전국도, 도별도, 군현도가 합쳐진 지도첩으로 만들었다.


그 외에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이 회(李薈)의 팔도지도()는 태종 2년에 의정부에서 제작한 본국 지도(本國地圖)와 유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혼일강리 역대 국도 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는 조선 부분을 크게 그렸다. 또 조선 초기인 중종 26년(1531)에 만들어진 지리지인「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 전체를 그린 팔도총도()와 도별 지도 8장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지도의 판심()에 ‘동람도’라고 적혀 있기 때문에 이런 유형의 지도를 동람도()라고 부른다.


혼일강리 역대 국도 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는 1402년(태종 2)에 좌정승 김사형(金士衡), 우정승 이무(李茂)와 이 회(李薈)가 만든 세계지도.

혼일강리 역대 국도 지도에서
혼일: 混一은 통일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개국(開國)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혼일이라는 용어가 원 대(원나라)에서는 집권 초기에 원나라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된 용어이다.
강리: 疆理는 영토, 땅을 의미함
역대 국도: 역대 중국 제왕들의 도성(수도), 중국 부분에 상세히 나열되어 있는 빨간 점들이 역대 수도들임. 


이 지도의 제작시기가 태종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이 되는 해로 당시 조선의 조정에서는 천도에 대한 논의가 활발했다고 한다. 따라서 천도에 가장 적합한 지역을 찾기 위해 중국의 역대 수도의 위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 논의에 참가한 인물이 좌정승 김사형과 우정승 이무로 권근의 발문에 의하면 혼일강리 역대 국도 지도의 제작자로도 이름 올린 사람들이다.


중국의 지도에서는 하천이 아주 세밀하게 표현이 되어있다. 이는 치수사업이 국가의 중대사업이자 과제였기 때문에 지도에 하천을 자세히 나타내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지도에서는 해안가에 위치한 포구와 포구명이 강조해서 표현을 하였다. 해안가 포구가 국방상 중요하기 때문임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대동강이 지금의 한강보다 크게 그려져 있는 것은 아마도 고려시대의 지도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한다. 고려시대에는 평양과 개성이 중심지였기에 대동강이 한강보다 크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김사형(金士衡)은 고려말 조선초  초의 문신이다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음보(蔭補)로 관직에 출사 하여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후 감찰규정(監察糾正) 등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이후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 회군 뒤에는 교주 강릉 도도 관찰 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가 되었다.
1396년 문하 우정승이 되고 겸 오도 병마 도처 치사에 임명되어 대마도 원정군을 지휘하였다.
1397년(태조 6년) 우정승으로 그해 10월 가례도감(嘉禮都監) 제조에 겸임되었다.
1402년에 영사 평 부사(領司平府事)로써 이무(李茂), 이 회(李薈) 등과 함께 혼일강리 역대 국도 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편찬하였고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개국공신 중에서 태조대왕이 극진히 아낀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며 신중하고 분수를 지키는 처세로 벼슬을 지냈으며 벼슬을 하면서 한 번도 탄핵받은 일이 없었다. 
이무(李茂)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 때 밀직사사가 되었으나 유배된 조영길(趙英吉)이 도망간 것을 알고도 고하지 않아 한때 파직되었다. 공양왕 때에는 이인임(李仁任)의 일파라 하여 곡주에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되자 다시 등용되어 1393년(태조 2) 개성 부윤이 되었으며, 그 뒤 중추원사가 되어 예성강·강화 등지를 시찰하고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다. 그해 사은사(謝恩使)로 명에 다녀왔다. 1396년에는 도체찰사가 되어 5도의 병선을 지휘하여 일본의 이키 섬[壹岐島], 쓰시마 섬[對馬島]을 정벌했으며, 그 뒤 참찬 문하 부사·판 예조사·의흥 삼군 부좌 군 절제사를 지냈다. 1398년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 때 남은·정도전(鄭道傳) 등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고 방원(芳遠:뒤의 태종)에게 밀고하여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봉되었다. 1400년(정종 2) 동북 면도 순문 찰리사(東北面都巡問察理使) 겸 의흥 부윤(義興府尹)이 되었으나, 그해 정도전 등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강릉으로 유배되었다. 풀려난 후에는 판 삼군부사가 되어 방간의 난을 평정하는 데 협력해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봉해졌다. 1402년에 우정승이 되었으며, 단산 부원군(丹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이듬해에 영승 추부사(領承樞府事), 우정승 겸 판 병조 사가 되었다. 1406년 김사형(金士衡)·이 회(李) 등과 함께 원나라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 聲敎廣被圖〉와 천태승(天台僧) 청준(淸濬)의 〈혼일강리도 混一疆理圖〉를 합편·정리하고, 조선과 일본을 넣어 〈혼일강리 역대 국도 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만들었다. 1408년에 병으로 사직하고, 이듬해 민무구(閔無咎)의 옥사에 관련되어 창원으로 유배되었다가 안성군 죽산(竹山)에서 사형당했다. 뒤에 신원되었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이 회(李薈)
「팔도도(八道圖)」의 제작자이다. 본관은 태안(泰安). 자는 송곡(松谷)·삼탄(三灘). 소윤 이경(李卿)의 아들이다.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조선 개국 후 태조에게 발탁되어 1392년(태조 1) 병조정랑이 되었다. 1394년 변 중량(卞仲良)과 함께 정권과 병권의 분립을 주장하는 소를 올렸다가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1407년(태종 7) 양녕대군을 시종하여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벼슬은 사간에 이르렀고, 시문에도 능하였다. 그의 업적은 우리나라 지도 발달사에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한 「팔도도」의 제작에 있다.
「팔도도」는 1402년 제작되어 조선시대 최고(最高)의 지도로 평가되고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만든 세계지도인 「혼일강리 역대 국도 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의 조선 팔도 부분에서 「팔도도」를 추정할 수 있다. 한반도의 윤곽이 비교적 정확한 세밀도이며, 독특한 산맥 표현방법과 조선 전기 지도제작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지도이다.

현전 하는 동양 최고의 세계지도이자 당시로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훌륭한 세계지도였는데 조선 부분이 상대적으로 크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동서 문명교류의 산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지도를 들 여자 보면 우리나라가 아주 크게 묘사가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세상의 중심이 중화와 오랑캐 세계인 이()로 나누는 화이관(華夷觀)에서 출발해 중국을 중심에 놓고 그 주변에 몇 개의 나라를 배치하던 중화주의적 지리관에서 탈피하고 조선의 주체성을 강조한 점이 그렇게 표현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서쪽에 유럽과 아랍을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그려 넣었는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지명을 표기한 것이다. 먼저 유럽의 경우 약 100여 개의 지명이 표기되어 있으며 아프리카의 경우 35개의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높이 평가하여 최고의 지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위대한 유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지키지 못한 것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확도를 보면 가히 세계적이란 말이 허언이 아닌 것이다.

세종실록에는 박 돈지(朴敦之)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1401년에 일본 지도를 가지고 돌아온 기록이 있다. 이를 기초로 일본을 표기하였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일본의 북동부 지방이 돌기(突起)로 표현된 행기도(行基圖)의 일종으로 판명되며 방위는 서쪽이 북쪽으로 잘못 그려져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포함하고 있지만 지중해를 강으로, 인도 반도를 단순한 해안선으로 표현하는 등 지도의 왜곡이 심하다. 이는 지도 제작 당시 유럽과 아프리카, 인도 등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지도는 압록강의 상류와 두만강의 유로가 부정확하지만 서해안과 동해안의 해안선이 현재의 지도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현전 하는 동양 최고의 세계지도이고 당시로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훌륭한 세계지도라고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는 이 회의 <팔도지도>도 이 지도의 우리나라 부분을 통해서 그 면모를 알 수 있다. 이 지도의 원본은 전하여지는 것이 없고, 사본이 일본 경도에 있는 류코쿠대학(龍谷大學) 도서관에 전하여지고 있다. 고무창(古茂昌)·고여연(古閭延)·고우예(古虞芮)로 표기된 지명으로 볼 때 1459년 이전에 모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88년에 류코쿠대학 지도와 거의 같은 지도가 또 일본 구주(九州)의 혼 코사(本光寺)에서 발견되었다. 이 지도의 크기는 류코쿠대학 본보다 약간 크며 세로 147㎝, 가로 163㎝이고 류코쿠대학 본이 견지(絹地)인데 혼코 사본은 한지(漢紙)에 그려져 있다. 이 밖에도 유사 본이 일본에 있는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이 지도들이 우리나라에는 하나도 없고 일본에 모두 있는 것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또는 일제 강점기에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세게 최고의 자부심을 가져야 할 우리의 유산이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에 더 많이 전해지고 있는지 아픔을 금치 못한다.

다음 편을 준비하며 이번 혼일강리 역대 국도 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를 이야기하기 위해 고대 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 많이 한 것은 고지도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함이었으니 양해를 바란다.

영화 한 편으로 다시 조명되는 우리의 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갈까 한다.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를...



참고문헌

한국 고세계 지도(韓國古世界地圖)의 특색과 이에 대한 외래적 영향(外來的影響)에 관한 연구

한국 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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