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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천군작가 Oct 09. 2016

추상

고암(顧庵) 이응노(李應魯) 화백

묵화...
묵향이 나를 불러 앉히고
다가선 넌
작은 녹차 잔으로 
그 향이 난해하여라
무엇을 말하려는지
묻지 말고
그저 고암 선생의 그림이 돼라
수묵추상...
사람인가?
동물인가?
누구인가?
그러지 말어라
고암 선생의 마음으로 들어앉아
자연과 인간을
조형탑구의 과정을 느껴라
너무도 넓은 삶을 느껴라
그러면 취하리라....


1964년 작 추상 수묵담채  56.5 x 36Cm
고암 이응노 님의 수묵담채 추상이란 작품을 보고...
묵죽화에서 산수화, 수묵추상, 문자추상, 인간 역작 등 고전과 현대, 동양과 서양,
자연과 인간, 남과 북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자기혁신을 실현한 고암의 작품을 통해
그의 조형 탐구 과정이 남긴 폭넓고 깊이 있는 삶과 예술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1964년 작으로 56.5 x 36Cm의 작품으로 수묵담채이다.


서예적 추상

한지와 수묵 등 동양화 매체를 사용하지만 그  스스로 "서예적 추상"이라고 이름 붙인 독창적 예술 세계를 창조한 세계적인 화가 고암(顧菴) 이응로 화백은 1924년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청죽"으로 입선하며 데한민국 화단에 나오고 혼고(本鄕) 연구소 등에서 서양화를 연구하는 등 근대적인 미술교육을 받았다. 아마도 이때 그는 동양적 이미지와 서양화를 접목하기 시작하였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서예라는 고유의 화법을 서양화라는 배경에 옮겨 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 중 조각을 볼 때 한국의 미가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한글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다는 것이다. 그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는 유럽인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로 인해 1968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전에서 명예 대상을 획득하여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청죽 과 대나무(사시장춘)이라는 작품.
가난이 준 콜라주(Collage)

1960년 1월에 파리에 정착하여 예술활동을 하던 그에게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가난이었다. 박인경 여사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을 하였다.

"파리에 올 때 준비해온 자금이 다 떨어져 경제적으로 아주 힘이 들었지만 여러 화랑에서 내민 달콤한 유혹들을 모두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로 인해 이 화백은 물감과 화선지를 구입할 재료비 충당이 어려웠다. 하지만 배고픈 시절에도 생활보다는 그림을 선택한 그가 존경스러웠다"

그 시기에 그는 버려진 잡지와 신문지 그리고 포장지 등을 찢어 붙여 콜라주 작품을 만들었지만 그 당시의 파리에서는 이런 종류의 콜라주 작품을 많이 만들었지만 그의 콜라주 작품은 달랐다. 종이를 찢어 붙이는 것만 아니라 거기에 우리 고유의 수묵 혹은 담채를 섞어주었다. 그만의 독창성이 아닐까. 유화에서 볼 수 있는 물감의 다양한 기법에 의해 나타나는 물감의 겹침, 광택, 필촉의 흔적, 팔레트 나이프의 효과 등에 의해 풍부한 표현력을 주는 마티에르(matiere)적 표현까지 자연스럽게 추구를 하였다. 이런 그의 작품에 매료되기 시작한 파리는 1962년 11월 파리의 폴 파케티 갤러리에서 '이응노, 콜라주' 초대전을 개최하고 폴 파케티 갤러리와 전속으로 계약하였다.

구성 1962년 캔버스위에 종이 콜라주
동백림 간첩사건
중앙정보부는 1967년 7월 8일부터 17일까지 7차에 걸쳐 ‘동백림(당시 동독의 수도인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 적화 공작단’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문화예술계의 윤이상·이응로, 학계의 황성모·임석진 등 194명이 대남 적화공작을 벌이다 적발되었다”라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에 따르면 사건 관계자들은 1958년 9월부터 동백림 소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利敵) 활동을 한 데 이어 일부는 입북 또는 노동당에 입당하고 국내에 잠입하여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또한 중앙정보부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민족주의 비교연구회도 여기에 관련된 반국가단체라고 발표했다.  
이후 사법부는 동백림 및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사건을 별도 심리하기로 결정하고 1969년 3월까지 동백림 사건 관련 재판을 완료하여 사형 2명을 포함한 실형 15명, 집행유예 15명, 선고유예 1명, 형 면제 3명을 선고했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1967년 그는 한국전쟁 당시에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베를린에 갔다가 중앙정보부에 납치되어 수감된다. 하지만 왕성한 예술적 영감을 수감 생활도 막지는 못했다. 수감 중에도 그는 나무 젓가락을 이용한 작품을 만들었고 나무 도시락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떼어내 합판 위에 먹다 남은 밥풀을 이용하여 붙이고 겹치고 겹쳐진 투박한 질감 위에 고추장과 간장을 이용한 채색을 통해 도시락 콜라주를 만들었다. 

1969년 3월 석방 후 예산 수덕여관에서 요양하다가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 예술계와는 단절이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스위스, 미국, 벨기에 등지에서는 수십 차례의 초대전에  출품하는 등 꾸준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수감중에 만든 도시락 콜라주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이어가도록 하자.

그의 이야기를 이렇게 맺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후 프랑스에 귀화를 한 이야기와 그의 대표적인 작품 세계인 문자추상에 대한 이야기 역시 다음 편에 이어갈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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