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顧庵) 이응노(李應魯) 화백
어디에 한들 어떠하리
영혼이 노닐면 그만이지
무언인들 어떠하리
내가 그곳에 있는 것을
묵향이 내 고향인데
어디에서 그린다 한들
그리운 향수가 아닐런가
고암 이응노 화백의 수묵담채를 보고.
동양적인 멋과 서양화의 묵직함을 어우러지게 만든 그만의 독창적인 화풍 그중에서도 수묵 담채를 이용한 추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번에는 그의 후기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자.
수묵담채는 앞에서 짧게 이야기한 것과 같이 묵죽화에 능했던 고암 선생이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예술을 놓지 못하고 당시의 콜라주에 독잧적이면서도 동양적인 화풍을 더해 그만의 화풍으로 만들어 버린 것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후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인간적인 내면을 그린 군상 시리즈는 세상을 모두 담은 것 같은 맛이 있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야기할 문자(한글)에 대한 그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한다.
문자추상은 자연으로의 회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수메르 또는 엘람인들이 사용한 문자를 우리는 상형문자라고 한다. 물론 한자의 초기 형태 역시 여기에 넣어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상형문자는 농산물 혹은 그들만의 공작품을 기록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다가 선형 문자(線形文字)를 거쳐 설형(楔形文字) 문자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러한 상형문자는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의 형태를 그대로 담았다. 고암 선생의 문자 추상을 보면 마치 고대 상형문자처럼 자연을 그대로 닮았다고 느껴진다. 특히 한자의 자모와 획으로 구성된 반추상 작품들은 더욱 그렇다. 자연과 인간을 담으려는 그의 노력이 다분히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그의 철학이었고 내면에 자리 잡은 확고한 정신이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그만의 독창적인 화풍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치 고대 그리스인들의 히에로글리프(hieroglyph)처럼 느껴지는 것도 필자만의 느낌이 아닐 것이다.
히에로글리프(hieroglyph)
그리스어로 "새겨진 신성한 문자"라는 뜻으로 「성각(聖刻) 문자」또는 「신성문자」로 번역된다. 글자체는 그림 또는 도(圖)로, 표의 혹은 표음으로 사용됐다.
추상은 서예와 구성의 만남이다.
서양화는 흔히 캔버스에 유화를 이용하여 굵게 혹은 겹쳐가며 그림을 그리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물론 그 재료에 따라 유화·수채화·펜화·연필화·파스텔화·크레용화·과슈화 등 많은 장르를 가진다. 그리고 그 표현에 있어서 구상 비구상화로 나뉘는데 그의 작품들은 서양화이면서도 동양화다.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을 한다. 그것은 서양화에서 볼 수 있는 논리적이며 화면에 덧바르거나 깎는 식의 화법에 동양화에서 볼 수 있는 한 번의 터치로 그려지는 것 두 가지 모두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의 그림 속에 숨어있다. 바로 캔버스에 화선지를 붙이고 수묵 혹은 다른 동양화의 재료들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독창적인 화풍을 1962년 프랑스 파리 파게티 화랑에서의 초대전을 계기로 널리 알려져 국제적 주목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의 문자추상은 1940~50년대에 성행했던 앵포르멜(Informel) 추상이 부정형(不定形)이라면 그의 문자 추상은 비정형(非定型)의 조형언어(造形言語)이며 독창성이다. 그리고 차별성 역시 가졌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다. 서예가 주는 변화무상한 기법을 바탕으로 여백의 구조를 화면 전체에 사용하고 화선지와 수묵이 만나서 만들어 내는 자연스러운 스며듬과 얼룩, 힘 있는 강함 등이 모두 담겨 있지만 추산적 구도야말로 결코 동양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동양화에서 볼 수 있는 수직적 구성은 동양적인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흔히 말하는 족자형 구도를 가지며 시각적 깊이감 마저 가지고 있다.
좌) 엥포르멜적 추상 - 술라주, 1956년, 유화, 195 x 130cm, 파리 국립 근대미술관
우) 고암 이응노 화백의 문자 추상 1975년작 천에 유화 151 x 126cm
동양미술학교
2년 반의 짧지 않은 수감생활을 보내고 돌아간 고암 선생은 기하학적인 형태, 즉 한자의 서체 혹은 인물형 상의 결합에서 무엇인지 의문을 남기는 기하학적인 문자 추상이 나오기 시작한 시기이며 이전의 점, 선을 이용한 서예 기법 중심의 서예적 추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문자 그 자체가 지니는 질서, 즉 구상적 질서와 조형미 그리고 평면이 주는 절대성 등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마치 독일의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가 자신의 화실에서 거꾸로 놓인 자신의 그림을 보고 감탄하며 형상성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 조형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과 같이 문자의 해제 그리고 제 조립으로 인한 창조적인 조합을 추구하였으며 반복되는 평면적 전개를 보이기도 하는 시기가 이때부터였다. 또 하나 눈여겨볼 점은 단순한 구조속에 기호화한 것은 대단한 상징성을 가지는데 의식세계의 전통으로부터 발전한 고암만의 조형적 텍스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1964년 11월 초 프랑스 화단의 예술가와 각계 인사의 후원으로 파리 세르누쉬 미술관 안에 파리 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였다. 동양미술 즉 한국미술의 전도사가 되기 시작하며 유럽에 우리 미술을 전파하고 그만의 독창적인 작품들로 많은 호평을 받은 시기 중 가장 빛나는 시기가 바로 이때부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어찌 보면 박인경 여사의 피나는 노력의 결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본다. 혹자들은 박인경 여사가 아니었으면 고암의 미술세계는 그 빛을 발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말까지 하고 있으니 얼마나 열성적인 부부였는지 알 수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추상미술의 아버지이자 청기사파의 창시자로 사실적인 형체를 버리고 순수 추상화의 탄생이라는 미술사의 혁명을 이루어낸 화가.
좌) 세르누쉬 박물관(Musée Cernuschi), 우) 동양미술학교에서 학생 지도중
다음 편에서는 고암 선생의 말기 작품과 수묵담채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