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걷는 계동길

북촌 골목길-1-

by 한천군작가

맞물린 추녀 사이로 하늘이 지나가고

가끔 처마 아래로 그리움 쉴 그늘을 만든다


숨겨왔던 지난 시간들이 사진처럼

남기고 싶은 마음까지 찍어다 놓고

걷는 걸음 하나에도 숨 쉬는 지난날들

낡은 흑백 사진이 되어 가슴에 앉았다.


담쟁이가 기어오르다 숨 돌리는 사진관

담벼락에서 나는 가을볕을 만난다.

추녀 : 처마의 네 귀퉁이에 있는 큰 서까래

계동길은 가을을 만나기에 좋은 곳이다. 마치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만나고자 한다면 추천하고자 하는 골목길이기도 하다. 스믈 다섯 해 전에 처음 갈 때에는 정말 한적한 골목길이었다.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풍경의 골목길이었는데 이젠 일본 관광객들도 쉽게 눈에 띄는 것이 아마도 겨울연가 때문이 아닐까 한다. 마침 주말에 찾은 곳이라 중앙고등학교로 발길을 옮겼다. 인문학 박물관 앞을 지나면서 최지우가 저기쯤에서 걸어올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북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아마도 가회동길을 먼저 떠 올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옥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라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 작은 골목길에 숨은 것이 너무도 많아 가끔 찾아온다. 하지만 하룻밤 묵어가야 할 때는 재동의 게스트 하우스를 이용한다.

한옥 기와 모서리가
맨드라미 빛깔로 물들여 솟네
이 집 처마와
저 집 처마가
닭 벼슬 부딪치듯
사랑싸움을 하네

알배기 햇살
쏟아지는 갈 오후
한옥 뒷마당에도
따뜻한 햇살 뒹구네

신달자 님의 북촌 가을

나의 계동길 시작은 늘 그랬듯이 현대사옥에서 출발을 한다. 안국역에서 내려 처음 만나는 것이 현대 사옥이지만 그 사이로 길게 늘어선 한옥 지붕을 모자처럼 눌러쓴 가게들이 눈을 먼저 호강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이사이에 아직고

아직도 난 늙지 않았다고 외치듯 오래된 현대식 건물들도 눈에 들어온다. 최 소아과가 바로 그런 곳 중 한 곳이다. 1940년에 개원을 한 곳이니 이 동네의 터줏대감이 아닐까. 계동길의 시작은 지금부터이니 잘 따라오시길...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이 그대로다. 마치 80년대로 다시 돌아간 듯한 느낌이랄까. 누군가 말을 한 것처럼 사람이 나이를 먹고 늙지 그 길 그 건물들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저기 저 간판 하며 기와에 낡은 장판을 올려놓은 것 하며 어쩌면 그때 그대로인지 잠시 고개 돌렸다 다시 보는 듯 그대로다. 나는 다른 모습인데 저 혼자 그 시절 그대로이니 살짝 밉기까지 한다.

이곳에 오면 꼭 하는 것이 하나 있다. 흑백사진을 찍는 일이다. 나는 흑백 사진을 참 좋아한다. 시간을 딱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너무 좋아서이다. 그리고 칼라와는 다르게 예스럽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정감이 가는 것이 흑백사진만의 매력이 아닐까. 나도 가끔 사물을 흑백으로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흑백사진은 좀 더 특별한 느낌이다. 바로 폴라로이드 사진이기 때문이다. 이 사진을 작은 액자에 넣어 걸어두면 그것만으로도 인테리어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이곳의 흑백사진은 좀 더 특별함이 있다. 오래전 방식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칼라사진을 흑백으로 만들어 주는 어플과는 다르게 흑백 필름을 사용해서 그 시절 그대로의 작업을 통해 인화를 해 준다. 째깍째깍 거리는 옛날 시계 같은 느낌이랄까. 아무튼 아날로그적 감성이 너무도 풍성한 곳이라 나는 좋아한다. 그리고 꼭 한장은 찍어서 온다. 오늘도 한 장 찍을까?

이 길에서는 한옥을 구경하기 약간은 힘이 든다 볼거리에 밀려서 스쳐 지나가기 일수이기 때문이다. 북촌 하면 한옥인데 여긴 한옥이 그리 많지가 않네 라는 말을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나이 먹은 현대식 건물들에 시선을 빼앗겨서 일 것이다. 하지만 이 골목 뒤에서 오랜 세월을 그 자릴 지키고 있는 한옥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것이 골목길의 잔재미가 아닐까. 문화당 서점 사이 골목에도 건너편 왕짱구 식당 옆 골목에도 숨은 한옥들이 있다. 이런 골목길을 보고 있으면 고 길창덕 화백의 만화 속 주인공 꺼벙이가 땜통 머리를 하고 저기 어디쯤에서 걸어올 것 같은 짙은 향수를 느끼기도 한다.

걷다 보면 석정 보름 우물을 만날 수 있고 유심사 터도 만날 수 있다. 석정 보름 우물은 본래 맑은 물이 나기로 소문난 우물이었으나 양반을 사랑한 천민의 딸이 투신한 뒤 보름은 물이 맑고 보름은 흐려져 보름 우물이란 이름이 붙었다 하네요. 또한 조선시대 최초의 외국인 신부가 석정 보름 우물을 길어다 최초로 영세를 준 우물이라고 한다.

그리고 유심사 터는 만해 한용운 님이 1918년 9월 월간지 유심을 창간했던 자리도 있다. 이렇게 즐거운 볼거리 사이에 예스러움이 공존하는 곳이니 가을과 잘 어울린다는 말이 참말이 아닐까.

"유심"은 만해 스님이 편집 겸 발행인으로 1918년 9월 1일 자로 창간한 잡지로 그해 12월 통권 3호로 종간했다. 만해 스님이 40살 되던 해에 서울 계동에 셋방을 얻어 창간한 ‘유심’은 비록 3회를 펴내는데 그쳤지만 그 의미는 대단히 크다. 한국 최초의 문예지인 ‘창조(創造)’(1919.2) 보다 앞서 발행됐으며, 만해 스님이 ‘유심’에 발표한 ‘심(心)’은 주요한의 ‘불놀이’보다 앞선 최초의 자유시이기 때문이다.
이후 83년만(2001년)에 복간이 되었는데 아쉽게도 2015년 12월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오셔요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어요 어서 오셔요
당신은 당신의 오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당신의 오실 때는 나의 기다리는 때입니다
당신은 나의 꽃밭으로 오셔요 나의 꽃밭에는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꽃 속으로 들어가서 숨으십시오
나는 나비가 되어서 당신 숨은 꽃 위에 가서 앉겠습니다
그러면 좇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당신은 나의 품으로 오셔요 나의 품에는 보드라운 가슴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머리를 숙여서 나의 가슴에 대십시오
나의 가슴은 당신이 만질 때에는 물같이 보드랍지마는 당신의 위험을 위하여는 황금의 칼도 되
고 강철의 방패도 됩니다
나의 가슴은 말굽에 밟힌 낙화가 될지언정 당신의 머리가 나의 가슴에서 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에게 손을 댈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셔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의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의 쫓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나의 죽음의 뒤에 서십시오
죽음은 허무와 만능(萬能)이 하나입니다
죽음의 사랑은 무한인 동시에 무궁입니다
죽음의 앞에는 군함(軍艦)과 포대(砲臺)가 티끌이 됩니다
죽음의 앞에는 강자와 약자가 벗이 됩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오셔요 당신은 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어서 오셔요

한용운 -오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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