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맑은 날씨에 걷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체중은 더 이상 내려가지 않으니 다행이다.
큰 창이 있는 복도 중간으로 나는 모든 에너지를 두 팔에 모우듯이하며 큰 창 앞에 가서 멈춘다. 그리고 무릎담요를 가지런히 펴서 덮고는 Lynda Lane Park를 바라본다. 가장 하고 싶은 것이 저곳을 산책하는 것이니 매일 아침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Kelly 여사는 오늘도 혼자 산책을 하고 있다. 이른 아침 저기 저 길을 걸어서 아주 천천히 산책을 하고 있다.
마른바람이 그녀의 하얀 머리칼을 가로로 넘기고 있지만 그녀는 그것에 여념 하지 않고 함께 나이 먹어가는 지팡이와 함께 늘 가던 그 길로 산책을 하고 있다. 언제쯤이면 저 길에서 그녀에게 눈인사를 하며 마주 걸을 수 있을까?
"오늘은 조금 힘들지도 몰라요"
킴의 걱정 섞인 말에 미소를 보이며 그것만으로도 대답이 되었으리라 느낀다.
그리고 킴이 잘 포장된 무언가를 내 무릎 위에 놓아주며 미소와 함께 툭 하고 던지는 말이 나를 미소 짓게 하였고, 나를 당황하게도 만들었다.
"$25짜리야. 미스터 한은 특별히 $50이야"
"뭐?"
그렇게 내 손에 들어온 검은색 티셔츠. 이걸 누가 입어라는 말을 매번 하곤 했었는데 내가 입을 줄이야 하며 야윈 팔을 내 몸뚱이 뒤로 숨기고 거울을 본다. 검은 피부가 아니라 검정 옷이 많긴 하지만 이건 좀 특별하군 하며 나를 비춰 본다.
한 달에 두 번 나는 멈추지 않는 구토를 견뎌야 하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균실을 편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이미 탈모가 많이 진행되어 스님처럼 아주 깨끗하게 밀어버린 지 오래다. 그리고 비니를 쓰고 있으니 일단은 머리가 따뜻해서 좋다.라고 긍정적으로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나를 보호해주는 보호막과도 같은 비니를 포기해야 하는 때가 바로 무균실에서이다. 그곳에서의 며칠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보다는 고독이 더욱 큰 벽으로 다가온다.
나는 오늘 그 고독을 만나러 가야 한다. 그래서 나에게 위로를 하기 위해 킴은 태연하게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장난을 걸기도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미스터 한"
등 뒤에서 들여오는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환청인가 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누군가 내 볼에 입맞춤을 한다.
"마리엔"
깜짝 놀란 나를 마치 놀란 토끼를 보 듯이 환하게 웃고 있다. 그리고는 내 휠체어를 밀고 있었다.
마리엔과 나는 참 특이하게 대화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어떤 특이함?
마리엔은 불어와 영어를 사용한다. 나는 짧은 실력에 단어 몇 개로 그리고 한국어를 섞어서 이야길 한다. 그런데 우린 마치 둘 모두가 하나의 언어로 대화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길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가 오늘 항암치료를 받는다는 것을 알았는가 보다. 그러니 이렇게 나를 위해 웃어주고 마음이 평온하게 만들어 주는지도 모른다. 이 어린 소녀는 어쩌면 나 보다 더 넓은 가슴을 가졌으리라 그리고 저 푸른 눈은 모든 것을 아프지 않게 만들어 주는 치료제 같이 느껴진다.
마리엔도 소아병동에서 투병 중이다. 하지만 너무도 맑다.
가끔 창 밖을 보고 있는 내게 살며시 다가와 내 머리를 덮고 있는 비니를 벗겨서는 자기가 쓰고 있는 하얀색 비니를 벗어 둘을 머리 위로 흔들며 "우린 괜찮아 봐 똑 같잖아"라고 하며 내 주변을 뛰어다녔다.
마리엔의 엄마는 나 보다 8살 아래다. 그녀는 이런 마리엔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나로 인해 열심히 치료를 받고 약을 먹는다며 감사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 말을 전해 듣고는 내게 저 작은 소녀는 너무도 고마운 존재가 되었고 나 역시 좋은 존재로 남길 바란다.
극심한 고통을 동반하는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온몸의 모든 세포가 놀라 뛰어다니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그리고 이어서 나를 지배하는 메스 거림과 심한 구토 그리고 근무력증이 나를 힘들게 묶어 놓고 있었다. 마치 포승줄로 꽁꽁 묶어 어디 도망을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압박을 해 오고 있었다. 구토가 조금 잦아질 즈음 나는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나 라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니 어쩌면 이 고통을 잊기 위해 나름의 방법을 구상한 것인지도 모른다.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어려운 명제(命題)다. 어쩌면 평생 풀 수 없는 아주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아니 그 보다 빨리 깨우치게 될 수도 있다.
두보(杜甫)의 강촌(江村)이라는 시에는 微軀此外更何求(미구차외갱하구)라는 글귀가 새삼 가슴에 다가오는 것도 어쩌면 내 앞에 놓인 생이 언제 꺼질지 모르는 것이라 그럴 것이다.
그렇다 지금의 소소함을 행복으로 여기며 즐겨야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나는 오늘도 이렇게 살아 있는데...
淸江一曲抱村流(청강일곡포촌류)
長夏江村事事幽(장하강촌사사유)
自去自來梁上燕(자거자래양상연)
相親相近水中鷗(상친상근수중구)
老妻畵紙爲棋局(노처화지위기국)
稚子敲針作釣鉤(치자고침작조구)
多病所須唯藥物(다병소수유약물)
微軀此外更何求(미구차외갱하구)
맑은 강 한 굽이 마을을 감싸고 흐르는데
기나긴 여름 강촌은 만사가 한가롭다
제비는 마음대로 처마를 들고나고
수중의 갈매기는 가까이 가도 날아갈 줄 모른다
늙은 아내는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어린 아들은 바늘을 두드려 낚싯바늘을 만드는구나
다병한 몸에 필요한 것이란 오직 약물뿐
미천한 이내 몸이 달리 또 무엇을 바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