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는 봄과 가을 일 년에 두 번 체육행사가 있습니다. 체육행사라고 칭하지만 대개 들로 산으로 산행을 합니다. 새봄의 설레임과 가을의 정취를 느껴보기 위한 자연스러운 행사입니다. 간혹 산행 후 족구대회도 곁들이지만 산행이 주력이라서 체육이란 표현은 무척 광의적으로 쓰이는 것 같습니다.
올해 체육행사는 코로나 이슈로 봄에는 진행하지 못하고 다소 누그러진 가을에 소규모로 다녀왔습니다. 그동안 변변한 회식 한번 없이 사무실에만 갇힌 탓인지 초등학생처럼 다소 들뜨기까지 하였습니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는 차 안에서 창밖에 펼쳐지는 가을 풍경을 보며 다시금 출발할 때의 기분 좋은 설레임이 떠올라 문득 소풍 간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아 맞아요 올 가을 체육행사는 바로 소풍 그 자체였어요. 아마도 체육행사라는 표현이 제 맘에 썩 내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군대 체육활동 용어 때문일까요? 아무튼 소풍이란 표현이 훨씬 더 예쁘고 설레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소풍을 검색해보니 한자이더군요. 소풍(消風) 그럼에도 이 단어가 무척 새롭고 예쁘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풍 소풍 자꾸 말해 보면 기분이 한껏 고조되는 느낌이 들 겁니다.
소풍(消風) 의 消자가 사라진다는 뜻이고 風자는 바람 풍이니 바람처럼 하루를 가볍게 보내는 의미로 소풍이라 표현하는 듯합니다. 우좌지간 중년들의 설레는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선운사 입구 도솔산 전경
눈으로 즐기는 선운사
고창 선운사! 가을 하면 이곳이죠! 고즈넉한 선운산 산자락에 소박하지만 정감 넘치는 선운사 전경은 지친 마음에 안식을 찾는데 손색이 없습니다.
도솔산 자락에 자리 잡은 선운사는 백제 577년(백제 위덕왕 24)에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니 1천5백 년의 유서 깊은 산사답게 진한 불심마저 느껴지는 그윽한 중후함이 늦가을에 걸맞게 불심 없는 이마저 방문한 이의 발길을 한참 동안 머물게 합니다.
느릿한 걸음으로 경내를 한 바퀴 돌고 단풍길로 접어듭니다. 청명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길을 따라 계곡 양편으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마치 가을 축제라도 열린 양 짙은 단풍빛 뽐내는 자태가 고혹적이기까지 합니다. 잠시 감상해보시죠
그야말로 올해 단풍 구경은 제철에 찾아온 것 같습니다. 천년의 이야기를 간직한 계곡과 그곳에 함께 살아온 모든 생물들이 마치 천년 간 기획이라도 한 듯 절묘하게 빚은 형언할 수 없는 자연의 자태들은 어찌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마치 무릉도원인 듯 넋을 잃고 탄성도 다한 듯 취하여 한참을 서다 다시 가곤 합니다.
맛으로 즐기는 선운사의 가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시 주차장까지 내려와 이제 그 유명한 풍천장어집으로 달려갑니다. 내려오는 길에 고창의 특산품 복분자 원액을 한병 사서 미리 챙겨 두었습니다. 다다른 곳은 고창 풍천장어의 숨은 맛집 맹구 식당입니다. 두툼한 육질의 장어를 초벌구이 하여 내고 주인이 직접 구워주는데 비린내 없고 어디 한 군데 타지도 않게 기름기 없이 구워서 아주 담백한 맛이 그야말로 일품입니다. 느끼함 때문에 평소 서너 점 먹고 마는 장어를 말 그대로 배부르게 즐겼습니다. 소맥에 복분자 원액을 더한 칵테일은 조금 남은 장어의 느끼함까지 싹 가시게 합니다.
한판 걸판지게 먹고 나서야 비로소 이야기 꽃을 피울 수 있는 정도로 맛있습니다. 십여 명의 좋은 사람들과 사무실에서의 업무 이야기를 빼고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로 가감 없이 속내를 드러내며 서로 위안합니다. 따라주는 복분자 칵테일은 취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야기 꽃에 취해서 2차로 카페로 이동하여 가을 커피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 봅니다.
식당 옆에 펼쳐진 갯벌 전경
좋은 사람들과 함께 즐긴 선운사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취기에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잠이 깬 순간 이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내년에 정년퇴직을 앞둔 시니어 선배님이 함께 하셨는데 올가을 체육행사를 못할까 봐 아쉬워하다 오늘 소풍이 너무 감사하다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 말이 떠오르며 문득 앙드레 지드의 책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차지하고 있는 이 공간적 지점에, 시간 속의 이 정확한 순간에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이 지점이 결정적이지 않은 것을 허락할 수 없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에서
짧디 짪은 한 개인 생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만남이 있겠지만, 어찌 옷깃만 스친 것으로 연이 되겠습니까? "술 한잔에 진솔한 속내 꺼내 보일 수 있는 용기가 우리를 평안케 하리라."
어느덧 뉘엿뉘엿 가을 해는 석양에 물들지 않은 아쉬움을 남긴 채 서쪽산을 넘어가며 땅거미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좋은 분들의 얼굴을 떠올려봅니다. 집에 가면 더 좋은 마누라가 기다릴까?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소풍이었구나! 오랜만에 카메라에 가을을 한 가득 담아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