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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을 Nov 04. 2020

일관성(一貫性)에 대하여

짧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가끔 일관성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되는 것은 직장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20년이 훌쩍 넘은 성상을 직장에 몸담다 보니 참으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보고 겪어 왔다. 특히 직장은 상사의 유형에 따라 같은 일을 하더라도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중에서도 어려운 유형이 변덕이 심한 유형이다. 어떤 사안의 상황이나 상태에 대해 반응하는 정도가 제각각인 경우다. 이러한 유형에서 겪는 어려움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불안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예측이 가능하면 대비를 할 수 있고, 시행착오를 거쳐 더욱 더 철저하게 대비를 하여 재발을 방지하는 지혜를 쌓게 된다. 하지만 어떠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유형과 양상이 전혀 달라진다면 시행착오를 겪는 경험을 쌓지 못하여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것은 특히 사람 관계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예측 가능함은 신뢰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측할 수 없이 변덕이 심한 상사는 직원들을 불안하게 하고 신뢰가 형성되지 못하여 조직 기강에 심각한 위해를 초래하게 되고, 조직을 병들게 한다.

예측 가능함은 일관성이다. 일관성이란 특정 사안이나 현상에 대한 방법이나 태도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성질을 말한다.  

일관성의 중요성은 신뢰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일관성은 성장에 깊숙히 관여되어 있다. 일관성은 일정함이라는 측정의 데이타를 제공하게 되고, 누적된  데이타에 의한 측정값은 개선의 자료로 쓰이게 된다. 개선이 된다함은 사람에게는 성장을 의미하며, 조직에서는 매출향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관성은 개인과 조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일관성은 타고난 특질이거나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일관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배움이 우선이다. 부단한 자기 계발과 수양에 의해 길러지는 훌륭한 덕목인 것이다.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일관성에 대한 소중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타래난'님이 운영하는 블로그인데, 이곳에는 다시 읽고 싶은 국어책 항목에서 청소년기 배운 소설들을 접할 수 있고, 김광섭님의 '일관성(一貫性)에 대하여' 수필도 찾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다시 읽어본 수필은 내가 생각하는 수준과 사뭇 다른 차원 높은 개념임을 알게 되었다. 원문을 공유해본다.



일관성(一貫性)에 대하여

김 광 섭 (金珖燮)

  내 나이 이제 일흔이니, 이른바 기성 세대(旣成世代)다. 아니, 기성 세대에서도 구세대(舊世代)라 할 것이다. 그러나, 구세대는 구세대임으로 하여 겪어야 했던 과거(過去)가 있으니, 이는 젊은 세대(世代)들이 그들의 삶을 영위(營爲)하는 데 혹 참고(參考)가 될지도 모른다. 칠십을 살고도 한 시간의 생각거리가 못 되는 인생(人生)이나마 여기 적는 것은 다만 ‘참고하기’를 바라는 뜻에서이다.
  나는 1905년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집안에는 자녀(子女)가 드물었기 때문에, 나의 조부모(祖父母)께서는 나를 백 날 동안 사람에게도 해에도 달에도 보이지 않으시고, 당신(當身)들의 방 안에서 무릎에다 놓고 키우셨다 한다. 나는 이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나쁜 일이나 하지 않으면서 살려고 생각한다. 이것이 평범(平凡)한 한 아기를 그토록 소중(所重)히 여기신 그분들께 최소한(最小限)으로나마 보답(報答)하는 길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데엔 또 하나의 까닭을 생각할 수 도 있다. 내(우리 세대)가 다른 사람의 가해(加害)를 너무 많이 받았다는…….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 이웃에 서당(書堂)이 있었다. 나는 거기 놀러 갔다가, 칼을 찬 누런 복색(服色)의 일본 헌병(日本憲兵)을 보았다. 그는 서당 아이들을 내쫓고 그 방을 썼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길에 버티고 서서 그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한 어린이의 감시자(監視者)가 되었다. 나는 그를 통하여 일본 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의 이미지를 본 것이다. 내 사상(思想)의 씨도 그 때 뿌려진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독립군(獨立軍), 의병(義兵)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간밤에 다녀갔다는 귓속 이야기가 들렸다. 소년은 무슨 장한 것을 남몰래 속에 품은 듯이 자랑스러웠다. 그 후, 삼일 운동(三一運動)을 보았다. 이것을 본 것이 나의 인생길의 방향을 고정(固定)시켰다. 소년은 이 때부터 이 순신(李舜臣)이니 김 옥균(金玉均)이니 하는 분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얼마 후, 나는 서울에 가서 중등 교육(中等敎育)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영문학(英文學)을 공부했다. 나는 열심(熱心)히 공부했다. 그것이 나의 책임(責任)을 다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망국민(亡國民)이기 때문에 당하는 괴로움, 그 수모(受侮)는 형언(形言)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당시 토오쿄오(東京)는 공산주의(共産主義)의 아성(牙城)이었다. 나는 우리의 독립(獨立)에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여 한동안 그들을 넘겨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대(期待)할 수가 없었다. 나는 차라리 조용한 한 인간으로 살자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힘이 없어 일제(日帝)에 항거(抗拒)할 수도 없고, 이 땅의 아들이라 순종(順從)할 수도 없는 그 가운데, 미칠 듯이 달려드는 고민(苦悶)과 몸부림은 이것을 허락(許諾)하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항일 운동(抗日運動)에 가담하고 만 것이다. 참으로 뼈저린, 일본의 8년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나는 ‘극예술 연구회(劇藝術硏究會)’에 들어갔다. 나는 물론 연극인(演劇人)이 아니다. 그러나, 민족극(民族劇)을 수립(樹立)해 보고 싶었다. 민족극을 통하여 민족 의식(民族意識)을 고취(鼓吹)하고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想像)할 수조차 없는 참절비절(慘絶悲絶)한 현실(現實)이었으므로, 이 소극적(消極的)인 저항(抵抗)마저 쉬운 일은 물론 아니었다.
  나는 또 한편으로 교편(敎鞭)을 잡았다. 영어 교과서는 나의 큰 위안(慰安)이 되었다. 바이런, 셸리, 키이츠, 워어즈워드 등의 시(詩)가 있었다. 나는 이 시들을 풀이하면서 민족(民族)을 이야기하고 자유(自由)를 말하고, 그리하여 간접적(間接的)으로나마 학생들에게 ‘한국인(韓國人)임’을 깨우쳐 줄 수가 있었다. 끊임없이 일경(日警)에게 불려 다니면서도 나는 이 일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궁성 요배(宮城遙拜)라는 것도 할 수 없었고, 황국 신민(皇國臣民)의 서사(誓詞)라는 것도 읽을 수가 없었고, 창씨 개명(創氏改名)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나는, 마침내 그들의 형무소(刑務所)에 갇힌 바 되었다. 그 때 나를 담당(擔當)했던 일인 검사(日人檢事)가, 너 같은 자를 내놓는다면 대일본 제국(大日本帝國)이 성립(成立)되지 못할 것이라고 극언(極言)하던 것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거기서 괴롭고 고독(孤獨)한 3년 8개월의 독방(獨房) 신세를 졌다. 그 동안에, 외국인(外國人)이 될 수 없다는 나의 신념(信念)은 점점 굳어만 갔다.
  감옥(監獄)에서 나오자 나는 곧 광복(光復)을 맞이했다. 비록 병상(病床)의 몸으로나마, 제국주의(帝國主義)의 시체(屍體)를 보면서 목청껏 만세(萬歲)를 불렀다. 내가 부른 만세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어려서 본 삼일 만세(三一萬歲)의 이미지 그대로 부른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 이미지를 눈앞에 그리며, 사회 활동(社會活動)도 하고 반공 운동(反共運動)도 벌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공무원(公務員) 노릇도 했다.
  문득 어린 시절(時節)이 생각난다. 어린 나를 감시(監視)하던 그 일본 헌병(日本憲兵), 소곤소곤 들리던 독립군 이야기, 어린 눈으로 바라본 삼일 운동, 이 일들은 모두 나의 어린 가슴 속에 민족사(民族史)의 한 목표(目標), 내가 향해서 걸어가야 할 목표를 설정(設定)해 준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아무것도 이룩한 것이 없지만, 그런대로 이 한 목표를 향하여 일관(一貫)하게 가는 길이라 별다른 후회(後悔)가 없다.
  오늘날, 세계의 젊은이들 가운데는 방황하는 사람들이 적쟎은 것 같다. 그들은 이 시대(時代)를 매우 어려운 때로 보고, 심각(深刻)한 전환기(轉換期)니, 상실(喪失)의 시대니 하면서 고독(孤獨)해 하고, 또 이를 해소(解消)하기 위해서 난무(亂舞)를 즐긴다고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풍조(風潮)는 어느덧 우리 나라에도 상륙(上陸)하여, 일부 청소년들이 이에 쏠리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은 자기 방치(自己放置)다. 시대를 핑계삼지 말아야 한다. 목적지(目的地)가 없는 사람들, 목적지가 있어도 사명감(使命感)이 없는 사람들, 오직 그들만이 시대를 핑계삼아 불순(不純)하고 나약(懦弱)한 자기를 합리화(合理化)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족속(族屬)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들은 모세의 인도(引導)로 애급(埃及)의 노예 생활(奴隸生活)에서 벗어나 카나안 복지(福地)를 향했다. 그러나, 그리로 가는 도중(途中)에 그들은 어찌했는가? 좀더 참지 못하고 추악(醜惡)한 난무(亂舞) 속에 휩쓸리고 말았다. 400 년의 노예 생활에서 구제(救濟)되는 날에도 자기를 찾지 못한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들의 전철(轉轍)을 되밟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명백(明白)한 목표(目標)가 있다. 안으로는 통일(統一)을 이룩하며, 밖으로는 세계에 웅비(雄飛)해야 할 우리들이다. 그것이 또한 제군(諸君)의 자기 실현(自己實現)이기도 하다. 이렇듯 명명백백(明明白白)한 목표가 있는데도 방황해야 할 것인가? 작은 생활 하나하나에도 경건(敬虔)한 태도로 임(臨)하여 한 발씩 한 발씩 우리들의 목표에 접근(接近)해 가야 할 것이다.
  인생, 나는 이것을 잘 모른다. 그러나, 무엇인가 일관(一貫)된 것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방황하는 것이 아니어야 할 것 같다. 더구나, 남에게 괴롭힘을 많이 받은 우리의 인생은 이것이 첫째 자기 구제(自己救濟)인 것이다.




원문 출처 :  타래난 https://m.blog.naver.com/PostList.nhn?blogId=jbh8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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