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Movie Saver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uabba Aug 27. 2018

어느 가족은, 이렇게도 가족이 된다.

영화 [어느 가족] 리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처음이었다. 일본 특유의 색이 나에게 맞을까 겁도 났었고, 약간은 쉽게 보면 안 될 것만 같아 매번 '다음으로' 미루고 미루었다. 

이번에는 영화를 보게 된 이유가 나에게 꽤나 인상 깊었던 '버닝'을 제치고 수상했다는 점이다. 물론, 수상작이라고 다 좋은 영화도 아니고, 내 취향에 맞는다는 것도 아니지만 궁금했다. 어떤 점에서 '버닝' 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았을까. 

그리고 개봉관 수가 현저히 적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 이 영화 봐야겠다 싶었다. 자고로 개봉관 수가 적다는 것은 작품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니깐.





아버지와 아들로 추정되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눈짓 손짓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임무를 행한다. 그리고 물건을 한 아름 안고 유유히 빠져나오는 인물. 집에 들어가는 길에서는 고로케를 '돈 주고' 사 먹는다. 이상한 사람들.

그러다 혼자 쭈그려 앉아 있는 한 아이를 발견하고서는 집으로 데려간다. 그들의 집은 굉장히 어수선한 데다 사람도 많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샴푸는 가져왔어?'라고 묻기도 하고, '담에는 더 좋은 걸 갖고 올게'라고 태연스레 대답한다.


'뭐야, 이 사람들.. 이상해..'

사람들에 대한 어떤 정보도 알 수 없다. 영화를 보며 조급증이 나타났다. 누가 빨리 '아빠-엄마-아들'이라던지, '노모와 아들'이라던지 어떠한 것이라도 명확히 해주길 바랬다. 또 이들은 왜 도둑질을 하며 살아가는지, 왜 이렇게 살아가는지도.


반면, 영화 속 인물들은 그게 뭐 대수냐는 듯 자연스레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할 일을 하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아이는 어쩌자고 데려온 걸까..?

안 그래도 좁아터진 집에 아이까지 데려왔으니. 나는 영화를 보며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아이를 키우며 최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주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 찬 나에게 그 집에서 아이를 더 키운다는 것은 못할 짓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폭력에 휘둘리고 있으니 그래도 이렇게 따뜻한 가정에서 자라는 게 더 잘된 일인가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아이가 이 집을, 아니 이 '가족'을 만족해하니깐. "오히려 '선택'한 관계가 유대라던지 정이라던지 더 끈끈할 수 있으니깐."



가족인 줄 알았는데, 가족이 아니었나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고 끝날 것만 같았던 이 수상한 가족은 한 사건으로 인해 가족의 끈이 놓아져 버리게 된다. 역시, 이렇게는 가족이 될 수 없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아니, 그래도 이제껏 먹여주고 재워주고 한 정이 있지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저버릴 수 있을까. 

핏줄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면 역시 가족이 될 수 없는 걸까. 영화를 보며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 어떤 가족보다 끈끈하고 따뜻한 줄 알았는데, 역시 이렇게 모인 사람들은 진짜 가족이 되기 어려운 걸까.


사춘기를 겪으며 도둑질을 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한 쇼타는, 이 가족을 붕괴시키기로 한다. 자신의 여동생이 도둑질에 걸리지 않도록 자신이 대신 잡힌다. 그리고 이 수상한 가족의 관계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어딘가 조금씩 아픔이 있었던 사람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던 사람들. 그 누구보다 자신을 꼭 끌어안아 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과거와 아픔은 묻어둔 채 어쩌면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뭉쳐 지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모여 '가족'이 되었다. 



어느 가족은, 이렇게도 가족이 된다.

영화 '어느 가족'을 보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가족이란 무엇인가' 물음을 던지게 된다. 대가족에서 살아왔고, 지금은 또 한 남자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이 영화는 어딘가 나와는 정 반대편에 있는 듯하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으로 끈끈하게 뭉쳐 살아가는 이들을 보며 우리 가족과 뭐 그리 다른가 라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모두가 가족을 원하고, 그 어느 가족보다 도란도란 행복하게 살아가면 그걸로 된 거 아닐까. 


함께 할 때는 쉽게 하지 못한 말이었지만, 이들도 역시 가족인지라 서로 떨어져 살고 난 뒤 깨닫게 된다.  서로가 더없이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걸. 

그래서 쇼타는 아빠를 떠난 후, 나지막이 '아빠'라고 내뱉어 보기도 하고, 유리는 '오빠'라고 부르며 뛰어 나갈 듯한 모습을 보인다. 



어느 가족은, 이렇게도 가족이 된다고 한다. 

우리 가족은, 어떻게 가족이 되었을까. 나는 어떤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혹은 살아갈 '어느 가족'을 생각해보게 되는 영화. - '어느 가족'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쓸쓸함이 찾아드는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