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도망가자

에필로그

아무도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by 목문수



안토니오 그람시는 옥중수고에 썼다. "위기는 그때, 정확하게 드러난다. 옛것이 사멸해가는데 새것은 아직 태어나지 못할 때. 온갖 종류의 병적인 증세가 드러나는 바로 그 진공의 시간에" 여자는 진공의 시간이 오면 무방비하게 떠다녔다. 왜 그처럼 무방비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아니 왜 그래서는 안 되는 건지. 다만 그람시가 뒷줄에 빼놓은 것이 있다면, 현대 면역학자들이 밝혀냈듯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은 그 병증으로 인해 죽지만 않는다면 적응하거나 살아남았다는 것.




양가는 끝까지 이상한 방식으로 하모니를 이루었다. 시댁 식구들의 명민한 계산과 여자 가족의 냉정한 현실 인식은 이번에도 톱니바퀴 돌듯 잘 맞물렸고, 협의 이혼 과정은 서류 심사와 숙려기간을 지나며 허탈할 정도로 빨리 마무리되었다. 여자를 향한 과도한 헌신과 열정은 그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몸부림이었거나 자기만족을 향한 투지였음을. 남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알게 되었다. 그는 붕괴된 자존심을 회복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한때 여자를 향한 숭배의 말을 내뱉던 입술에서는 같은 강도의 저주의 말이 쏟아져 나왔다. 다만 혼인파탄의 사유로 여자가 적었던 '외도'라는 글자를 지움으로써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려고 애썼다.




급속도를 내던 교사 징계 절차 역시 여러 이상한 이유로 흐지부지 끝났다. 그 와 중에는 수학선생의 적극적인 변호도 한몫을 했다.


"... 내가 알긴 뭘 알아? 모르지. 몰라. 하나도 몰라. 그냥 널 믿은 거야. 아냐 아냐, 날 믿은 거야... 다른 선택지가 있었겠냐? 너 여기 추천할 때 말했잖아. 너랑 나랑 운명 공동체라고."


윤정아 선생의 교사 품위유지 위반 등 혐의에 적극적인 조사를 요청했던 교감 선생의 신상에도 문제가 생겼다. 신도시 부지 내 학교 등 공공 건설 인허가 과정에서 건설업자들과의 상습 뇌물 수수에, 현직 인천교육감이 연루되었다는 보도가 나오자 교감은 대외적인 활동을 전부 취소하고 병가를 냈다. 다만 평소 자신의 신념에 호응하는 몇몇 측근들에게 명확한 인센티브를 줌으로써 자신의 우호 세력을 두텁게 만들었던 전략은 이때에 매우 유효했다. 그를 옹호하고 변호하는 선생과 교직원은 좁은 학교 안에 국한되지 않았다.





<건영상가> 화재사고를 비공개를 전환해 방화사건으로 수사하던 경찰은 그 주요 피의자로 <모터컴퍼니> 사장 ***을 지목했다. 미성년자 성 착취 및 불법 영상 제작의 용의자로 수사망이 좁혀오는 것을 알고 증거를 은폐하기 위해 주요 범행 장소로 사용하던 건영상가 2층 **피시방, 지하 단란 주점 등을 소실할 목적으로 계획적인 방화를 저질렀다는 것이 1차 수사 결과였다.

범죄 목적으로 프로포폴 등 수면마취제도 이용되었는데, 주요 공급원으로 지목된 시내 병원 두 곳 중 한 곳에 강상훈의 아버지가 병원장으로 등기된 5층짜리 -정형외과였다. 직접 가담자로 병원장이 지목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사건이 터지면서 아들 관련 성폭행을 의심해 변호사를 보냈던 강 원장의 강경 대응에 제동이 걸렸다. 부자가 동시에 모터컴퍼니 사장 *** 관련 참고인 조사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반지하의 투룸, 여러 겹의 벽지는 벗길수록 더 짙은 곰팡이 얼룩을 드러냈다. 마스크를 쓰고 가만히 바라보던 두 여자. 호선과 윤정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 안 되겠다. 사람 불러야지."


그때, 종이팩에 담은 커피 세 잔을 가지고 내려오며 상훈이 말했다.


"... 사람 하나 추가요"


상훈은 그날 이후, 마치 없었던 일처럼 연인의 역할을 삭제해버린 윤정아 선생의 단호함에 당황하고 실망했지만, 집 앞 편의점 테라스에 앉아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자거나, 미대 입시 준비를 도와달라는 시시껄렁한 부탁을 하며 전화를 걸거나 집 앞에 찾아왔다. 가끔 고양이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찾아가서, 어쩐지 지난번과는 다른 고양이인 것만 같은 고양이에게 참치캔을 나눠주고, 줄 담배를 피웠다.




여자는 호선의 도움으로 주중에는 보험 회사 전화 상담사라는 새로운 일자리를 얻었다. 주말엔 선배가 일하는 화실에 가서 입시생들을 보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잠 못 드는 밤이나 새벽이면 108배를 올렸다.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시기에 모든 행운이 그녀를 감쌌다. 아무 이유 없는 비호였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참수되는 대신 살아남았다. 그러나 무엇이 다른가. 그녀를 죽였거나 그녀를 죽일 수도 있었을 모든 생각들로부터 그녀는 이미 멀리에 있었다. 벌 받으려는 자에게, 죄의 추궁은 무의미하다. 죽은 이를 다시 죽일 수 없다. 아무것도, 그녀의 죄조차 그녀를 죽일 수 없었다. 완전히 무결한 사람들처럼, 죄 없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이들에게 묻는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랑이거나 욕망이거나 어리석은 선택을 받아들임으로써 죄인이었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구라도 그것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시간에 기대어 - 이해원

https://www.youtube.com/watch?v=VhHYROJA6xQ


삶의 경이로움과 신비를 아는 첫 단계는 세속적 인간사의 영애뿐 아니라 그 흉측한 면까지 보는 것이다 - 조지프 캠벨, 신화학




















* 위 소설은 아래 기사를 참고-아이디어만- 만든 전체 픽션입니다.*

<참고기사>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10720500123&wlog_tag3=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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