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도망가자

도망가자 15

특이점

by 목문수

여자는 먼저 잠에서 깼다. 깊고 달콤한 잠이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정신이 또렷하게 맑았다. 모든 것이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보였다. 살포시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모텔 방의 작은 탁자에 앉았다. 모텔 로고가 선명한 메모지를 펼쳐놓고 여자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 윤정아는 오늘 당신과의 결혼 서약을 깼어. 당신에게 배신감이나 고통을 주려는 건 아니야. 다만 그 누구에게 보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솔직하고 싶어. 용서를 구하는 건 아냐. 분명한 잘못을 내가 선택했고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 어떤 비난도 받을게. 민사적인 책임을 감당할게. 우리의 결혼은 더 이상 어떤 명분도 남아있지 않아. 당신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그런 고마움조차 나를 파괴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 이젠 고마워하고 싶지 않아. 당신처럼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것 알아. 미안해. 이건 오로지 내 선택이야. 존중해주길 바래."


여자는 또박또박 빠른 글씨로 편지를 써 내려갔다. 어떤 문장에서도 멈칫하지 않고 마침표까지 찍은 후, 자신이 쓴 글을 다시 한번 눈으로 읽었다. 종이를 두 번 접어 지갑 안쪽에 넣었다. 그때, 여자의 우주가 삐걱 소리를 내며 공전을 멈췄다. 여자의 시간이 반 템포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 * * *




식당 안은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이른 저녁식사를 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소년과 여자는 반계탕을 먹었다. 소년은 바닥까지 긁어 마신 후... 그릇을 내려놓고는 여자를 치켜보며 빙긋 웃었다.


"... 근데, 직접 잘랐어요? 그 머리카락? "


노을이 짙어지고 어둠이 내리는 바닷가에는 불꽃놀이를 보려는 사람들이 이미 삼삼오오 모여 자리를 잡고 어깨동무를 하고 앉아있었다. 불꽃을 향해 걸어가던 소년은 뒤돌아 여자의 손을 잡았다. 불꽃놀이가 막 시작되었다.







- 끝



https://www.youtube.com/watch?v=SkN_hWI6n28








우리의 생은 끝이 있지만 앎에는 끝이 없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따르는 일은 위태롭다

- 장자, 양생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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