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도망가자

도망가자 14

... 괜찮다고 해줘

by 목문수

"... 오늘 불꽃 축제 때문에 마침 컨테이너 5분 대기조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쫌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습니다... 다행히 CPR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학생이 물을 좀 많이 먹은 것 같아서요. 병원으로 후송하려고 했더니 한사코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대신 번호를 알려주길래 전화드린 겁니다."



무거운 유리문을 밀어 열었을 때, 파출소 정문 옆 오른편 긴 탁자에는 취객 한 명이 벽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파출소를 지나 안쪽 복도 제일 끝. 화장실 옆에 있는 남성휴게실 1층 간이침대. 모로 돌아누운 소년의 어깨에는 군용 모포가 한 장 덮여있었다. 지난밤 바닷가의 흔적인 듯 정수리 뒤편으로는 모래가 조금 묻어있었다. 순경은 방문을 열어주고는 재빨리 복도 끝, 사무실을 향해 돌아갔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향해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는 일어나 앉았다.




* * * * *




오토바이는 없었다. 어젯밤 머물렀던 바닷가 모래 틈엔 아무렇게나 열린 가방과 타다만 사진 조각이 조금 남아있었다. 누군가 밟고 지나갔는지 불 피운 자리는 얼룩덜룩한 재들이 모양 없이 흩어져있었다. 소년은 터벅터벅 자신이 머물던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타다만 사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자기 손바닥에 올려 담았다. 여자는 아무렇게나 열려있는 소년의 가방을 털고, 누군가 밟고 지나가 짙이겨진 <사스키아의 초상> 부분을 손으로 쓸어폈다. 램브란트가 화가로서의 전성기를 향하던 시절. 아내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서른 살, 꽃다운 나이에 생명의 불길이 꺼져가는 아내의 잠든 모습을 스케치하는 것뿐이었다. 여자가 화집을 반으로 접어 가방에 넣을 때. 타버린 사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소년이 갑자기 토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무릎을 꿇은 채로 어깨를 떨며 몸속에 쌓아두었던 많은 물을 바닥에 게워냈다. 소년의 몸은 잠시 경련을 하는 것처럼 떨다가 다시 눈물을 털어내곤 했다. 여자는 소년의 옆에 앉아 등을 쓸어주었다.



여름에 태어난 하루살이는 여름날 그 뜨거운 하루만을 기억하겠지. 그것이 생의 전부인 것처럼. 하지만 넌 하루살이가 아니니까. 아마도 수십 번의 찬란한 계절이 남아있을 거야... 아냐, 뻔한 개소리. 여자는 자신의 입술도 설득하지 못한 우스꽝스러운 위로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외로움과 슬픔이 홍수처럼 넘쳐흐를 때, 타인이란 얼마나 멀고 아득한 곳에 있는 것일까.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위로란 얼마나 허약한가. 여자는 도망치기만 했던 자신의 마음을 소년 앞에 돌려세워 두기로 했다. 도망치지 말자. 더 이상 피하지 말자. 지금 내 앞에 이 소년과 잠시만. 아무 말 없이 있어주자.


차를 타고 몇 킬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소년은 자꾸 헛구역질을 했다. 아직 다 마르지 못한 채 젖은 옷은 소년의 몸을 떨게 했다. 열이 나는지 얼굴도 조금 붉었다. 여자의 소나타는 도심을 벗어난 도로가에 무인 호텔 간판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 * * * *




이미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열쇠를 열고 들어간 방의 왼편 유리창 멀리로 바닷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여자는 소년을 침대에 눕히고 방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 다시 차를 돌려 시내로 가서 죽과 감기약, 남자 티셔츠 한 장을 샀다. 돌아온 방엔 소년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여자는 소리 안 나게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방을 나오고 있었다.


"... 있어줘요."


여자는 몸을 돌려 침대 쪽을 봤다. 언제 일어났는지 소년이 여자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여자의 등을 안으며 말했다.


".. 나, 수고했다고... 그냥 괜찮다고 해줘."


"... 괜찮아."


"... 안아주세요. "


소년은 여자의 등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여자는 몸을 돌려 소년을 안아주었다. 그때 소년의 입술이 여자의 입술에 포개졌다. 여자는 조금 물러섰지만 소년은 다시 여자의 뒷목을 끌어당겨 안았다.



인간은 성장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걸까. 완전해지기 위해 살아가는 걸까. 어떤 식의 노력들이 인간을 더 인간답게 완성할 수 있는 걸까. 완결성이라는 환상 때문에 사라져 버린 자기 자신이 미웠다. 안간힘 때문에 잃어버린 자기 얼굴이 보였다. 아직도 울고 있는, 두려워하는, 절망하는. 물컹 거리는 자신을 컵 안에 모아놓고 어른의 껍데기로 살아가는 것도 살아가는 것일까. 소름 끼치게 낯선, 펄떡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여자는 이것이 결국 자신이 원한 일인가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완전히 이기적인 행동임을 알았다. 단지 자신을 위한 것일 뿐. 상처 받은 소년을 위로하려거나 그의 안정에 도움을 주려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물에 빠진 인간은 절박한 마지막 한 숨을 더 내쉬기 위해 옆에 있는 무엇이든 딛고 올라서려고 한다. 자신만을 구하려고 한다. 인간은 성숙해지지 않는다. 성숙함이라는 아름다운 성찰조차 때로 어떤 이들에게는 사치스럽다.



절정의 순간에 참을 수 없이 일그러지는 소년의 미간을 보며, 아름답다 느꼈다. 고통은 무엇일까.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여자는 소년의 숨소리에 몸을 떨며 눈을 감았다.




* * * * *





"... 재능 때문에... 잘 대해주는 거예요.. 나? "


"... 재능 같은 걸로 잘해주고 말고 하지 않아. 사람은. 그런 게 있다고 해도, 그 정도는 아니야. 너... "


기대했던 건지 소년은 붙어있던 몸을 떼서 바로 누우며 "쳇" 하고 내뱉었다. 그러다 다시 몸을 돌려 양팔을 벌리고 여자는 몸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여자는 자신의 눈앞에 가까이 다가온.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후두 융기의 굴곡을 바라보았다. 선악을 알게 된 인간이 야훼에게 벌 받아 천국을 떠날 때, 그에 목에 걸려있던 작은 사과 조각.

소년은 아름다웠다. 소년의 몸은 여리고 아름다운 선을 그리며 잠들어있었다. 아름다운 것은 왜 이렇게 사무치게 슬픈 것일까. 엎드린 채 얕은 숨을 쉬는 소년의 속눈썹의 작은 떨림을 바라보던 여자는 지금 자신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다만 감당할 수 있는 것만이 자신이 아님을, 그녀 스스로 깨버린 그 물병에는 다시 찰랑거리는 맑은 물을 담을 수 없음을 알았다.


원치 않는 희생 역시 타인에게 가해가 될 수 있음을. 넘겨짚는 배려 속에 깃든 안정이라는 이름의 족쇄. 그저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함으로써 타인 앞에 똑바로 서 있을 수 있음을. 여자는 자신이 오래전에 인간관계에 대해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더 일찍 태어났다고 해서, 조금 더 살았다고 해서 다른 인간의 인생에 덧붙일 어떤 조언을 찾을 수 있었을까. 다르게 살았더라면 다른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런 건 여자의 몫이 아니었다. 인간은 오직 자신의 상처만을 선택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버겁다. 누군가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용기를 내야 한다면. 용기라는 게 필요하다면.







- 계속




숨... 박효신

https://www.youtube.com/watch?v=oBKpJiVEcnU



넌 지금까지 한 번도 본적 없는 사람들에게서 사랑받을 거야

- 레베카 솔닛, 멀고도 가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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