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아빠에게 엄청 혼난 적이 있다. 아직도 생생하다. 심지어 짜파게티를 끓일 때도 생각난다.
국민학교 5학년.
점심도 못 먹은 차에 저녁 시간이 되었는데도 집에 아무도 오지 않아 혼자 때우려고 자장면 한 그릇을 시켰다. 딩동~ 초인종 소리에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니배달 아저씨 뒤에서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좀 일찍 퇴근하신 모양이다. 나는 뭐... 달 큰 짭조름한 냄새가 더 반갑기도 하고, 쫄쫄 굶은 것이 억울한 마음도 있어서 인사는 하는 둥 마는 둥 자장면을 받아 쪼르르 식탁에 올려놓았다.
"아이구 사장님, 이거 미안합니데이.. 바쁜 시간인데, 아가 아직 뭘 몰라가지고... "
현관에서 자장면 값을 건네며 아버지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는 구겨진 야구 모자를 고쳐 쓰고 "아, 뭐. 다들 시켜 드시죠. 허허" 하시고는 얼른 나가셨다.
아저씨의 낡은 오토바이가 부릉 시동을 걸기도 전... 내가 막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가르려고 들었을 때. 아버지가 소파 위에 가방을 탁 내려놓고, 나지막이 나를 부르셨다.
"니 일로 좀 와, 앉아바라"
....? 배고파 짜증이 날 지경이라 고개는 돌아갔지만 눈은 자장면을 향해 있던 찰나. 이상한 공기에 멈칫했다. 양복 겉옷을 벗은 아버지가 와이셔츠 소매를 쓸어 올리고 있었다. 화나셨다는 얘기다. 분위기를 바꾸려고 더 크게 투덜거리면서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아, 왜~ 나, 배고프다고~~"
"니는... 임마. 인간이, 인간이 돼야지. 배때지 고프다꼬 지 입에 밥 쳐 넣는 거 빼이 모르면, 그기는 인간이 아니라..."
쫌스런 양반. 아까 들어오실 때 인사를 안 했다고 화나셨구먼. 인사는 기본이다, 못 박히도록 듣던 말. 그래도 인간 분류에서 제외되긴 억울하다. 나도 할 말은 있다. "점심도 못 먹었는데... " 입안의 말을 뭉개고 있을 때 들어온 아버지의 훅 한방!
"임마! 짜장 한 그릇을 배달시키는 기! 그기 인간이가? "
자장면 한 그릇 시켰다고 화내시는 거야, 지금?설마... 자기 거 안 시키고 내 거 한 그릇만 시켰다고? 눈을 획 치켜뜨고 째려봤다. 라면 끓일 때 안 먹는다고 했다가 꼭 "한입만~"하고 달려드는 염치없는 그다. 한밤중 울고불고 짜증 낸 게 엇그제였다.
"아빠, 한 그릇 시켰다고 그러는 거야? "
너무했다. 한 사람이 한 그릇을 시켜야지, 두 그릇을 시키나? 누가 언제 올 줄 알고?
"니는 임마! 짜장한 그릇은 가서 사 먹는 게 그기 인간이다. 지금 장사하는 사람은 한창 바쁜데, 니 때매 사장님은 배달할라꼬 여까지 저거 한 개 들고 왔다 갔다 하모 되겠나? 그기 니는 생각이 안돼? "
생각이 안돼요. 중국집 사장님의 저녁 장사까지 고려하기에굶주린5학년은 아직 무리.
그래서, 울었다. 마침 엄마가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동공이 커지는 걸 확인하고, 벌떡 일어나 쿵쿵쿵 발소리를 내며 방으로 가서 문을 쾅 닫았다. 문을 잠그고 이불을 썼다. "아... 씨. 지난 주말에 다 시켜먹어 놓고. 나는 혼자 짜장면도 못 시켜먹게 하고... 자기들은 밖에서 맛있는 것도 다 사 먹고 다니면서. 나는 밥도 안차려 주고. 으아아아앙"
엄마가 내 방문을 몇 번을 두들겼고. 아빠와 조근조근 다투다가 "아휴, 그래 다 내 탓이다. 돈 몇 푼 벌라꼬 아들 밥도 못 챙기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다, 내 잘못이야" 라며 한숨을 푹 내쉬는 것도 다 들었다. 새벽에 배고파서 나왔다가 딱딱하게 굳어서 쓰레기통에 버려진 자장면도 들춰 봤다.
그날의 트라우마; 때문인지,독립한후에도 집으로음식을 시켜먹지 않는다.
* * * *
예전 신당동에 TBN방송국 있던 시절에, 처음 일하게 된 피디와 인사 겸 식사를 하러 간 저녁. 바로 창문 밖에서 배달 오토바이가 트럭과 부딪히는 사고를 목격했다. 사고를 바로 앞에서 본 건 처음이라 먹는 둥 마는 둥 심란하게 집에 돌아오면서... "사고를 막으려면 교통방송이 중요하긴 하겠구나. 열심히 해야겠다." 나 편한다짐만 했던 적이 있다. 치킨인지 피자인지 회사에서 <신속 배달, 몇 분 안에 배달> 같은 거로 마케팅을 벌였는데, 빨리 배달하려다 아까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많았다. 다행히 '신속 배달' 그런 거로 마케팅하지 말자, 는 캠페인이 있었고 조금은 정화되는 듯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여전하다. 택배노동자들의 과로사.그놈의총알배송, 새벽 배송.
가끔 집 현관문 번호를 누르다가, 옆집 문 앞에 20킬로짜리 쌀이 두어 개 놓여있거나, 2리터짜리 생수 몇 묶음이 올려져 있는 걸 보면서 "어르신들이 집에만 계시는구나. 그래도 배달이 돼서 다행이다." 싶다가도 "아이고, 저 무거운 거 어찌 다 들고 날랐을까..."생각하는 건, 아마 나만은 아닐 거다.
코로나 시대에, 그들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물도 못 마시고, 밥도 못 먹었을지 모른다. 유럽 마트에서 물 사재기, 휴지 사재기한다고 속으로 욕했지만 사실 그럴 필요가 없어서 안 했을 뿐이다. 그들에겐 우리처럼 빠르고 싸고 편한 택배가 없다. 하지만 이건 영 아니지 싶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죽는 건차원이 다른 문제다.
새벽에 들어가, 잠도 못 자고 옷만 갈아입고 다시 회사로 돌아와 일을 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눈을 비볐다. 노동자는 노동을 팔았을 뿐, 인격을 판 것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을 판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잠도 못 자고 일을 했다니... 회사에서는 이런저런 핑계를 댈 테지만... 누가 잠도 자지 않고 일하고 싶을까, 구조적으로 그렇게 짜 놓았을 것이다. 19세기 어린이를 착취하던 산업혁명시대도 아니고 1970년대 전태일이 분신해야만 했던 여공 착취 시대도 아니건만. 무엇이 다르지? 사람을 죽이는 노동. 그거 하지 말자고 고용노동부도 있고 노동법도 있는 거 아니었나. 택배비가 너무 헐한 것이 문제라면 가격을 올리고 사람을 더 고용하면 되지 않을까. 세상에 어느 누가 다른 사람의 목숨을 값으로 쇼핑을 하고 싶을까.
자장면 한 그릇 먹고 싶으면, 중국집에 가서 먹으라던 아버지. 그게 인간의 도리라고 혼내셨던 아버지. "나 조금 편하자고 다른 사람의 수고를 함부로 누리면 안 된다" 던 아버지의 인간론이 문득 떠오른 아침이다. (배고픈 어린이 입장을 고려해 좀 쉽게 차근차근 알려주셨으면 좋았겠지만;... 어쨌든) 그 교훈만큼은 30년이 지난 이시대에도 여전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한그릇만 시키는 건 절대로 안된다고 하셨어. 근데 최근에 혼자 계실 때 집에 가봤더니 시켜먹고 계시더군.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