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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문수 Nov 01. 2020

재주의 저주

폐기 직전의 방송작가 일기


"운이 좋은 것 같아"


귀가할 때 종종 차를 얻어 타던 성우 선배님이 이런 얘기를 하신 적이 있다. 뽑은 지 얼마 안 된 새 차에서 나는 가죽 냄새에 취한 내가 아마 이런저런 무례한 질문을 퍼부었기 때문일 것이다. 돌려 돌렸겠지만, 질문의 요지는 "당신은 어떻게 이런 좋은 차를 살만큼 세속적으로 성공하셨냐"는 것. 스스로에게 화가 많이 나 있던 때. 경제적으로 어려우니 속으로는 꽁하게 뒤틀려있어, 티 내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너무 보였을 것이다. 흔한 답이지만 실망하진 않았다.


".... 그럴까요? 역시 운"  


아니, 그 답은 위안을 줬다.  '아직 운이 오지 않아서야. 운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올 때까지 기다리자. 내게도 한 번쯤은'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들면서도 또 기대하게도 하는 마력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 좀 흐르고 보니, 말귀 완전 잘 못 알아먹었네 싶다. 그녀가 가져다 쓴 겸손의 표현일 뿐.  "운을 기다리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안일함의 엉덩이 뒤에 대충 꽂아 놓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어찌 한 발만 살짝 피해보려던 물음표는 기다렸다는 듯 더 무거운 도끼가 되어 발등에 꽂힌다.


*       *       *       *

  

"행복한 가정은 비슷하다. 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 각각의 이유가 있다..." 던 <안나 카레니나>의 첫 구절을 결국 내 인생으로 데려오게 될 줄 몰랐다. "잘 사는 인생은 비슷하다. 그러나 망한 사람의 인생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다시 말해 방송작가로 10년 넘게 굴러다니며 밥벌이를 해왔지만 결국은 쓰레기 통에 던져지기 직전이란 얘기. 종량제 봉투를 반쯤 머리에 쓴 채, 이렇게 쫓기듯 식탁에 앉아 성급한 아침 일기를 써야 하는 이유다.


방송작가는 '운'을 기다려서는 안 되었다. 어쩌면 운 따위는 생각도 하지 말고 남과 다른  "나"를 표현해야 했는지 모른다. 아닌 것에는 '노'라며 돌아서야 했다.


그러지 못했다. 가난은 피곤한 몸을 눕힐 방의 크기만 줄이는 게 아니라 한 줌 자존심마저 흩어버린다.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만으로도 허기지던 무명작가는 새 프로그램을 맡을 때마다 감사하며 적응하고 맞추려고 애쓴다. 나 보다 프로그램이 중요하니까. 막냇동생보다도 한 뼘은 나이 어린 피디가 스스럼없이 커피 심부름을 시킬 때... 반말과 존댓말이 교묘하게 뒤섞인, 대화인지 지시인지 모를 회의를 하면서 모래 섞인 밥알처럼 이물감이 느껴질 때도 귓구멍으로... 질끈 넘겼다. 세상에 성격 좋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들 참을 거야,라고 세뇌했다. 아닌 게 뻔한 기획안에도 '노'라고 말하는 대신 돌아서 눈알을 굴리고는 말한다. "이렇게 좀 바꿔보면 어떨까요." 그리하여 결국은 왕관 대신 쓰게 되었다. 종량제 봉투를.



*       *       *       *


며칠 전, 한 방송사에서 10년 동안 아침 방송을 준비하던 작가가 전화 한 통으로 해고되었다는 뉴스를 읽었다. 새벽이라고 부르기도 아직 애매한 한밤 중에 일어났을 것이다. 10년 동안. 명절이나 가족 행사, 친구들과의 저녁 약속마저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머리를 긁적였을 것이다. 그 일은 노하우가 필요 없었던 것일까. 그렇게 쉽게 대체될 수 있던 일이었을까.



밀그램 실험. 간수와 죄수와 역할극일 뿐인데 간수를 맡은 이들은 이유 없이 더 잔인해진다. 권력이 그런 걸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자르기 쉬운 사람을 자른다. 누군가의 생사여탈을 좌우할 수 있다는 권능감. 정규직이 비정규직에게 갑질을 하는 이유의 전부. 프로그램에 개선 요구가 들어오면 제일 먼저 작가가 바뀐다. 어제까지 동료지만 내일은 모르는 사람.



해고된 날의 가슴을 열어본다. 후진 방송사, 후진 제작사, 후진 피디일수록 더 빨리 작가를 잘랐다. 더욱더 자주 잘렸는데 그때마다 심장 귀퉁이도 여지없이 조금씩 잘려나갔다. 심장이 자라날까. 더 재생 안되면, 그땐 죽는 거겠지. 내 수명은 얼마나 남았을까.



방송을 만드는 데는, 여러 재주 있는 사람들의 노동이 뒤따른다. 이름 알만한 연예인과 유명 피디들 뒤로, 수많은 무명의 스태프가 있다. 대게가 비정규직. 그들도 나름 재주가 있는 사람들이다. 프로그램이 성공했다면 그 성공에도 그들의 수고가, 반대 이유에도 그들의 부족함이 조금씩 포함되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중 한 줌만이 소위 '인정'을 받는다. 그들은 운이 좋았던 것일까? 기다리면 올까. 어쩌면 그 '운'이라는 게 나 몰래 왔다 가버린 걸까. 둔하디 둔해 심장이 다 바스러졌는데... 죽은 줄도 모른 채 살아있다고 믿고 있는 좀비. 그게 바로 나다.  일요일 아침 괜스레 마음이 분주하다. 오래된 고민을 발등에 꽂은 채로.



 






작가는 다른 프로그램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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